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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김승교의 사랑의 법칙

<심층취재> 도봉 갑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예비후보 김승교 변호사를 찾아서

이창기 기자 | 기사입력 2008/01/19 [16:04]

인권변호사 김승교의 사랑의 법칙

<심층취재> 도봉 갑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예비후보 김승교 변호사를 찾아서

이창기 기자 | 입력 : 2008/01/19 [16:04]

김승교

 

김승교

<김승교 변호사, 평소 사람들에게는 소탈한 웃음에 부끄러운 듯 멋적은 미소를 곧잘 짓는 그가 일을 손에 잡으면 눈빛이 변한다 >

[편집자 주: 고 김승교 열사를 추모하며 2008년 취재한 기사를 다시 첫화면에 소개합니다. -2015. 09.03] 

 

정치인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덕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사심 없이 사회와 민족 그리고 인류를 위해 자신을 다 받치는 헌신하는 자세일 것이다.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와 나라를 위해 물적, 인적자원을 조절 통제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목민관의 자세 중에서 청빈을 강조하였던 것이리라.

황희정승의 계란유골 고사에서부터 정약용, 이순신 장군 등 모든 충신들은 하나같이 자기 집안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였고 자신과 가족의 배를 불리기보다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받쳤다. 역사책 어디에도 자신과 가족을 먼저 내세우고 참된 정치인이 된 사람은 없다.

서울 도봉 갑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는 김승교 변호사가 바로 그런 삶을 일관되게 살아온 사람이다.
386출신 정치인들도 적지 않게 만나보았지만 김승교 변호사처럼 자신을 버린 사람은 흔치 않았다.

40여년의 김승교 변호사의 삶에서 ‘자신’과 ‘가족’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대학시절 이후 그의 삶은 오직 사회와 민족 그리고 동지들과 벗들을 위한 시간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쟁쟁한 이론가이기 보다는 성실한 실천가

민주노동당 김승교 도봉 갑 국회의원 예비후보는 경남 진양군의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다.
8형제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진주 시내 포목점 점원으로 일하며 대가족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동생들 학비도 모두 아버지가 책임졌다.
1달에 한두 번밖에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는 장손 며느리로서 농사도 짓고 제사 등 그 많은 집안 대소사 일을 처리하며 어렵게 자식들과 시동생들을 보살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어머니의 고생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김승교 변호사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다가 가끔 너무나 힘겨워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사촌형제만 50여명이 될 정도 큰 대가족이었으니 가정 형편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지만 어린 시절에는 가족들과 편을 갈라 축구도 하고, 중학교 때는 집 지하실에 탁구대를 설치하여 명절날 가족 탁구경기도 여는 등 항상 화목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승교 변호사는 어쩌면 이런 대가족 속에서 서로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품성을 체득했는지도 모르겠다. 

법조인이 되어 고생하신 부보님께 효도하겠다는 뜻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곁에서 보고 자란 김승교 변호사는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법과대에 진학했다.

86년 입학할 당시 “데모하면 인생 망친다.”는 가족들의 충고를 많이 듣고 또 고생하신 어머님 생각에 해서 입학해서 몇 달간은 민주화시위를 멀리서 관망만 했다.

그러나 5.18광주항쟁의 진실을 접하게 되고 사회정의에 과한 책도 보면서 김승교 변호사는 지신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이 땅 모든 어머니들의 피눈물을 알게 되었고 또 그 눈물이 누구 때문에 흘리게 되었는지도 점차 깨닫게 되어 방학이 끝난 후에는 스스로 학생회실을 찾아갔다.
그 후 김승교 변호사는 사회를 바꾸는 일에서 모든 것을 던졌다.

2학년 때였던 87년 6월 항쟁의 한 복판에서 목이 터져라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다. 명동성당에 진입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고 성수동 공단 앞에서 노동자들에게 유인물을 돌리다가 체포되어 구류를 살고 나오기도 했으며 6.29선언이 나오기 직전 계엄이 선포되고 탱크가 서울에 진입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 때는 탱크가 들어오는지 망을 보기 위해 구리시 서울 초입에 나가서 지키기도 했었다.

