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 빨치산의 증언] 1. 온 가족이 항일운동에 나서다

편집국 | 기사입력 2020/05/19 [10:40]

[한 여성 빨치산의 증언] 1. 온 가족이 항일운동에 나서다

편집국 | 입력 : 2020/05/19 [10:40]

<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5월호를 발간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여성 비전향장기수 박선애 열사와 윤희보 북송 비전향 장기수 부부

 

근현대사 구술

한 여성 빨치산의 증언

 

유일한 여성 비전향장기수였던 박선애 선생의 생전 구술 내용을 정리하여 몇 차례에 걸쳐 공개한다. 박선애 선생은 1927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해방 후 여성단체 활동을 하다 전쟁 시기 빨치산이 되어 1951년 1월 체포되었다. 광주포로수용소에서 10개월을 보낸 후 11월에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65년 만기출소를 하였지만 1975년 다시 사회안전법에 따라 재수감되었다. 1979년 출소하여 통일운동과 여성운동에 전념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2010년 9월 25일 별세하였다. 

 

온 가족이 항일운동에 나서다

 

독립운동가이시며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아버지: 일제 때 고등계 형사가 맨 날 들락날락하던 집안

 

내가 빨치산이 된 데는 집안 내력이 크게 작용했어요. 고향은 전라북도 임실인데 1927년에 내가 태어났어요. 아버지께서는 일제 때 삼일운동도 하시고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집은 가난했지만, 고학으로 일본 도쿄에 가셔서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가 1919년 당시 학생 운동 때 우리 군의 대표로 파견되셨어요. 그렇게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잡혀 들어가서 삼 년을 징역사셨어요. 우리 집은 그러니까 고등계 형사가 만날 찾아다니는 집안이었어요. 

 

그 후 감옥에서 나와서 우리 임실군에 학교를 세우셨어요. 신식 교육을 시켜서 사람들을 깨게 해야 한다고 보통학교를 세운 거였죠. 상투 튼 사람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간신히 그 사람들을 설득하셨대요. 그렇지만 나중에 일본 놈들이 내선일체(일본의 동화정책) 운운하면서 학교 일까지 간섭하고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는 너희하고는 같이 안 한다 하시고 학교에서 나와 버렸대요. 원래 한 번 한다 하면 밀고 가고 싫다 하면 딱 끊어버리고 그런 아주 완고한 성격이셨어요. 

 

그리고 또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 아버지께서 오시면 동네 사람들이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랬어요. 그렇게 어쩌다 한 번씩 집에 오시면 아버지께서는 우리한테 일본 놈은 침략자이고 우리 문화와 민족을 괄시하는 놈이다, 그놈들은 훌륭한 게 아니고 나쁜 놈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일본 놈은 참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어요. 여하튼 아버지께서는 바깥으로 다니셨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꾸려 가는 건 어머니 몫이었죠.

 

양잠학교를 운영하면서 다른 여성들을 깨우친 온화한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결혼을 하고서도 양잠학교에 다니셨대요. 할머니가 펄펄 뛰셨지만, 아버지께서 우기셔서 우리 군이 아니라 남원에 있는 양잠학교를 일 년간 다니셨어요. 

 

우리 친가는 가난했는데 우리 외가는 부자여서 외갓집에서 어머니께 큰 뽕나무밭을 줬대요.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양잠 학교를 세워서 학생을 가르치고 누에를 길러서 살림을 꾸려 간 거죠. 우리 집은 모든 걸 어머니께서 다 꾸려 가셨어요. 아버지께서는 거의 간섭도 안 하셨죠. 작은 집이며 고모네 집안을 화합시키는 일도 어머니께서 다 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늘 어디로 다니셨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그 뒷바라지까지 다 하셔야 했어요. 쌀도 퍼 내줘야 하고 옷도 꺼내주고, 그러다 보니 어머니께서 무척 힘드셨죠. 

