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홍동근목사 아내 홍정자여사가 지병으로 7월1일 오후 9시 벨리지역의 한 병원에서 향년 72세로 영면의 길에 들어섰다.
4일 민족통신 페이스북 보도에 따르면 로스엔젤레스지역 통일운동 진영에서는 조만간에 추모모임을 가지고 백승배목사 집례로 그의 한생을 돌아보는 행사를 가진다고 한다.
홍정자 여사는 우리들이 잘 아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친누나다. 홍동근 목사님과 결혼 전의 본명은 백정자.
민족통신은 홍정자 여사는 미술을 전공하였고 또한 불문학도 전공하였으며 한국에선 대학에서 미술 강사로도 있었다며 홍 여사의 방문기는 그분의 뛰어난 예술적인 감성과 묘사력, 그리고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북을 깊이 이해하는 따스한 눈을 통하여 읽는 독자들에게 북부조국의 진실과 그 인민들의 삶을 깊은 감동으로 전달하였다며 그의 삶을 뜨겁게 추억하였다.
홍정장 여사 약력
미국에 온 연도 : 1978년
다음은 민족통신에서 보도한 홍정자 여사에 대한 기사이다.
홍정자여사, 그는 누구인가 -민족통신 (2004년 11월30일자) 보도
이북사회를 깊숙이 다룬 책이 미주동포사회에서 또다시 출판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354쪽으로 된 이북 각계인물 탐방기가 최근 로스엔젤레스에서 발행되었다. 화제의 책을 출판한 저자는 홍정자 화백(고 홍동근 목사 부인)이다.
홍 화백은 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2000년9월30일에 『백두밀림의 항일투사 김정숙 어머님을 추모하여』를 발행한 이래 이번 세 번째 탐방기를 내 놓았다. 이 책들에서 소개된 사진들만 해도 1백50여장이 된다. 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상대로 대담한 대상들의 숫자만 해도 1백50여명이나 되고 그 대상의 분야들도 다양하다. 저자는 그 대상들과의 깊은 대담을 통해 이북 동포들의 생활과 마음 깊숙한 부분까지 반영해 준다. 홍 화백과 대담한 북녘 동포들은 하나같이 순수했고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들이라고 설명한다. 서로가 가슴으로 만났기 때문에 저자는 이들을 탐방취재 하면서 많은 눈물을 보았다고 술회한다.
그는 1988년 첫 방문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30여 차례나 방문하면서 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만났다. 이들을 탐방 취재하기 위해 해외동포들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아오지 탄광"까지도 돌아보며 이북의 구석구석을 소개해 줬다.
왕년의 명우이며 월북인물인 문예봉, 지휘자 김일진, 몽양 여운형의 딸 여연구, 이북 무용계의 최승희 인척들, 천재소녀화가 오은별, 원로 체육인 신금단, 역도산의 딸 김영숙, 한용운 시인의 자손들 및 허정숙 등 정치계, 음악계, 미술계, 체육계, 종교계, 연예계, 학술계, 문학계, 항일혁명가들과 가족들, 보건의료계, 영예군인 가족들, 교육계, 광부들과 일반 노동자들, 인민군인들, 농촌 인민들 등이 홍 화백의 탐방 대상들이었다.
이 번에 출판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책은 신발수리공의 가족들을 만나 대담한 내용을 비롯하여 바둑신동 최은아, 평양교예단, 처녀엄마들, 지리산의 호랑이 이현상의 딸 이상진, 평양 외국어대학, 아오지 탄광, 계관시인 김시권, 칠골교회, 노동자는 왕-정춘실 이야기, 안과의사 백형기, 4월 봄축전, 동지의 딸은 나의 딸-선원 문정섭 이야기, 사랑의 교사들, 북조선의 프리마돈나 <총련의 딸> 조청미, 용서하시라 아내여, 영화문학인 오혜영, 북조선 무용예술-최승희, 마지막에 이 책의 제목으로 택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반영된 자료들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알게 된다. 홍 화백은 「북조선의 프리마돈나"총련의 딸" 조청미」라는 소재의 인물을 만나 대담을 하고서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재일총련에 관한 도서를 거의 한 박스정도의 분량을 읽었다고 귀띔해 준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재일동포 강제북송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알고 보니 강제북송이 아니라 당시 제일 동포들이 서로 가지 못해서 가는 동포들을 부러워했던 사실을 발견하며 남한보도가 정 반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총련 동포들을 만나고 그들을 알면 알수록 가슴이 메어진다.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일본에서 모진 차별을 받아가면서도 피눈물로 지켜 낸 그들의 애국심에 대해 고개가 숙여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북동포들은 또 눈물이 많다고 한다. 왜 그럴까. 홍 화백은 "북녘 동포들은 너무나 어려운 세월을 보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깔고 살 듯이 이북 동포들은 일제와 맞서 투쟁하던 항일역사를 깔고 살고 있으며 8.15이후에는 가슴 아픈 분단역사를 깔고 우리 민족의 역사 위에 서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은 언제나 그 역사는 가슴에 안고 있으며 또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그 역사를 안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이북 동포들은 정이 많고 마음이 비단결 같았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많다는 사실들을 많이 목격했다. 김주석님을 비롯하여 김 위원장님 자신들이 워낙 열정적이신 분들이라 그곳 동포들이 모두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모든 인민들이 이렇게 뜨거운 애국심으로 가득 찬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일제시기와 더불어 분단시기 내내 고난의 행군으로 걸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북녘 동포들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신심에 넘쳐있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인간의 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확인해 보려면 이북에 가 보면 알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어렵게 생활할 것이라고 걱정하고 그곳을 가보면 오히려 한층 더 활기에 찬 모습을 보게되었다. 역사상 이런 나라가 없는 것 같다 "고 설명한다.
