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모 페이스북에 해금강이란 아이디를 가진 이가 북한군에 관한 흥미있는 일화들을 연재하고 있어 자주시보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국가보안법을 준수하기 위해 일부 내용은 조금 다듬었습니다. 북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인식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고조되어가는 한반도 전쟁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뿌리깊은 분단적폐를 청산하기 위해서도 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미 24사 사단장 딘의 포로생활을 통해 본 인권옹호의 진실
1. 운명의 기회
정전담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저녁, 취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 온 버체트는 우연히 자기의 군복주머니에 쪽지편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정전담판과는 대비도 안 될 토픽뉴스를 취재할 생각이 있으면 어디에 가서 누구를 조용히 만나라는 북한측의 통고였다. 이미 아무 소득이 없는 정전담판취재에 신물이 났던 버체트는 주저없이 취재를 그만두고 출국하여 북한이 지정한 3국에 가서 북한이 파견한 안내원을 비밀리에 만난다.
북한측은 이미 전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토픽뉴스감을 공개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동구권에서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미국과 서방이 폄하할 수 있었으므로 서방의 우익언론인들 가운데서 진보적 성향이 강한 인물을 고르던 중 버체트가 걸려든 것이다. 북한은 버체트를 충분히 입체적으로 요해한 다음 그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토핑뉴스를 보도할 수 있다고 점찍었다. 전쟁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토핑뉴스이며 북한의 수가 얼마나 높고 전략적 안목이 깊은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북한 안내원을 따라 버체트가 간 곳은 자강도의 어느 한 골 안이다.
거기에 바로 미군 24사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포로생활을 하는 집이 있었다. 북한은 딘 소장을 포로한 후 일반 병사들과는 달리 따로 격리시킨 후 전문안내요원을 붙여 별장과 같은 곳에서 생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행방불명된 후 거의 10개월 이상 북한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어 미국에서도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고 지어는 아주 건강하고 활기넘친 딘 소장을 직접 취재하게 된 버체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버체트는 며칠 동안 그 별장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딘의 기상으로부터 시작하어 조깅, 식사, 카드게임, 독서, 휴식, 수영, 산보, 취침 등 상상을 초월하는 포로생활 전부를 그대로 동영상필름에 담았고 딘과 여러 차례 면담하면서 대전작전의 실패와 산속에서 헤메다가 포로될 때까지의 과정, 포로수용소에서 신분확인한 후 격리시켜 잘 대우해 준데 대하여 사실 그대로 취재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온 다큐가 바로 '딘의 포로생활'이다. 사기가 나서 호주로 돌아 온 버체트는 이 다큐를 미국에서 개봉했다.
이 다큐가 얼마나 미 정계에 대파문을 일으켰는가는 굿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불과 20여분밖에 안 되는 하나의 짤막한 이 다큐가 전반적인 전쟁국면에 큰 영향을 주고 일약 버체트를 세계적인 유명언론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면 딘은 어떤 인물이며 북한이 무슨 목적으로 포로된 딘 소장을 버체트를 통해 미국에 공개했는가?
바로 딘은 트루맨 대통령의 매부이다. 다른 말로 트루맨 대통령의 누이 남편이 바로 윌리엄 딘이다. 그러기에 딘은 자기의 직속상관인 워커도 우습게 여긴 것이다.
지금껏 죽은 줄 알았던 자기 남편이 북한에 포로되어 포로생활을 한다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본 딘의 아내는 화가 나서 미 국회에 나타났다. 그녀는 국회의원들을 삿대질하며 자기 남편을 살려 내지 못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소리 쳐 온 국회를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딘의 생사여부가 미국의 체면, 트루맨의 체면과 연관되므로 차라리 죽었다면 모르겠는데 살아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으니 트루맨과 미국회는 그야말로 호미난방이 되었다. 미국 역사상 장성급으로서 적국에 포로된 것은 딘이 유일하다. 급해 맞은 트루맨과 미 국회가 정전담판 유엔군측 대표에게 포로송환문제를 북한의 요구대로 들어주라고 강압하어 정전담판 유엔군측 대표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북한은 정전담판에서 가장 난제였던 포로송환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 딘 소장 한명을 카드로 하어 수 만명의 자기측 포로들을 구출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차마 딘 소장과 관련한 이 모든 사실들을 공개할 수 없었으므로 지금껏 숨겨왔다. 그러나 북한에는 지금도 '딘의 포로생활'이라는 다큐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왜 이 다큐를 공개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딘을 포로한 과정은 믿기지 않는 하나의 소설이다.
그러나 여기에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작전이 추진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의 목적, 즉 딘을 포로하기 위해 무려 20여 개 이상의 북한군 특공대가 대전에 침투한 것이다. 물론 지금의 특공대와 대비가 안 되므로 딘 포로작전은 실패하지만 이러한 특공대들의 검질진 추격에 혼쭐이 난 딘은 혼자서 산속을 거의 한 달가량 헤매다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민가에 내려왔다가 포로 된다.
원래 딘은 1950년 10월에 공개되어 송환될 수도 있었다. 신천에서 북한의 황해도위원장 김용진이 미군에 포로되었을 때 북한 지도부가 김용진을 구출하기 위해 구월산 주민유격대를 이용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구월산 주민유격대는 내부 알륵이 심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전투를 실제상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딘 소장과 김용진 위원장을 교환할 기획을 추진하였으나 미군이 김용진을 너무 빨리 사형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전쟁이 끝난 후 포로교환할 때 북한에서는 딘 소장에게는 그의 요구대로 포로번호 24번을 주었다.
호주는 영국과 함께 미국에 추종하어 한국전쟁에 가담한 후 무고한 한국 사람들을 수많이 학살한 주요 장본인인데 저들의 만고죄악이 다름 아닌 제나라 언론인에 의해 폭로되니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과 서방, 호주는 버체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든 것이다. 그 이후의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졌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 누가 인권옹호자이고 누가 인권범죄자인가를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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