 

우린 칠남매인데 내가 넷째예요. 아버지께서 징역 사실 때 태어난 오빠가 있고 언니 둘 있었고 아래로 동생이 셋 있었어요. 그러니까 잘 살 수는 없었죠. 어머니께서는 늘 생활이 곤란했어요. 친정에서 좀 대준다지만 그게 간단한 일도 아니고 여하튼 어머니께서는 항상 힘드셨어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께서는 성품이 아주 너그러운 분이셨어요.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글도 가르쳐주고 처녀들한테는 수예도 가르치고 그랬었어요.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들을 깨우친 거죠. 일본 놈이 이렇고 일본 놈 세상에 우리 여자들이 깨여야 된다, 삼일운동 때 여자들도 많이 죽었다, 뭐 그런 얘기를 하신 거죠. 

 

그러다 내가 열한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아이를 낳고 몸이 허약해져서 보름 만에 돌아가신 거예요. 애도 결국 죽고. 그러니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죠. 내 밑에 동생이 셋 있었어요. 지금 나하고 같이 살고 있는 동생(박순애 선생)이 나보다 두 살 아래고(3살 차이) 그 밑에 다섯 살짜리 동생하고 세 살짜리 남동생이 하나 있었어. 그런 상황에서 재혼을 하라고 해도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재혼을 안 한다고 하셨어요. 어디서 우리 어머니 같은 부인을 얻겠느냐면서 안 하신 거죠. 그렇게 어머니 없이 사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나는 다니던 소학교를 그만두었어요.

 

항일투쟁의 지하 독서 써클, 마당극 연출, 예술가 오빠

 

아버지께서 감옥에서 이름을 지어 주셨던 우리 오빠는 지하 독서 서클을 조직하기도 했어요. 우리 집은 다른 것은 몰라도 다들 도서관이라고 할 정도로 책은 많았어요. 한마디로 책 부잣집이었죠. 오빠는 그때 중학교를 다녔어요. 청년들이 집에 꽉 모여서 밤을 새면서 토론을 하고 그랬어요. 그러면 나는 그 청년들이 토론하는 걸 들으면서 같이 밤을 새고 했어요. 

 

오빠는 문학에 소질이 있었어요. 지방 신문 기자도 하고 시도 쓰고 또 음악도 좋아했어요. 그렇게 예술을 좋아하니까 나중에는 사진사를 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집안에 늘 오빠 친구들이 모여들고 하는 상황이었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우리가 학교까지 그만두니까 오빠는 우리를 졸업이나 시켜야지 안 되겠다 해서 우리를 월반을 시켜서 5학년에 들어가서 졸업을 하도록 해줬어요. 한 이년을 쉬었다가 그렇게 다닌 건데,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정상적인 교육은 못 받은 셈이에요.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어요. 해방이 되면서 우리 집은 굴곡이 많았어요. 내가 열아홉 살 때 해방이 되었는데. 해방됐다고 좋다고 야단인데 미국 놈이 딱 들어오니까는 이젠 더 큰 적이 나타난 거예요. 일본이 물러나고 해방이 되니까 청년들이 우리 집에 많이 왔어요. 오빠 친구들이 와서 우리 집은 연극장이 되었어요. 해방됐다고 순회공연도 하고 그랬죠. 그러니 우리 집에는 늘 사람들로 와글와글했어요. 내가 지금도 이 길을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집안에서 배운 덕이에요. 

 

아버지께서는 해방이 되고 나서 아들이 너무 앞장서는 바람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니까 서서히 통일을 해야지 너무 과격하게 하지 말라고 타일렀어요. 왜 그랬냐면 일본 놈들이 재산을 어디다 팔고 가려고 하니까 오빠가 청년들하고 그건 우리나라 재산이니까 못 가지고 가게 했거든요. 그런 걸 보고 아버지께서 오빠한테 너무 과격하게 하지 말고 서서히 일을 해야 한다고 한 거예요. 우리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그저 네, 네 했는데 오빠는 당당하게 아버지한테 이야기하더라고요. 