"이 나라는 모든 분야가 인민을 위한 사업으로 집중되어 있다. 농업도, 음악도, 문학도, 정치도, 경제도, 보건도 마찬가지다. 김병화 국립교향단 지휘자가 곡 하나를 창작하기 위해 사전에 이 곡을 농민들에게 들려주어 이들이 정말 좋아하는가를 검토하는 작업등을 거치는 과정의 경우를 비롯하여 영화를 하나 제작하여도 인민들이 정말 이것을 좋아할까를 먼저 생각하며 제작하는 나라이다. 이들이 말하는 주체예술은 곧 인민을 위한 예술이다.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야 이곳에서는 인정을 받는다. 모든 사업들은 인민과 연결되어 있다. "고 그는 말한다.
서방에서 비난하는 인권문제나 종교문제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홍 화백은 이에 대해"봉수 교회, 칠골교회, 그리고 사찰들, 천도교 등도 있지만 이 나라는 헌법으로 종교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단지 어떤 종교이든지 인민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인민중심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종교 얘기에 대해서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한국의 숭실대학교 총장을 하시던 김성락 박사가 미국에 이민 와 사시는 동안 북녘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김일성 주석님과 접견한 적이 있었는데 식사시간이 되자 김주석님은 김박사님에게 목사님 기도하시죠라고 권했던 일화는 이북을 방문한 종교인들은 모두가 아는 에피소드가 된다. 이북관리들은 북녘을 방문하는 기독교 동포들에게는 의례적으로"식사하기전에 하는 거 있잖습니까"라고 한마디 떠보는 경우들이 많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 노인 목사님이 방문했을 때 이북 관리 한 분이 목사님과 가족들 여러분들이 식사를 하는 시간에"기도 안하십니까"라고 말하자 이 목사는 그 순간 너무나 기뼈서 갑자기 일어서더니 양팔을 쭉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해 이 자리에 있던 이북 관리들이 당황한 일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라는 말이었는데 모두를 위한 공동기도로 착각했다는 것이 목사의 뒷 이야기였다."고 소개한다.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이 있었냐고 물어보자 홍 화백은 "90년대 중반이었다. 해외 동포들 3백여 명과 함께 오찬연회에서 뵐 수 있었다. 식사가 되기 전에 김 주석님이 술잔을 들어 참석자들에게 축배를 하면서 놀란 사실을 목격했다. 그날 오찬에 참석한 3백여 해외동포들 한분 한분에게 모두 술잔을 들고 다니면서 축배를 권했다. 나이 드신 분이 첫 테이블에서 끝테이블까지 자리한 참석자들 모두에게 일일이 다가가 건배를 했다. 그러면서도 축배를 마친 참석자들에게는 자리에 앉으라고 계속 반복해 권유하면서 모두에게 다가갈 때 느꼈던 것은 일종의 충격이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왜 이번 책제목을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고 붙였느냐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북 사회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의 대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이 사회를 들여다보고 확인하면서 성경의 로마서 12장 5절에 있는 구절(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북의 현주소에 대해"고난의 땅으로 연상될 만큼 시련에 시련을 거듭해 온 나라, 북부조국,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라가 뜻밖에 고상한 인간의 향기를 느껴보게 되며...유례없는 뜨거운 인간애의 화원이 펼쳐지고 사랑의 서사시가 온 나라에 흘러 넘치고 있다"고 묘사한다.
홍 화백은 이러한 이북의 실상을 캐내기 위해 해산 중에 죽은 어머니,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때문에 고아가 된 13살 혜정이와 15살 학문이 그리고 이들을 자식으로 길러 준 평양서부철도국총국 비서의 이야기들을 포함하여 광복거리에 있는 대중식당 <청춘관>의 오춘옥의 가정사를 통해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을 모셔 효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인민군 사관 리수형이 다리를 잃고 두눈이 실명되었으나 그를 위대한 아내로 맞이하여 살고 있는 사랑의 이야기, 황비봉 청년이 같이 근무하던 동료가 공사중 사고사로 세상을 떠나자 1남3녀의 외아들인 이 가정에서 자신이 죽은 아들 대신 빈자리를 메우며 이 가정의 아들이 된 이야기, 도서관 잡지에서 영예군인 노부부의 이야기를 읽고 이들을 모시기 위해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던 차성희 양이 시골로 가서 양딸로 모신 이야기 등을 소개하며 고상한 인간사랑의 화원을 펼쳐주었다.
