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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2000년 정상회담 성사를 통해 본 문재인 정부의 과제

백남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0/06/13 [21:56]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2000년 정상회담 성사를 통해 본 문재인 정부의 과제

백남주 객원기자 | 입력 : 2020/06/13 [21:56]

 

우리민족 통일의 이정표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20년이 되었다.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은 순탄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먼저 미국이 대북정책을 조정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 정세가 조성되었다. 미국은 북한이 90년대 중반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식량난으로 붕괴할 것으로 생각하고 대북 고립 압살정책을 펴왔다. 

 

하지만 북한은 ‘고난의 행군’등을 통해 식량난을 극복해 갔고, 1998년 8월 31일에는 광명성 1호(인공위성, ICBM개발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탄)를 발사한다. 

 

‘빠르면 3일 안에 또는 3개월 안에, 늦어도 3년 안에 무너질 것’이라던 북한이 무너지지 않고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가능성을 보이자 미국은 정책변화를 꾀하게 된다. 

 

그 후 북미간 금창리 핵시설 등을 두고 기싸움을 벌이다, 대북조정관이었던 페리가 1999년 10월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인정하고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내용의 ‘페리보고서’를 발표한다. 북한은 붕괴하지 않으니 붕괴를 전제로 한 미국의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반도 정세변화 속에서 남북간 대화의 여지도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의 역할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6.15남북공동선언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미국의 승인압박에 굴하지 않은 김대중 대통령 

 

6.15남북공동선언은 1항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라며 ‘자주의 원칙’을 천명했으며, 2항에서는 통일방안의 합의내용까지 담고 있다. 

 

지금 사사건건 남북관계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미국이 이 같은 내용의 공동선언을 지지했을 리 만무하다.  

 

실제 미국은 남북간의 만남을 공식적으로는 ‘환영’한다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주한미대사를 지낸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는 “2000년 초반, 임동원 국정원장의 대북 비밀접촉이 강화됐다. ...(중략)... 나는 당시 워싱턴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이 어느 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깜짝 놀라게 되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는 경고였다”고 밝혔다(「역대 주한·주미 대사들이 밝히는 한미관계」, 『월간조선』 2009년 5월호.). 

 

자신들의 관리 범위를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김대중 정부를 압박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남북정상회담 의제에 대해서도 개입을 하고 나섰다. 

 

미국은 웬디 셔먼 국무부 자문관을 한국에 보내 ‘핵과 미사일 문제를 정상회담 의제에 넣으라’는 식의 압력을 행사한 데 이어, 한·미간 실무 협의에서는 ‘미국의 대북 중유 공급이나 에너지 정책과 연계되지 않는 단독 지원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미국의 압박 속에 당시 시중에서는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 그런대로 한국 경제가 버틸 수 있겠지만 만약 약간의 성과라도 있으면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한다(시사저널, “일본은 ‘기대’ 미국은 ‘뜨악’”, 2020.06.08.). 정상회담에 성과가 있어 남북관계가 진전이 되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이 같은 미국의 압박을 버텨냈다. 6.15공동선언을 보면 미국이 바라던 ‘핵과 미사일 문제’ 등은 반영되지 않았다. 전력지원 문제가 단독으로 담기진 않았지만 남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더욱 광범위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확고한 통일의지와 철학이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 

 

이 같이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의 압박을 버텨내며 6.15남북공동선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확고한 통일의지와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김정일 총비서와 정상회담을 할 것을 공식 제안한다”(1997년 12월 19일 대통령 당선 기자회견)고 밝히며 남북정상 간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김대중 정부는 강경일변도였던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을 뒤집고 ‘햇볕정책’을 제시했다. (물론 ‘햇볕정책’이 종국적으로는 북한의 체제변화를 이끌어낸다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지만) 북한을 향해 흡수통일을 시도하지 않고 화해와 협력을 추진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 후 김대중 정부는 민간 교류사업도 확대해 나갔다. 대표적으로 1998년 6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고, 그해 11월 금강산관광사업이 시작되었다. 

 

나아가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3월,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강연에서 남북이 직접 대화를 통해 경제협력을 논의하고 한반도 냉전종식과 평화 정착, 이산가족 문제해결 등을 위해 협력하자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남북정상회담의 의지와 필요성을 북한 측에 전달한 것이다. 

 

이런 지속적인 평화통일 행보는 김대중 대통령이 가진 통일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70년대부터 ▲북한을 평화 공존의 대상으로 인정한 뒤 ▲남북한의 평화적 교류를 확대하고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는 ‘3단계 통일론’이라는 통일방안을 세우고 통일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왔다.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자신만의 확고한 통일원칙과 방안이 있었기에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고(그것이 미국이라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김대중 대통령의 길을 따라야

 

이 같은 김대중 대통령의 행보는 현재 문재인 정부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미국의 승인’에 매달리다가는 남북관계의 어떠한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 미국의 눈치를 보며 미국이 용인할 만한 부분적인 사업들을 찾아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것 역시 한계는 너무나 명확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의 압박속에서도 6.15공동선언을 합의한 과정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때다.  

 

또한 문재인 정부에게 ‘평화비전’은 있지만 확고한 통일에 대한 의지와 원칙은 없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이나 정부 고위급인사들의 연설에서는 ‘평화’는 강조하지만 ‘통일’이란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우리 민족의 통일은 순탄한 과정이 아니다. 주변국들 역시 우리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남북이 확고한 원칙과 의지가 없으면 통일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없다.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문재인 정부는 6.15공동선언을 만들어내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준비하고 걸어온 길을 다시 한 번 새겨봐야 할 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6.15 남북공동선언의 역사적 의의 https://www.jajusibo.com/51010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이 가져온 변화 https://www.jajusibo.com/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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