 

“아버지, 우리는 지금 미제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 대에 제대로 못 싸웠기 때문에 우리 대에 또 싸우지 않습니까? 아버지 대에 저쪽은 단독으로 만주벌판에서 싸우다가 승리하고 들어왔는데 남쪽에도 그놈들하고 싸우는 무장투쟁이 있었으면 우리가 지금 미국 놈을 한꺼번에 몰아낼 텐데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버님들이 산간벽지나 다니시고 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까 우리 대에는 절대로 아들 대에 안 물려주고 우리 대에 통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침략자를 물리쳐야 할 그런 때에 있으니까 아버지께서도 더 이상 말리지 마십시오.” 

 

우리 오빠가 시원하게 그렇게 말하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몰라요. 아, 우리 오빠 말이 맞다. 우리가 그 전에 싸우지 않은 것 때문에 또 싸워야 하니까 우리가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가슴에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외세하고 타협해서는 안 되고 외세는 물리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 오빠가 가르쳐 준 거예요. 지금까지도 난 오빠의 그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있어요. 

 

오빠는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니 역할까지 해줬어. 머리도 예쁘게 단발로 깎아 주고 손톱도 다 깎아줬죠. 학교에 가려고 하면 연필도 다 깎아주고 옛날얘기도 오손도손 해주고 그랬어요. 아버지는 워낙 어려워서 어떻게 가까이할 수가 없는데 오빠는 그렇게 다정다감했어요. 오빠가 가는 길이라면 뭐든 다 따라가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그렇게 오빠가 좋았어요. 그래서 뭐 큰일은 아니지만 오빠가 “어디 연락 갔다 오너라”하면 시키는 대로 다녀오곤 했어요. 그리고 그때는 한글도 모르는 여자들이 많아서 한글도 가르쳐주고 이야기도 해주고 그랬어요.

 

정신적 지주인 오빠의 무참한 죽음

 

그러다가 오빠가 48년도에 그것들한테 학살당했어. 여순항쟁 때였죠. 오빠가 체포됐는데, 대개 잡혀가면 그냥 얼마 있다가 또 나오고 그런 때였어요. 예를 들면 청년들이 그냥 조그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다가 또 풀려 나오기도 했는데, 아무튼 굉장히 험악한 때였죠. 당시 난 열아홉 살이었는데 전주에서 오빠가 시키는 대로 뭘 연락하고 전달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남동생이 왔어요. 그 막냇동생은 그때 중학교 2학년인가 그랬어요. 그런데 동생이 하는 말이 형이 잡혀갔다는 거였어요. 아이구 그럼 어쩌냐? 변호사를 사야 되는데... 그 일은 일단 아버지께서 하시겠지만 변호사를 사고 하려면 한 일주일은 있어야 제대로 되는데 잡혀간 지 사흘 만에 아버지 말씀이 오빠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걔들이 오빠를 어디론가 데려가서는 경찰서에서 혁띠하고 구두하고 수첩만 가져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가 차죠, 뭐. 

 

그때 오빠가 돌아가셨다고 그러니까 눈물도 안 나와요. 그냥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내가 존경하고 모든 일의 중심으로 삼은 오빠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저 기가 막히고... 난 두 시간 동안 목석이 되어 버렸어요. 그렇게 넋을 놓고 앉았다가 두 시간이 지나니까 그때부터 이제 막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통곡을 하기 시작하니까 도대체 그걸 억제할 수가 없었어요. 하염없이 울고 울고 또 울어도 그 심장이 우니까 어떤 사람이 나보고 울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다섯 시간을 울었어요. 그냥 울고 또 울고... 오빠가 돌아가시다니, 아니 오빠가 돌아가시다니. 누가 나보고 왜 우느냐고 할 사람도 없고 울지 말라고 말도 할 수 없고 그냥 그렇게 울었어요. 끝없이 끝없이 울었어요. 

