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미술인들의 단체인 <베란다항해>에서 활동하는 신혜원 작가가 우리 사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청년활동가를 만나 매월 1회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신혜원 작가는 젊은 활동가와 생활과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활동가에 대한 느낌을 그림으로 그려 인터뷰할 때의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주시보는 다양한 단체에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자기 역할을 소중히 하는 젊은 활동가들을 응원합니다. (편집자 주) ------------------------------------------------
“그대들이 있기에 제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신혜원(이하 원) : 자기소개해 주세요. 이혜진(이하 진) : '우리나라'에서 노래하는 이혜진입니다.
원 : '우리나라'에 대해 소개해 주시겠어요. 진 : '우리나라'는 99년에 결성되어 올해로 20년을 맞는 창작 노래패고, 그동안에 통일의 노래, 자주의 노래를 불러왔네요. 혼성 5인조 보컬 그룹에 대표 1명이 있어요. 그리고 이번 7월 20일에 성수 아트홀에서 '우리나라' 20주년 콘서트가 있어요. 많이 와 주세요.(웃음)
원 : '우리나라'로 20년간 노래를 해 오신 건데요. 그전에는 어떻게 사셨는지요. 노래를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진 : 그전에는 전문적으로 노래를 한 건 아니고, 대학에서 노래패를 했어요. 노래했다기보다 학생운동을 한 거죠. 과 노래패였는데, 민중가요를 부르고 역사 세미나를 하면서 세상을 알게 됐어요. 원래는 재수하려 했어요. 그런데 여름에 농활에 갔는데 농촌봉사활동인 줄 알고 갔다가 농민분들 얘기를 들으면서 친해지고, 현실을 배우고, 상경 투쟁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의 모순을 느끼면서 재수할 때가 아니구나 생각하고 재수를 안 하겠다고 집에 선포했죠. 모든 공책에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 써놓고. 2학기 때부터 불타는 학창 생활을 시작했어요. 2학년 때는 새내기를 다 데리고 데모에 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노래를 가르치고 세미나하고 집회에 많이 데려가고 그랬네요. 3학년 때 외대 노래창작단을 들어갔는데요, 3학년이 되어서도 데모하려는 결심해야 들어가는 곳이거든요. 노래 운동에 대한 지향보다는 운동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래를 붙잡고 있었죠. 노래는 목적이라기보다 매개로써 운동과 만나게 해 준 친구라고 할 수 있어요.
원 :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노래하고 계세요? 진 : '우리나라'를 제안받았을 때도 노래 운동에 대한 지향은 없었어요. 다만 할 수 있는 게 노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죠. 노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죠. 20주년 콘서트 얘기하다 생각난 건데요. 선희 언니 얘기로는 백자형이 '우리나라'에 혜진이를 데려왔을 때 처음 보는 악보를 들이밀었는데 그걸 불렀다고, 그래서 얘를 뽑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노래를 잘해야 뽑는 거지 왜 악보 본다고 뽑는지, 그래서 선희 언니를 원망했는데. 음악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온다는 게 반가웠다더라고요.