조국통일 투쟁의 열기로 끓어올랐던 3학년 때는 법대 사회부장으로 선전물 배포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주변 동네와 공단을 돌아다녔고 시위물품을 준비하느라 고물상을 전전하는 등 항상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3학년을 마치고 방위병 복무를 할 때도 군대 내에 애국적 군인들을 모아 많은 모임을 꾸려나갔으며 진주시내 시민단체의 활동도 도와주었다. 때때로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포목점 일까지 도와주었으니 이때가 대학시절보다 더 바빴다.
이 바쁜 와중에도 지금의 아내 황정화 씨를 만나 사귀기 시작하였다.

등록금은 집에서 대주었지만 생활비는 모두 김승교 변호사 자신이 벌어야했다. 그래서 시위를 하다가도 최루탄 묻지 않은 친구의 옷을 빌려 입고 과외학생 집으로 달려가기도 했으며 방위병 복무를 할 때도 과외를 2개나 했었다.

4학년 때 복학해서도 한결같이 학생회실에 나왔고 집회 현장에도 빠지지 않았다.
“선배는 잘못하면 경찰에 요주의의 인물로 찍힐 수 있으니 가급적 현장에는 않나오는 것이 좋겠다.”고 후배들이 걱정을 해줄 정도였다.

그래서 법대에 ‘통일사랑’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후배들에게 민족의 얼과 통일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이 ‘통일사랑’은 지금도 고대 법대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 중에 하나이다.

매일 도시락까지 준비해야했던 자취생이라 그렇지 않아도 바쁠 텐데 공부하랴, 과외하랴, 후배들 챙기랴, 세미나 준비하랴 늘 시간에 쫓겼지만 아침이면 동아리실에 제일 먼저 나와 청소하는 사람은 김승교 변호사였다.

“나는 똑똑한 운동이론가이기보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성실한 일꾼이었다.”
그의 말처럼 그는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주어진 일을 황소처럼 뚜벅뚜벅 해내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시대의 한복판에서 울린 변호사의 사자후...

그렇게 헌신적으로 살다보니 김승교 변호사에게도 수배령이 떨어졌다. 시위 모습이 경찰 사진 채증에 걸렸다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었다.
수배령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마치자 노동자들을 사회역사의 주인을 설 수 있도록 하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노동현장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준비를 해나갔다. 사귀고 있던 황정화 씨도 노동운동을 결심하고 함께 준비하고 있었기에 이 한 쌍의 연인의 의지는 굳건했다. 그러나 갑자기 황정화 씨가 행방불명 상태에 처해 연락이 두절되었다.

‘혹시 잡혀가서 의문사를 당한 것이 아닌가’, 놀란 김승교 변호사 친구들은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한 참 후에야 황정화 씨가 폐결핵 말기 판정을 받고 국가보건기관에 의해 강제로 요양소에 붙잡혀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노동현장으로 안내하기로 한 사람도 사고가 나서 연락이 끊기는 등 문제가 발생하여 현장에 들어가는 일이 어렵게 되어 벗들과 논의 끝에 김승교 변호사는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특기를 살려 전문성을 가지고 노동자 농민들을 위해 그리고 사회 변혁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위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김승교 변호사 못지않게 열혈한 민중사랑, 조국사랑의 뜻을 가졌던 애인 황정화 씨가 요양소에서 퇴원하여 나오자 도서관까지 쫓아와서 고시공부를 말렸다.
“변호사 안 되어도 민중들을 위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중요한 시기에 고시공부가 다 뭐냐”는 것이었다. 참 대단한 애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출세가 아니라,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데 법조인이 되어 일조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그는 흔들리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렇게 해서 96년 사법시험 제 38회에 합격하였고 99년 사법연수원제28기를 수료하여 바로 변호사 일을 시작하였다.