세 권의 탐방기를 통해 그 많은 인물들, 그 많은 장소들을 방문하며 취재한 동기에 대해 그는"나는 글도 쓸 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면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남한 동포들이나 해외동포들이 이북을 너무나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가장 어려웠던 탐방 취재기는 무엇이었나에 대해 그는 <아오지 탄광>이었다고 대답한다. 남한에 있을 때 툭하면 아오지 탄광 이야기가 많이 나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런가하는 호기심과 그 실체를 알기 위하여 <아오지 탄광> 취재를 부탁하였는데 다른 취재보다 퍽 어려웠다고 말한다. "평양 근처에도 탄광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아오지 탄광이냐"는 것이었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홍 화백이었지만 그의 고집은 남달랐다는 것이 이북관리들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아오지 탄광> 탐방은 성공했다. 이 지역은 옛날의 함경북도 경흥군 소재지 읍을 말하는데 지금은 은덕군으로 바뀌었다. 아오지라는 이름은 이미 1967년 (1)오봉탄광과 (2)6.13탄광으로 개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 일성 주석이 민족학연구소를 통해 그 이름의 어원을 캐보라고 하여 조사한 결과 <아오지>라는 지명은 우리말이 아니라 여진족의 말로써 그 뜻은"불타는 돌"이라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그래서 지역 인민들의 제안으로 탄광이 있는 지역을 "은덕군"으로 개명(1977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고려, 이조시대에 와서 불행을 당한 양반들이 정배살이로 거주하던 장소였고 일제 시기에는 왜놈들이1910년대 초기부터 우리 석탄을 약탈하기 위해 조선노동자들과 중국의 쿨리들을 끌어들여 탄광마을을 이뤘던 곳으로 소개되었다. 이 지역은 남녘에서 알려진것과는 달리 오히려 북부조국에서는 가장 은혜를 입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김주석이 이곳을 네 번이나 답사한 곳으로 그 이름이 6.13탄광으로 된 사연도 그것과 연관된다. 이북 해군이 미국의 간첩선 프에블로를 나포하여 원산항으로 붙잡아 들였던 1968년 한반도 안팎의 정세는 긴장된 분위기였다. 그 해 6월13일 김일성 주석이 이 산간벽지를 답사한 것 때문에 6.13탄광이라는 이름도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저자 홍정자 화백은 미술가로 2차례의 개인전을 가져보았지만 글이라고는 한번도 써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쓴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백두밀림의 항일투사 김정숙 어머님을 추모하여』, 그리고 이번에 쓴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탐방기는 아무도 흉내내기 어려운 정도로 뛰어난 글 솜씨가 돋보였다. 아마도 뛰어난 예술가 집안에서 자라나서인지 그의 묘사력은 남달랐다. 그의 글은 가슴 가슴마다에 자국을 남겨준다.
그의 첫 작품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도 90년대 중반에 국내외에서 관심을 모았다. 첫 작품은 92년 미주에서 출판되었으나 이 도서에 담긴 갖가지 이야기들이 남녘에 전해지자 2년후인 1994년 4월25일 살림터 출판사에서 또다시 출판해 베스트셀러 10위안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후 나온 두권의 책들은 제목은 다르지만 사실상"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2편)과 (3편)에 해당하는 도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책은 그 분량이 3백54쪽이지만 한국에서 발행되는 일반 교양서적들에 비교하면 대략 3권정도와 맞먹는 양으로서 방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아무도 갈수 없었던 땅 "아오지 탄광"까지 탐방한 저자, 그는 누구일까. 그는 통일운동가이며 진보적 목회자였던 홍동근 목사의 부인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의 누이이기도 하다.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를 나와 이화여대 미술과를 졸업하고, 그이후 한국어외국어대학에서 불문과를 졸업했다. 부산한성여자대학교에서 미술과 강사도 역임했다. 미국에 이민 와서는 남편과 함께 통일운동에 참여하면서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 이산가족위원회 총무역임, 민족문화위원회 위원장 역임, 평양서 열린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재미예술단 단장(1989-2000), 미주통일여성회 부회장 역임 등을 통해 통일운동 조직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저자는 최근에는 별세한 남편을 기리기 위해 그의 도서들을 정리 선정하여 평양에 홍동근 기념도서용으로2천여권의 종교서적을 기증하기 위해 평양에 다녀온 바 있다. 요즘에는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에 홍동근장학재단을 만들어 후진들의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구상중이라고 한다.
미국 학계원로이며 해외통일운동의 원로인 선우학원 박사는"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북을 올바로 아는 것은 민족통일을 빨리하게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하고 이북방문기들 중 이렇게 심층적으로 폭넓게 그리고 깊게 다룬 책은 별로 없다면서 필독을 추천한다.-노길남 기자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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