원 : 20년의 세월이 녹록치 않은 데요. 그것도 '우리나라'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오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예전에도 몇 번 여쭤본 적이 있는데 그냥 술 많이 마셔서라고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진 : 우리가 20주년 콘서트 전에 모꼬지 가서 얘기했어야 했는데 조직적 입장이 없네요. 우리가 여기까지 온 힘에 대해 긍지 높게 평가하면 더 기쁜 마음으로 콘서트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고민이네요. 초반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99년 12월에 입단했는데. 2000년이 밝자 곧 6.15공동선언이 발표됐어요. 통일을 지향하는 노래패로서는 행운이었죠.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지금도 만나면 온 국민이 흥분하는데, 당시의 충격은 정말 여파가 컸죠. 6.15의 햇빛이 우리를 골고루 쑥쑥 자라게 했어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신명 나게 활동을 했죠. 교류들이 꽤 오래 이어졌잖아요. 금강산 공연도 많이 가고 재일 동포 분들도 많이 만나고. 활동의 힘이 떨어질 새가 없었어요. 가는 곳마다 감동받고 힘 받고 그런 자리들이 영원할 것 같고. 2002, 2003년이 '우리나라'가 제일 활동이 왕성했던 것 같아요. 현장 속에서 힘을 많이 얻었죠. 각자 힘들 때도 있었는데 기다려주고 서로 끌어주고 그러면서 왔어요. 그것마저 안 되던 암울한 시기에는 각자 노래의 힘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솔로 음반들을 내면서 노래와 노래 활동으로 힘을 냈죠. '우리나라'를 계속 지키고자 했던 건 선배들의 자주민주통일에 대한 헌신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해체될 만큼의 위기 상황도 있었지만, 우리의 활동만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었거든요. 많은 사람, 재일 동포, 북녘 동포들 만나면서 했던 말들이 족쇄가 됐어요. “통일의 그 날까지 노래할게요.”라고 말하고 다녔으니 자꾸 환기됐던 것 같아요.
2014년부터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하면서 정규음반은 못 내도 미니앨범 작업이라도 해 보자, 5곡 이상이 되면 음반을 내고 활동하자고 이야기했어요. 그때 <난쟁이들의 노래>를 내면서 다시 활동력을 높이기 시작했죠. 새로운 노래들이 반향을 얻으면서 다시 전처럼은 아니지만 활동력을 높였죠, 민들레(민들레는 주권연대 소속 예술인들의 모임) 활동력이 높아지면서 계속 자극을 받는 것도 많아요. 정세의 요구에 맞는 노래들을 하면서 정세의 덕을 보고 있는 거죠. 대학생 동지들의 투쟁의 덕이기도 해요. 예술과 실천 활동을 잘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요즘입니다.
원 : 요즘은 후배들을 많이 만나면서 종횡무진 활약을 하시잖아요. 어떤 마음으로 하게 되었어요? 진 : '우리나라'가 활동력이 떨어졌을 때 저도 느슨해진 것 같아요. 그래도 백자형이나 광석형이 열심히 하셔서 끈은 있었던 것이고. 그런 모습에서 자극도 받고, 행운인지 다른 연결고리들도 주어졌던 것 같고요. 민들레 전도사들이 많았어요. 함께 하면서는 민들레라는 조직의 따뜻한 품을 맛봤던 것 같아요.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미래'나 ‘다큐창작소’, 대학생동지들과의 만남이 좋고 그 친구들에게서 자극도 많이 받았고요. 내가 뭘 잊고 살았지 생각도 하고. 시대의 앞장에서 활동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진심으로 기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일 큰 자극과 감명을 받았어요.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나이를 잊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열정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든 것 같아요. 앞장에서 예술과 실천 활동을 하는 젊은 학생들이나 예술가들이 나이는 어리지만 선배 같아요. 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쌓인 사람에 대한 연륜들이 제게도 또 다른 품 같아요. 저를 챙겨주는 민들레의 후배 선배님들 덕분에 정신 차리는 중입니다. 운동을 진지함, 엄숙함 뿐 아니라 기쁨과 희망, 신심으로 하는 것이라는 걸 보고 있어요.
원 : 지금 ‘이창기 정신계승’ 음원 녹음사업을 책임지고 계신데요. 제안 받았을 때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진 : 크게 부담스럽진 않았던 게 창작곡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어서 차근차근 순서대로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작품들이 학생 동지들에게도, '우리나라'에도 있어서 찬찬히 발표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학생들 문예역량이 많이 컸어요. 스스로 창작하고 작업하고, 수정하고 얘기하는 데에서도 스스럼이 없어요. 처음에 <통일이 오면> 창작 과정에서 대학생 후배에게 많이 배웠어요. 의견에 대해서 잘 받고 자세가 열려있어요. 처음 들었을 때는 걱정이 많았는데 마지막에는 같은 사람이 한 게 맞냐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하반기에도 줄줄이 창작곡들이 나올 것 같아서 10월 정도까지 계속 음원 발표하게 될 것 같아요
원 : 학생들이 다양하게 많이 작업하는 것 같아요. 진 : 대학생노래패연합(이하 대노련)이 조직되고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진연)이 활발히 활동하는 것이 힘인 것 같아요. 대학생 노래운동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했어요. 8월 투쟁을 준비하면서 대학생들이 통선대 노래를 만들자고 하면 수십 곡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있을 정도예요. ‘내일’, ‘씽’, '늘해랑' 등등 창작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요. 그것이 무시 못 할 힘이죠.