김승교 변호사는 연수원 시절 일찌감치 판검사가 아니라 변호사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연수원 시절부터 참여연대 활동을 하였으며 연수원내에서도 ‘통일법학회’를 만들어 1년에 한번씩 백두산 기행을 가는 등 동지들과 뜻을 키우는 일을 한시도 쉬지 않았다. 
이 통일법학회 모임과 백두산 기행은 연수원 후배들이 지금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김승교 변호사는 변호사가 되자마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가입하여 인권변호사로서 국민을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민변에서도 ‘국가보안법연구 특별위원회’와 ‘통일위원회’ 활동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10여년의 법조인 활동을 하는 동안 국가보안법관련 피해자들을 변호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제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국가보안법관련 인권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특히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위한 변론에 열과 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결혼도 하고 집에는 귀여운 자녀가 둘이나 태어났다. 거의 무료에 가까운 국가보안법 재판을 전담하다보니 아내에게 넉넉하게 생활비한 번 가져다주지 못해 가정을 꾸려가며 변호사 공부를 병행하고 있던 아내의 고생도 늘어만 갔다.

아내가 사법시험 44회에 합격하여 연수를 마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자, 가져다주던 얼마 안 되는 생활비도 이제는 거의 집에 가져다주지 않고 생계를 아내에게 거의 맡기다시피 하고 있다.
아내를 보면 늘 미안한 마음이지만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이 활동비가 없어 쩔쩔매는 것을 보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김승교 변호사는 법조인으로서 활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학술단체인 한국민권연구소 소장으로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인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상임공동대표로서 직접 현실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단체들의 재정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그래서 단체 사람들은 농담 삼아 김승교 변호사가 시민사회단체 활동하는 사람들 밥 사준 돈만 아꼈어도 아파트를 몇 채 장만했을 거라고 말하곤 한다. 특히 선후배 동지들에게 자잘하게 챙겨주는 돈은 거액의 후원금 못지않게 많이 들지만 그렇게 티도 나지 않고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의 가족들은 지금도 월세 아파트에서 산다.

김승교 변호사는 인권변호사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재판에서 승소율이 매우 높은 유능한 변호사이다. 마음먹고 돈을 벌려고 했다면 적지 않게 돈을 만질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이 주변 변호사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는 오직 민중이 주인이 된 세상, 우리민족이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나라를 만드는데 자신의 전문성을 모두 다 바치겠다는 의지로 변호사가 되었고 그 일을 우선시했다.
일심회 사건의 경우에는 한 달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집중심리가 잡혀 매일 법정에 가야했기에 수입이 나오는 다른 변호는 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수구세력은 일심회 포섭대상이었던 변호사가 일심회 사건 변호를 한다고 김승교 변호사에 대해 공격을 가해와 고향의 아버지와 친척들은 제발 그만 두라고 했지만 살인범도 변호하는 것이 변호사의 임무라며 끝까지 책임졌다.  

기자는 김승교 변호사가 법정에서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변론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 그렇게나 부끄러움도 많고 소탈하기만 하던 사람이 법정에 서자 목소리 색깔이 달라졌다.
재판장을 압도하는 강철같은 묵직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검사의 논리를 지적하고, 유도질문으로 피해자를 궁지에 몰아가려고 하는 검사에게 때로는 사자처럼 포효를 터트리며 반박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돈이 아니라 오직 국민의 인권신장을 위해...

김승교 변호사는 변론만이 아니라 피의자들에게 가해지는 법무부의 부당한 관행에 대해서도 끝까지 법정투쟁을 전개하여 여러 승리를 이끌어내었다.

피의자 변호인 접견시 수사기관에서 사진 촬영한 것에 대해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사소한 투쟁에서부터 검사실에서 피의자에게 수갑과 포승줄로 꽁꽁 묶어놓고 장시간에 걸친 조사를 하는 관행에 대해 2001년 헌법소원을 내고 끝까지 싸워 결국 2005년 승소(2005.5.26선고 2001헌마728)하였다.  