 

그러다가 가만 생각하니까 아버지께서 그렇게 오빠 하나를 믿고 살았는데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동생보고 집으로 가자고 했죠. 전주에서 기차를 타고 임실까지 갔죠. 아버지께서는 의지가 강한 분이라 본래 눈물을 안 흘려요. 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법이 없었어요.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안 우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런 분이에요. 그런데 그때는 우시는 거예요. 너무 너무 서럽게. 해가 넘어가면 길거리 나가서 서 계셔요. 그러다 어느 청년이 오면 오빠가 오나 하고 기다리는 거예요.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거죠. 생전 울지도 않는 아버지가 다 우시는 판이니 나는 더 말할 것도 없죠. 그러니 우리 집안은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그날 밤이 지나고 나는 그냥 집에 있어서도 안 되고 또 할 일이 있고 하니까 나왔죠. 

 

웬 하얀 빨래? 알고 보니 줄줄이 널려있는 시체들

 

그러다가 50년이 되니까 모든 게 다 깨졌어요. 사람도 만나지 않고 그런 상황에 있는데 어느 날 통학을 하는 동생이 날 찾아왔어요. 한 열한 시쯤 되었나 봐요. 그런데 와서는 기차가 안 다닌다는 거였어요. 왜냐고 물으니까 전쟁이 났다는 것이었어요. 

 

“뭐, 전쟁이 나?” 

“전쟁이 나서 기차가 안 다녀.” 

 

그런 상황에서 우리 집은 정말 말할 수도 없죠. 전쟁이 났다니까 어떻게 해요. 그래서 나도 우리 집으로 갔는데 아버지께서 여기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국군들이 가다가 아무 집에나 들어와 가지고 두들겨 부수고 그래서 변장을 하느라 한복으로 갈아입고 가느라고 야단이 났어요. 그런데 막 폭격을 퍼붓고 하니까 한 오리쯤 떨어져 있는 작은 집으로 길을 나섰어요. 

 

가다가 보니까 경찰서 마당에 피가 가득해요. 얘들이 피난 안 간 사람들을 잡아다가 총을 쐐 댄 거야. 그냥 죽인 거예요. 그러니까 피가 그득한 거죠. 꼭 비 올 때처럼 마당이 피바다예요. 아이구. 그러니까 그 부모들이 시체를 안고 울고 그러는데 세상에 이 게 웬일인가 싶더라니까요. 

 

그리고 또 저만큼 가니까 사람들이 쫙 몰려 있는데 자기 반대하는 청년들 목을 탁 잘라 가지고 그걸 꼬챙이에 꽂아서 벽에다 걸어놨어요. 그 유월 더운데 경찰들이 다섯 개쯤 되는 모가지를 그렇게 걸어 놓으니, 내가 기가 차서 말예요, 이거 뭐 사람이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얼마나 무섭던지. 

 

그러다가는 해가 넘어가려고 하는데 산등성이를 가니까 언덕에 하얀 빨래가 보였어요. 그때는 여름이면 다 하얀 옷들을 입었어요. 그런데 하얀 옷들이 쫙 있는 거예요. 저 집은 왜 빨래를 안 걷어 갔나 하고 보니까 그게 사람들을 잡아다가 포승을 묶어서 줄줄이 쏘아 죽여서 죽 늘어놓은 거였어요. 그게 시체였던 거예요. 햐. 세상에 걔들 후퇴할 때 그렇게 했던 거예요. 그런 끔찍한 게 없었어요. 그런 걸 보니까 울음도 안 나오고 그냥 온몸이 이렇게 떨리기만 했어요. 

 

사람들은 피난 간다고 막 가는데 우리 아버지는 작은 집에서 하루 자고 우리 집으로 가보자 해서 갔더니 그것들이 사람 죽이고 변복을 하느라고 한복을 장롱에서 다 꺼내 가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조금 있으니까 폭격을 했어요. 그 때문에 집이 몇 채가 다 탔어. 우리 집도 다 탔죠. 그걸 보고 아버지께서 이러시데요. 