원 : 음원 사업을 스스로는 어떤 마음으로 하고 계신지요? 진 : '우리나라'를 묶어준 게 창기형이라고 하시던데요. 처음에 사무실 얻을 때 경제적 도움도 주시고요. 그런 공로가 있으신 분이고, 초창기에 창작할 때 조언도 구하고, 일본도 같이 가고 그랬어요. 활동을 같이한 세월이 긴데 형이 살아계실 때 더 열심히 못 했던 게 마음에 걸려요. 병원에 계실 때 '우리나라'가 같이 병문안 가자고 정한 날이 있는데 그 하루 전날 돌아가셔서 못 뵈었죠. 대학생들을 사랑하시고 아프신 와중에도 결심하고 활동을 뜨겁게 하셨는데 그럴 때 같이 못 한 부채감이 커요. 제안이 왔을 때 창기형 정신을 따르는 길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창작 과정도 어쩔 수 없이 나를 돌아보는 과정이 됐고요. 학생들이나 곡을 만든 사람들을 만나보면 자기를 비춰보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후배가 ‘나 바보처럼 살려오’를 창작할 때 자신이 힘들어하던때 고민하던 것과 연결 돼 있는 느낌이었다고 해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냐 아니냐 속에서 갈등할 때 곡을 쓴 시가 ‘나 바보처럼 살려오’라고, 고민에 답이 되는 것 같은 시였다고 해요. 활동하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고민이 형의 시 속에 있다고 느끼게 돼요. 그게 창기형 시가 가진 힘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고요. 한 곡 한 곡 만나는 것도 형을 만나는 과정이고 빚을 갚아나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학생동지들을 진짜 사랑하셨는데 형 시에 곡을 붙이는 거나 형을 생각하며 쓴 곡들을 보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요. 일정 등 어려움은 있지만 1주기 때까지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곡들을 다 모아서 들려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원 : 가수, 예술가 이혜진에게 질문 드릴께요. 어떤 예술가가 되고 싶나요? 진 :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원 : 조금 바꿔보자면 어떤 곡을 쓰고 싶나요? 어떤 노래를 하고 싶어요? 진 : 노래를 계속할지 모르겠어요. 가수로서 노래하는 게 참 어려웠던 것 같아요. 매일 한계에 직면하는 느낌이에요. 나의 음악적 요구는 높아지는데 부응이 안 되는 괴로움 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그걸 연습으로 극복해보려 애를 쓰고 그러면서 매일 부족한 나를 만나고. 곡은 뭔가에 감동했을 때, 또는 힘들었을 때 쓴 거지 일상적으로 한 건 아니었어요. 곡을 쓰면서는 노래는 삶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학교는 우리 고향이다’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동포들이 힘을 얻었다는 얘기를 듣고 곡을 쓴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어요. 민들레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부터는 정세의 요구에 맞는 곡들을 써야 한다, 그게 나의 역할이고, 노래가 나와 우리의 무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또 부족함을 느끼고 과녁이 명확한지 나 자신을 평가하고. 하려는 얘기가 정확한지, 제때 내는 것인지 매일 한계를 느끼고 있어요. 예술가로 산다는 건 힘든 일이에요. 한계와 마주하고 그것을 한계로 만들지 않기 위해 매일 노력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어떤 예술가가 되겠다 보다 '우리나라'로 활동한 지 20년이 됐다는 데 나름의 무게감을 두고 싶어요. 20년에 맞는 모습인가 생각하면 긍지보다는 부족함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걸요. 부족함을 채우는 방향으로 연습이든 창작이든 하게 될 것 같아요.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요. 늘 그게 고민인데 요구에 부응하는 정확한 곡을 쓰면서도 사랑받는 곡을 쓰고 싶은 마음. 그게 지향이겠죠. 그런 곡을 쓰고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원 : 그런 데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되는 노래가 있나요? 진 : ‘우리’라는 노래가 꿈을 이룬 노래인데요. 박근혜 정권 하에서 아픈 일들도 많았고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 건데, 탄핵 현장에서도 불리면서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죠. 내용은 더 정확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우리나라' 노래 중에서는 ‘다시 광화문에서’같이 많이 불리고 사랑받은 노래가 있고요. 윤민석 선배와 송앤라이프에서 했던 많은 곡도 그런 것 같아요. ‘헌법 제1조’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같은 곡들이요.