그때까지는 검사실에서 피의자를 조사할 때 검사는 피의자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포승과 수갑을 채운 채로 조사를 하기 일쑤였고, 검사가 계호를 하고 있는 구치소 호송관에게 괜찮다며 피의자의 수갑과 포승을 풀어주라고 해도 호송관들이 구치소 계호규정이라며 풀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국가보안법 피의자뿐만 아니라 모든 피의자들에게 다 해당되는 사안이다.
그래서 피의자가 되었던 어떤 어머니는 검사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딸과 남편이 보고 있는 검사실에서 손을 뒤로 한 채 수갑을 채운 것도 모자로 포승줄로 꽁꽁 묶어 놓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심경을 밝히기도 했었다.

검사실에는 검사뿐만 아니라 조사계장과 여직원도 있고 음식배달부도 들락거리는 곳인데 그렇게 꽁꽁 묶인 채로 조사를 받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치욕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묶인 상황에서 한나절 또는 하루 종일 조사를 받다보면 몸이 가려워도 긁을 수도 없고 온 몸이 저리는 등 생리적, 육체적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 피의자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아직 범죄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임에도 구치소의 계호규정 때문에 그 오랜 기간 그 수많은 피의자들이 그런 고통을 당해왔던 것이다.

김승교 변호사가 낸 헌법소원이 승소하자 당장 구치소의 규정이 바뀌었고 극히 위험한 피의자가 아닌 모든 피의자들이 포승은 물론 수갑도 차지 않고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일 하나만으로도 김승교 변호사는 높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당시 언론에서도 이 판결을 적극 환영하는 보도가 수없이 나왔고 법학대학에서도 중요한 이슈이자 헌법해석의 연구대상으로 관심을 가졌었지만 그것이 김승교 변호사가 헌법소원을 내고 오랜 기간 끝까지 싸워서 이룬 결과라는 사실은 어느 언론사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기자도 김승교 변호사가 검사실 수갑, 포승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다는 것은 예전에 알고 있었지만 2005년도에 승소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취재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김승교 변호사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이 부끄럽기만 한지 사무장을 불러 경력이 적혀있는 선전물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기자에게 툭 던지며 “에이 이것 참고해서 쓰세요”라며 쑥스러운 듯 괜한 머리만 매만졌다.

물론 이런 헌법소원을 낸다고 해서 자신에게 무슨 수임료가 떨어지는 것은 없다. 반대로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김승교 변호사는 그 일 뿐만 아니라 한총련 이적규정과 관련해서 헌재에서도 폐지결정이 나오지 않자, 유엔인권이사회에까지 제소하여 2005년 기어이 ‘유엔인권이사회의 한총련 이적판결에 대한 국제인권규약 위반 결정(2005. 7. 20. 선고 사건번호 2002-1119’을 받아내었다.

아직, 우리나라 법무부에서는 한국 내 사정을 들어 한총련 이적규정을 철회하지 않고 있지만 김승교 변호사의 유엔판결로 이미 그 명분을 잃어버렸다. 한총련을 이적단체시하면 할수록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유엔인권규약을 위반하는 나라라는 오점만 더 길게 남기는 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뿐만 아니라 뉴욕에서 진행한 코리아국제전범재판과 서울에서 열린 조선일보민간법정에 참여하여 우리 국민들의 민권과 인권을 옹호했던 일 등 글로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변함없이 해왔다. 모두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나라의 주권과 국민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일들이었었다.


사랑의 법칙...

황정화

< 사진 : 황정화 변호사 >

 

“그이는 피터팬 같아요. 절대 변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나에게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남편으로서는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일도 많고 약속도 많아 정말 집에 들어오면 파김치가 되어 쓰러집니다. 나 같으면 힘들어서 못가겠다고 약속 몇 개는 취소했겠는데 그이는 그 많은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다 소화해냅니다. 요즘은 조기축구회를 한다며 일요일에도 늦잠 못자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나갑니다. 성실한 것은 인정해주고 싶습니다.”

