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일침63] 원훈과 논리

중국시민 | 기사입력 2016/06/14 [20:42]

[정문일침63] 원훈과 논리

중국시민 | 입력 : 2016/06/14 [20:42]

 

▲ 국정원 과거 원훈석  



▲ 국정원 원훈 변천사  

 

이름을 바꾸면 정말 운이 바뀌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만 그렇게 믿고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이 중국에나 한국에 있는 건 사실이다. 인간이 아니라 덩치가 큰 조직체라면 다른 무언가 바꾸는 것 또한 중국에서는 드물지만 한국에서는 엄연한 사실이다.

 

6월 13일은 금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어서 서방식으로 따지더라도 길일인가?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했다는 소식이 중점으로 보도되는 것과 더불어 국가정보원이 10일부터 원훈과 엘블럼을 교체했음을 공개했고 여러 언론사들이 비중 있게 다뤘다. 어떤 언론사들은 “'댓글' 이미지 지우기”라고 꼬집기도 했다.

 

관련보도를 보니 수십 년 동안 원훈이 4번 바뀌었다 한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 시절에는 원훈(“부훈”이 맞겠다)이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단다. 중국국민당 특무조직인 남의사와 군통의 두목이었던 따이리(戴笠, 대립)이 부하들에게 훈계했던 말 “훠저찐라이 쓰러추취(活着进来,死了出去, 살아서 들어와 죽어서 나가라)”만큼 섬뜩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음습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가 수사학적으로는 상당히 멋이 있고 논리적으로도 통한다.

 

김대중 정부가 안전기획부를 국가정보원으로 바꾸면서 바꾼 원훈은 “정보는 국력이다”였단다. 너무 간단하고 밋밋한 구절인데 박정희 시대에 나왔다는 “강철은 국력이다”를 본뜬 것 같기도 하다. 글쎄 박정희 시절 중앙정보부의 가장 유명한 행동에서 납치되어 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살아난 김대중 대통령으로서는 정보기관의 체질을 바꾸려고 시도했겠다만, 원훈에 미가 부족한 건 분명하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성립된다.

 

10년 지나 이명박 정부가 원훈을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바꿨다는데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좌파정권 흔적을 지우려는 의도가 다분했을 것이다. 원훈 자체는 말이 되고, “무명의 헌신”을 한 사람들도 당연히 있겠다만, 그동안 인도네시아 대표단의 노트북을 호텔방에서 들고나오다가 들킨 사건, 댓글공작으로 대통령선거개입사건, 유우성간첩조작사건 등등 유명의 망신을 한 사건과 인물들이 적잖으니 원훈과 실천은 어긋났다고 보아야겠다. 게다가 4년 남짓이 국정원장을 맡았던 원세훈 씨는 얼마 전에 조선(북한) 최고지도자의 부인 리설주의 인기상승을 막기 위해 댓글공작을 지시했다고 밝혔으니 이거야말로 국제사회에 소문내는 망신이 아닐까 싶다. 그 자신은 대통령선거에 개입한 댓글공작지시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자기가 명령한 댓글공작내용을 공개한 모양인데, 그 자질이 놀라울 따름이다.

 

어떤 언론사는 이번에 국정원이 개혁 작업의 일환으로 원훈을 전격 교체하고 공개했다고 분석했고, 국정원은 새 원훈 “소리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에 대하여, “소리없는 헌신”을 국정원 직원들의 굳은 다짐으로,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는 “국정원의 사명”으로 소개했다는데, 필자는 5분쯤 어리둥절해났다. 이게 논리적으로 성립되는 말인가?

 

지금까지 필자가 배우고 써온데 의하면 “오직”은 여럿 가운데서의 하나만을 가리키거나 둘도 없는 어느 하나를 가리킬 때 쓰인다. 한국의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그뿐, 다만”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따라서 “오직” 뒤에는 무언가 하나만 붙어야 상례에 맞는데, 새 원훈에서는 “수호”와 “영광” 둘이 붙었다. 어느 하나가 빠져서
“오직 대한민국 수호를 위하여”
“오직 대한민국의 영광을 위하여”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라고 한다면 논리적으로 성립된다. 그런데 오직...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는 어딘가 어색하다. 누군가 중국어로 번역한다면 욕을 먹기 십상이다. 무슨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하느냐고. 이제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지 모르겠는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논리적 모순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여 적당히 번역한다면 몰라도 직역하면 말이 되지 않기 쉽겠다.

 

혹시 “오직 대한민국을 빛내길 위하여”라고 한다면 훨씬 더 멋있지 않을까? 빛내는 전제조건이 존재자체니까 빛내길 위해 노력한다면 수호는 자연히 그 속에 내포된다. 적어도 중국에서 나서 자라 공부한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는 “오직...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는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렵거니와 집행자들마저 어느 것을 중점으로 대해야 할지 헷갈리기 십상이다.

 

만약 한국에서 “오직”의 의미가 변했거나, 번역기가 필요한 대통령이 집권한 현실에서 “오직” 뒤에 두 가지 의미는 고사하고 몇 가지 의미가 따라붙어도 되는 게 상례로 되었다면 애기가 달라지겠다.

 

예전의 사례들에서 알 수 있다시피 실제행동이 원훈과 어긋나는 경우들이 많았는데, “소리 없는 헌신”이 “무명의 헌신”보다 얼마나 나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다. 우선 사태가 예상 밖으로 커져버린 이른바 “집단탈북”사건들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시금석으로 될 것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로서는 원훈석들이 어디에 갔느냐가 궁금하다. 무슨 자료들을 파기했다는 얘기들이 하도 많이 나돌았기에, 비밀과 상관 없는 원훈석들도 파기해버렸다면 역사적 가치를 갖는 유물을 후대들에게서 빼앗는 격이 된다고 생각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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