 

“우리 근심 걱정 다 타거라. 이 집이 무엇이냐? 이 근심 걱정 다 타거라, 새 세상 되어서 우리 모든 근심 다 날아가거라. 우리 재산 다 타거라.” 

 

그러다 이틀 만에 인민군대가 진격해 들어왔어요. 산으로 어떻게 해서 막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이 인민군대가 반갑다든가, 아니라든가 그런 것도 모르고 이게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더라고. 그때 막 우리가 빨리 미국과 싸워야 한다면서 사람들이 나서기에 나도 나섰어요. 생전 내가 어디 가서 강연한 일도 없고 군중 앞에서 말을 해본 적도 없는데 누구 한 사람이 나더러 오라는 거예요. 거기 향교가 하나 있었는데 거길 가라고 말예요. 그때는 등화관제라 깜깜하고 폭격도 있는데 거기 가서 인민군대가 빨리 전선에 나가서 미제를 몰아내야 되지 않느냐고,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누구한테서 연습을 받아본 적도 없고 교양을 받아본 적도 없고 아무 말도 할 줄 몰랐어요. 그런데 향교에 턱 가니까는 불도 안 켜고 촛불만 켜고 있는데 사람들 눈이 빤짝빤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올라가서 이야기를 하기는 했는데 뭐 내가 나가야 한다, 어쩌고 했지만 내가 강연하는 소리가 귀에 하나도 안 들려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한 거죠. 

 

“우리 모두 전선에 나가서 미제를 몰아내야 하니까 모두 힘을 모읍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막 박수를 치는 거예요. 그저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에요. 누가 나보고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친 사람도 없었는데 최초로 나가서 그런 얘기를 한 거죠. 그래서 이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막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여성들도 나갑시다, 남자들도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합시다, 이런 식으로 막 정신없이 살았어요. 무엇이 뭔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말예요.

 

산으로, 산으로... 동네가 되어 버린 산

 

그러다가 9.28이 되었죠. 미군이 다시 상륙했다 하고 인민군은 올라가고 이제 우리는 어쩌나? 우리도 가야 한다 했는데 그때 아버지하고 우리 동생 그리고 우리 올케가 있었어요. 우리 오빠가 결혼을 했으니까 조카도 있었죠. 그래서 거기로 가니까 사람들이 배낭을 하나씩 다 짊어지고 “우리는 가야 한다. 맞받아 빨치산을 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라면서 다 가는 거였어요. 그렇게 해서 인민군이 가니까 우리도 산으로 가야 하는데 길거리에 보니까 시체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어요. 교전을 하느라 여기저기 시체가 쌓였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 무서운 전쟁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돼요. 

 

여하튼 인민군대는 저리(북으로) 가고 우리는 산으로 가자고 했어요. 우리가 임실군을 지켜야 하니까 싸워야 한다고 간 거여. 그렇게 다들 배낭을 짊어지고 산으로, 산으로 갔어요. 빨치산이 뭔지도 모르고 다들 가서 빨치산을 조직해야 한다니까 같이 갔어요. 

 

나는 마을에 가서 군중 조직 사업을 해야 한다고 해서 군복을 안 입고 평복을 입고 조직사업을 했어요. 그래서 마을에 내려갔는데... 세상에! 우리 군에 면이 모두 13개 있는데 7개 면에 모두 불을 질러버렸더라고. 토벌단이 그런 거죠.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어요? 불을 다 질러버렸으니까 다 우리 따라온 거지. 그래서 산이 완전히 사람 세상이 돼버렸어요. 거기가 어디냐면 노령산맥인데 지금 해문산(순창 회문산으로 추정-편집자 주) 있는데 골짜기가 여긴지 거긴지 다 똑같은 곳이에요. 물이 좔좔 흐르고 그런 덴데 우리가 들어오니까 삽시간에 동네가 되어버렸어요. 