기자는 김승교 변호사 아내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서 으레 정치인들의 아내가 남편자랑 내놓듯 달콤한 말이 나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내 황정화 변호사는 이렇듯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생활비 등등 남편에 대한 서운한 감정부터 털어놓았다. 물론 그 서운함 아래에는 더 큰 존경심과 사랑이 깔려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기에 황정화 변호사도 그 바쁜 변호사 업무를 보며 아이들과 가정을 챙기면서도 시간을 내어 남편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리라.

대학시절에는 김승교 변호사 못지않게 열렬한 운동가였고 또 지금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황정화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보니 정말 생각되는 것이 많았다.

김승교 변호사는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가 간경화로 10년 투병생활을 하다가 50대의 젊은 나이에 운명했을 때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3년간은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스치듯 어머니의 영상만 떠올라도 심장이 멋을 듯 답답한 가슴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그 증상이 3-4년 갔다. 아, 그래서 3년상이라는 말도 나왔나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조국과 사회를 위해 다 바쳐버린 그이기에, ‘그렇게나 고생을 하며 키워준 어머님께 너무나 해준 것이 없다’는 그 회한이 심장을 멎게 할 정도의 물리적 통증이 되어 돌아와 3년도 넘게 괴롭혔던 것이다.

이렇듯 김승교 변호사도 너무나 효성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걱정하는 가족보다는 고생하는 동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부모님의 바람보다는 조국의 운명과 국민의 염원이 더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아내의 고생과 아픔을 곁에서 직접 보고 듣고 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변함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도 너무나 아내를 사랑하고 귀여운 딸과 아들을 예뻐하는 이 땅의 평범한 정 많은 아빠이자 남편이다.

아내가 고시공부를 결심하자, 김승교 변호사는 “내가 다년간 사용하고 연구해본 결과 이  연필이 번지지 않고 제일 줄이 잘 그어졌으며 또 이 자가 가장 정확하게 밑줄을 그어 주더라”라며 연필과 자, 그리고 자신이 공부했던 책을 선물로 다 내주었다. 아내는 정말 남편이 사준 연필과 자가 너무나 줄이 잘 그어져서 사소한 것 같지만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남편이 보던 책을 보고는 사람을 대하는 털털한 성품과 달리 너무나 꼼꼼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어 새삼 놀라기도 하였다.

아내의 공부를 전적으로 밀어주기 위해 예쁜 딸도 처가댁에 내려 보냈다.
거의 신혼 기간이었지만 아내의 고시공부 위해 알콩달콩한 깨소금 생활 포기하고 생홀아비생활 자처하였다.

아내가 밖으로 나가 일하면 어려운 일, 혹은 유혹을 겪을까 걱정 해주고, 넉넉하게 생활비를 벌어다주는 것도 하나의 아내사랑일 수 있겠지만 아내가 스스로 능력을 키워 사회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자주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도움을 주는 것은 애국자, 사회운동가들의 참된 아내사랑이자 어길 수 없는 도덕의리이다.

김승교 변호사는 가족을 더 챙겨야한다는 충고를 주위에서 곧잘 받는다. 그 지적도 김승교 변호사가 새겨들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도 김승교 변호사의 그 깊은 아내사랑, 가족사랑의 마음을 다는 모르는 것 같다.
나라와 민중에게 복무하느라 챙겨주지 못한 만큼 아내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정이 더 가슴깊이 사무치는 것이 애국자의 사랑의 법칙임을 누구나 이해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김승교 변호사가 왜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보다 민중과 나라를 앞세울 수밖에 없는지를, 둘을 다 잘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나라와 민중을 위해 복무하고 싶은 그 마음이 왜 고결한 시대정신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참다운 민중의 충복은 자신과 가족을 동일시할 줄 안다. 가족을 위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박현선 씨는 김승교 변호사에게 자기 가족의 소송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전화로 문의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마다 김승교 변호사는 친절하게 도와주었고 나중에 만났을 때는 그 일 잘 되었냐고 확인까지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김 변호사가 전화로 오랜 시간 자세히 답을 해주어 그렇게 바쁜지 몰랐는데 후에 선본에서 같이 일을 해보니 전화기에 불이 일고 정신없이 바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김승교 변호사는 모질지 못하고 거절을 못하는 것이 자신의 단점이라고 말한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체질로 굳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그의  삶 중에서 ‘나’, ‘자신’, ‘가족’이라는 말을 완전히 삭제해버린 것 같다.
대신, 동지들과 민중 사회와 역사, 민족과 인류의 염원만 가슴 가득 차 있음이 분명하다.

