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오전 11시 ‘통일애국열사 박선애, 박순애, 윤희보 선생’ 추도식이 진행되었다.
박선애, 박순애 선생은 자매사이이며, 박선애, 윤희보 선생은 부부사이이다.
박선애, 박순애 선생은 해방 후 오빠의 영향으로 미국을 반대하는 운동,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여성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반미, 통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한평생 반미,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한국전쟁 시기 체포된 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겪었지만, 언제나 통일운동, 그리고 청년학생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특히 박선애, 박순애 선생은 언제나 ‘학습’과 ‘조직생활’을 강조하면서 늘 학습을 가까이 하는 분들이었다.
윤희보 선생은 빈농가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시기부터 노동운동, 사회운동에 눈을 뜬 뒤에 월북한 뒤에 한국전쟁시기 공작원으로 남쪽으로 왔다가 체포되었다. 평생 25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언제나 신념을 잃지 않았으며, 2000년 9월 2일 62명의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북으로 송환된 뒤 조국통일상을 함께 수여받았다.
특히 윤희보 선생은 한총련 학생운동에 대한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한총련 할아버지’로 유명하다. 북으로 송환된 뒤에도 남쪽의 가족들, 통일인들 그리고 한총련 학생들을 가장 많이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윤희보 선생은 2015년 3월 18일, 9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현재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어 있다.
추도식에서 윤한탁 민권연대 명예의장은 추도사를 통해 “48년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중요한 구호 중에 ‘미국군 물러가라, 남북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구호가 있었다. 얼마 전 트럼프가 유엔에서 북에 대한 완전파괴 발언을 했다. 우리의 민족을 ‘완전파괴’하겠다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하고 반미투쟁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지금 현 시기 미군철수, 미국을 몰아내는 투쟁이 중요하다. 세 분의 선생이 치열하게 투쟁했던 그 모습을 그대로 우리가 이어가 반미투쟁, 조국통일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하며 세 분의 선생이 한평생 바쳤던 반미자주 통일투쟁을 강조했다.
이어 권오혁 국민주권연대 공동대표는 추도사를 통해 세 분의 선생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눈은 현실을 보고 신념은 미래를 본다’라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핵심이며 우리가 새겨야 할 내용이다. 선생님들의 ‘미래를 보는 신념’이 지금 한반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계질서가 결국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신심을 주셨다. 신심 드높이 앞으로 나가자. 선생님들과의 인연은 윤희보 선생님과 98년, 한총련 학생들 농성부터 시작되었다. 선생님들은 언제나 정세, 운동현황을 말씀하시면서 후배들에게 힘을 주셨다. 언제나 청년학생들을 앞세워주시고, 아껴주시고, 지원을 해주셨던 세 분의 선생님들이시다. 학생들을 언제나 귀하게 여기고, 선봉대로 내세워주셨다. 학생들의 결정을 늘 동지적으로 지지해주셨다. 선생님들의 그 뜻을 이제 우리 세대가 이어서 청년학생들을 적극 지지해주고, 믿고, 내세워주며, 뒷받침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정종성 한국청년연대 상임대표는 마지막으로 결의발언을 했다.
“선생님들하면 언제나 한총련을 믿고 지지해주셨던 모습, 그리고 선생님들은 학습과 건강에 대해 강조하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특히 선생님들은 한총련 세대가 결혼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운동의 대가 이어진다며 기뻐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습에서 선생님들의 길을 우리 선배가, 선배들의 길을 우리가 잇고, 그리고 아이들이 이어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지금의 정세에서 머리가 아닌 몸을 내대여야 하는 시기, 촛불혁명이 국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졌던 것처럼 북미대결전, 조국통일도 우리의 실천과 노력, 헌신이 있어야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청년세대가 현 시기 반미투쟁의 선봉대로, 떨쳐 일어날 수 있도록 나의 몫을 다하겠다.”며 결심을 다졌다.
참석자들은 박선애, 박순애, 윤희보 선생의 뜻을 이어 “미국을 몰아내자!”, “조국통일 완수하자!”의 구호를 외치며 추도식을 마쳤다.
------------------------------------------------------------------- <故 박선애 선생 약력> 1927년 전북 임실출생 1945년 해방 이후 임실에서 여성단체 활동 1951년 1월 체포되어 광주포로수용소에서 10개월 수용 11월 사형구형 징역, 15년 선고 후 대구교도소 수감. 1952년 광주교도소로 이감. 1955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1960년 대전교도소로 이감. 1965년 5월, 만기출소. 1968년 평생동지 윤희보 선생과 결혼 1975년 사회안전범으로 재수감. 1979년 출소 1990년 초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활동 1998~2005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서울시연합 부의장 2006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서울시연합 고문 2007년 전국여성연대 고문 2010년 9월 25일 심장마비로 별세.
<故 박순애 선생 약력> 1930년 전북 임실군 청운면 출생 1945년 해방 후 박선애 선생과 함께 여성단체 활동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전북지역 빨치산 활동 1952년 체포, 포로수용소 수용 후 고문으로 인한 병보석 석방 1965년 평생동지 고재성님과 결혼 - 이후 언니 박선애 선생, 비전향장기수 윤희보 선생 사회안전법 구속 후 뒷바라지 1989년 윤희보 선생 출소 후 통일운동 및 후대교양 사업에 전념 - 고문 후유증으로 장기간 투병생활 중에 2010년 9월 언니 박선애 선생 별세 후 병세 악화 2012년 12월 12일 오전 11시 별세
<故 윤희보 선생 약력> 1917년 10월 10일 경기도 광주군 빈농가정에서 출생 - 어린 나이부터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 갔으며, 영등포지역에서 노동. 미군정기에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월북. 1952년 공작원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활동하다 체포. 1962년 10년 수감생활 후 출소 1968년 평생동지 박선애 선생 선생과 결혼 1974년 사회안전법에 의해 다시 구속 1989년 출소 - 출소 후에 통일운동과 한총련 학생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활동을 펼침. 2000년 9월 2일 62명의 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 함께 북으로 송환. - 송환되면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각 계층 민중들과 마지막까지 생사고락을 하지 못한 것을 무척이나 아쉽다.”, “현실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미래는 눈으로 볼 수 없다. 미래는 신념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활동함. 2000년 9월 4일, 조국통일상 수여 2015년 3월 18일 별세. -현재 애국열사릉에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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