 

그때부터 인민군이 그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했어요. 그 일을 하려고 면에 들어가고 그래야 했는데 경찰이며 군인이 막 총질을 하고 그럴 때 내가 정찰대하고 같이 들어갔죠. 내가 살던 군이기 때문에 지리를 잘 알았으니까요. 어디로 가면 경찰서가 나오고 그런 걸 다 아니까 내가 같이 갔죠. 굴을 넘고 넘어서 해가 지고 조용할 때 정찰을 해 가지고 면을 들어가서 경찰서 있는 데를 돌아서 가만히 엎드리고 적의 동태를 보고 있는데 그때가 여름이었거든요. 

 

그런데 개구리가 내복으로 쏙 들어가 버렸어요. 하하하. 아이고, 몸속으로 이렇게 말예요. 그렇지만 소리를 지를 수가 있어야지.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세상에 개구리도 놀라서 이리저리 뿌락뿌락하는 거예요, 하하. 세상에 그게 최초로 정찰을 간 날이었는데 그 개구리를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잡았어요. 미끈미끈한데 이건 결사적이죠. 이놈의 개구리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는 없고 꾸무럭거려도 안 되고 앞에서 바스락해도 안 되고 그때 얼마나 아찔했는지 몰라요. 여하튼 그렇게 정찰을 해가지고 부대가 거길 치고 그런 일을 했었어요. 

 

그렇게 정찰을 하고 진격하면 먹는 것이며 남는 것, 그런 걸 가지고 산으로 돌아갔어요. 그때만 해도 사람들 인심이 좋아서 거저 주고 다 그랬어요. 그런 식으로 해서 빨치산 한 것을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어요. 

그렇게 내가 빨치산을 했는데 한 가지 내가 특별나게 군 것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도 여자는 식사당번을 해야 하는데 나는 안 했어요. 거기서도 무조건 식사는 여자가 하는 것이 책임이었거든요. 식사를 맡는 취사반은 거기서도 여자한테 다 의지하고 그랬는데 나는 절대로 무조건은 안 했어요. 

 

“그동안 남자들 당신도 일해야 하니까 당신도 그럼 이걸 하시오.” 

 

하고 딱 이렇게 내가 정해놨어요. 그래서 남자도 취사반에 꼭 들어갈 것, 우리 여성들은 또 이렇게 할 것, 그런 식으로 정해 놓았죠. 어쩌다 우리 여성들이 취사반에서 일을 안 하고 앉아서 얻어먹는 일도 있었죠. 하지만 대부분은 여자들이 밥을 해준단 말예요. 그러다 보면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자기가 해야 하는 다른 일은 못 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나보고 억세 빠졌다고 놀리기도 했어요. 하여간 나는 남자들 좀 못마땅하면 막 쏘아대고 잘못을 지적하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은 아무리 바빠도 자기가 해야 할 학습은 무조건 다 한 거예요. 눈이 막 오면 정찰도 나가야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리 바빠도 학습은 그날 양을 다 했어요. 그렇게 자기 과제를 학습해서 그걸 토론하고 또 실천하는 것, 그건 꼭 했죠. 

 

그리고 그 다음에 오락회도 열고 했어요. 다들 노래도 잘했는데 나는 노래는 전혀 못 해요. 아주 음치고 박자도 못 맞춰요. 그래도 그 사람들 하는데 틀렸든 말든 그냥 따라 하는 거죠. 그런 일은 모든 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희생을 해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한번은 어떤 열여덟 살 먹은 청년이 총을 들고 출전을 나간다고 했어요. 눈이 휘날리고 하는데 아주 열성적인 청년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아이구, 너 신난다, 너 잘한다” 했는데 나중에 그 청년은 전사해서 돌아왔어요. 이름도 몰라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 예쁘장한 청년이 누군지, 그 이름도 모르는 청년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고 또 죽고 했어요. 그 골짜기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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