김승교변호사

<도봉구에 최소로 개설한 김승교변호사사무소, 그 한켠의 선거사무실 입구>


참된 민중사랑의 결론은 민주노동당 강화...

김승교 변호사는 그래서 정당도 민주노동당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가장 참되게 민중을 위해 복무하는 길은 민중이 사회역사의 주인으로 나서게 하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만이 유일하게 국민을 표를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인, 사회역사의 주인으로 바라보는 정당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김승교 변호사는 특히 ‘6월항쟁’을 겪으면서 ‘우리 민중의 힘이 이렇게 거대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그 6월항쟁의 성과가 반감되는 것을 보면서 ‘한순간의 민중의 폭발로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역사는 민중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애써 피 흘려 쟁취한 성과물도 일순간에 빼앗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를 발전시킬 조직화된 민중이 필요하다’는 진리도 함께 절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위한 길을 변함없이 걸어왔으며 결국 민중을 거대한 힘으로 모아낼 민주노동당을 강화하는데 자신의 작은 힘이나마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결심을 세우게 된 것이다.

“옳은 길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해도 무조건 간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양심이 가리키는 대로 살자는 것이 나의 기질이고 의지이다.”
그래서 김승교 변호사는 “당장 당선가능성이 높은 비례대표의 길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민주노동당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역후보로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민중을 위해 참답게 사랑하고 헌신하는 사람만이 청렴결백하게 살 수 있으며 가장 높은 정치적 능력을 갖게 된다.
민중이 원하는 일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없는 능력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경제인이라면 또 다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참된 정치인이 되려면 그래서 나와 가족보다 조국과 민중을 앞세우는 자세를 체질화해야 하는 것이다.
김승교 변호사는 부족할지는 몰라도 한순간도 그런 삶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김승교 변호사는 이미 인권변호사로서 국민의 인권과 이익을 지키는데 여러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 민주노동당의 뿌리를 지역에 깊이 심기 위해 서초동에서 도봉구로 변호사사무실을 옮겨 최근 개소식을 열었다. 법원이 없는 도봉구에서 생긴 최초의 변호사 사무실이다. 선거 때만 얼굴내미는 철새정치인이 아니라 저 도봉의 굳건한 산악처럼 변함없이 도봉구민들의 곁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의 권리를 지키고 빛내는데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시대와 민중의 부름에는 뚜벅뚜벅 변함없이 걸어가는 황소와 같고,
재판장에서 억울한 사람을 변론할 때는 포효하는 사자와 같고,
선후배,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소탈하고 부끄럼 많은 산골 소년과 같은 사람, 김승교 변호사.

그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주민을 위해 변함없이 헌신할 것이며,
주민들의 이익을 지키는 길에서는 성난 사자와 같이 단호할 것이며,
주민들과 더불어 서는 소탈하고 친근한 벗으로 사랑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삶과 의지가 저절로 도봉 갑 구민들에게 전달되지는 않을 것이다.

김승교 변호사와 그 선거운동원들은 이제 그 민중사랑, 민중복무 정신을 구민들을 위한 공약으로 얼마나 잘 만들어 내고 또 그것을 알리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뛰느냐는 과제를 다시 안게 되었다. 시작은 이제부터다.●

황정화변호사

<남편이 밉지만 그래도 존경스럽다는 황정화변호사>

 

김승교

<인터뷰 중에도 끊임없이 울려대는 그의 전화벨, 그래도 그는 정성스럽게 답변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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