원 : 가수로 활동하면서 인상에 남은 공연이 있을까요? 진 : 의례적으로는 금강산 공연이나 동포들을 만났을 때라고 해요. 가장 기억에 남은 건 무대 위에서 어이없이 울었을 때인데요. 세월호 2주기 때 일본에서 <삶뜻소리>라는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광화문 광장에 마음이 많이 가 있었고,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사진을 보고 무대에 올라갔는데요, ‘다시 광화문에서’를 불렀거든요.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부분을 부르는데 눈물이 터진 거예요. 공연 배경이 촛불집회 영상이었거든요.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 아니고 100% 일본인들 대상 공연이라 세월호에 가슴 아파 흘리는 내 눈물의 의미를 더 몰랐을 거예요. 그런데 너무 울었어요. 해결된 것이 없이 2주기를 맞는 것이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고 광화문에 못가는 부채 의식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황당했던 공연이었죠. 정말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울었어요. 있을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복인 것 같아요.
원 : 인터뷰를 처음 요청했을 때 고사하면서 “난 좀 더 열심히 묵묵히 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얘기하셨던 이유가 있나요? 진 : 너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24시간을 바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는 일도 없이 방황의 세월을 벗고 이제야 조금씩 열심히 살려고 하는 새내기 상태인 날 인터뷰할 게 뭐가 있을까 했어요. 그리고 원래 인터뷰 공포가 있어요. 주목받는 게 싫어요. 적성에 안 맞는 직업을 선택한 것 같아요. 무대에 서는 것도 힘들었는데 인터뷰나 방송은 더 힘들어요. 아닌척 하느라 더 오버하게 되고.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안 시켰으면 좋겠어요. 제일 싫어하는 게 장기자랑이에요. 남 앞에 나설 수밖에 없고 그런 데서 오는 괴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랍니다. 매일 극복해야 하니 힘들어요. 실제로 한 일도 없기도 하고요. 그래도 앞으로 이 인터뷰가 잘 나갈 수 있도록 초석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응했어요.
원 : 함께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까요? 진 : 민들레를 귀한 꽃처럼 물을 주고 햇살을 줘서 키운 선배들에게 고맙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자기를 버리고 조직을 앞에 두면서 활동력을 높여가고 있는 동지들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고, 선배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대학생 민들레에도 고마워요. 올해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함께 좋은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작년에 예술과 실천을 결합해서 많은 성과를 냈잖아요. 협동작업의 폭발력을 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서로의 힘을 더 믿고 행복하고 즐거운 협동을 해 보고 싶어요. 그대들이 있기에 제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 * * * * * *
말을 꺼낼 때마다 ‘배운다’ ‘조직’ ‘고맙다’ 하는 이혜진 가수. 해놓은 일이 없어 인터뷰할 수 없다고 여러 번 고사해서 인터뷰하기 참 힘들었는데요, 막상 만나니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뚝뚝 떨어지는 얘기를 많이 해 주셨어요.
사람들을 좋아하고 묵묵히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으로의 예술 활동에 더 큰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모범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단체 인물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