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10월호를 발간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였고 비전향장기수로 총 27년의 감옥생활을 한 윤희보 선생의 구술을 연재한다. 윤희보 선생의 구술은 특히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어떤 활동을 하였고 박헌영, 이승엽 세력과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를 상세히 다루고 있어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윤희보 선생은 1917년 10월 10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2000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당시 북으로 건너갔으며 2015년 3월 사망,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중농의 둘째 아들
나는 1917년 10월 10일 경기도 광주 돌마, 지금 분당 근방 수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해 음력 8월 28일이 양력 10월 10일입니다. (실제 양력 1917년 10월 10일은 음력으로 8월 25일임) 호적에는 양력으로 올라가 있고 우리 집도 양력을 셌습니다. 그때야 음력을 세는 게 보통인데 우리 집도 음력을 세지만, 10월 10일이 노동당 창건기념일이라고 해서 집에서 그저 간단히 그런 의미에서 생일을 보냅니다.
이인모 선생 생일이 저랑 같아요. 나이도 같고. 그리고 내 동서도 같고. 셋이 꼭 같은데 동서는 먼저 죽었어요. 이인모 선생이 북송돼서 나온 문건을 보니까 생일이 10월 10일이 아니라 음력 8월인데 나보다 한 열흘 빨라요. 그런데 왜 10월 10일이라고 했느냐 하니까 ‘당 창건기념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기 위해 10월 10일로 했다’고 해요. 그래서 ‘생일마저 기념일로 했구나!’ 싶었죠. 나는 실제 10월 10일이에요.
같은 돌마 출신으로 집에서 한 10리 떨어진 곳에 한백열 선생이 살았어요. 한백열 선생은 나중에 감옥에서 만났고, 한백열 선생의 형은 한 반에서 같이 다녔어요. 지금 기억에 있는 건 우리 장정 몇이 백열이 형 옷을 벗긴 일이 있거요. “북두칠성이 등에 있다, 한 번 보자”라고 해서 본 일이 있어요.
본관은 파평 윤, 소전공파로 돌마에 윤씨 집이 몇 있었어요. 아버지 성함은 외자로 소나무 송을 씁니다. 우리 조상은 400년 간 벼슬한 사람이 없었어요. 임진왜란 때 경주 부윤(조선시대 지방관청인 부의 우두머리로, 종2품 문관의 외직이며 관찰사와 동격이다. 전라도의 전주부, 경상도의 경주부, 함경도의 영흥부(후에 감영을 함흥부로 옮기고 영흥대도호부로 강등), 평안도의 평양부, 의주부를 두었다.)을 한 분은 있어요. 족보에는 다 화려 하게 나왔지마는 내가 역사를 보니까 임진왜란 때 경주 방어를 못했어요. 방어를 못하고 피해서 어디로 갔다가 다시 파평 윤씨가 권력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경주 복성 공사를 하신 거예요. 그래서 경주 복성 공사에 대한 공만 족보에 나오거든요. 그런데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역사를 보니까 그때 그 경주 부윤이 할아버지 되는 분이고, 방어를 못하셔가지고 관군들하고 피해 있다가 다시 왜놈들이 끝나고, ‘복성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것만 나오지 피했단 얘기는 안 나와요.
그 후에는 한성 부윤. 그 후에는 벼슬이 없는 게 광주로 와서 평민으로 살았어요. 본시 파주 포천이었는데 거기서 내용은 모르지만, 서당에서 집단 투쟁이 있었어요. 파당이었는지 단순한 개인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무리싸움이에요. 서당에서 불상사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누구 하나가 상했어요. 그런 일이 있으면 그 연루자들을 몽땅 중형에 처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선대에서 광주로 오신 거예요. 광주에 먼 친척이 있기에 오셨지. 거기서 땅도 장만하시고, 그러나 그게 또 유지가 안 되고 어려운 고비를 당했어요. 우리 증조부님이 어렸을 적에 고조부모님이 동시에 돌아가셨어요. 두 분이 다 열병으로 돌아가셔서 증조부님이 그 전에 선산이 있는 데로 오신 거예요. 광주로, 오셔 가지고 아주 고생을 많이 하시고 힘들게 농사를 지어서 자수성가를 하신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 두 분하고, 할머니 분들도.
이 분들이 여간 부지런하지 않아서 그러니까 백조부님,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큰할아버지, 이 증조부님 밑에서 재산이 불은 거예요. 짐작컨대 그것이 한 200백석 가까이 모으셨지 않았나 싶어요. 평수는 모르지만 몇 만 평 되는 건데, 그 때는 아주 괜찮았던 거예요.
아버지 대에는 물고만 모아대신 거예요. 물고라는 게 관수, 논에 물대는 것, 바쁠 때 가볍게 거드는 거, 이러니까 농사에서 자기 자신의 노력보다는 일꾼을 사고 빈곤한 사람들의 품을 사고, 머슴을 사고, 그래서 그것은 자기 노력에 의해서 농사를 지은 것이 아니라 거의 착취라고 할 수 있죠.
우리 집에서 내가 10남매인데 내가 네 번째예요. 정확히는 3남8녀인데 갓 나서 누이가 하나 죽고, 7살 때 가난으로 남동생 잃고... 전쟁 때까지 8남매가 있었어요. 집안 식구들이 모두 사회주의 운동을 했습니다. 형님인 윤태보는 수원, 소사, 영등포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북에 가서 교통성 직맹 했습니다.
돌마에서는 10살까지 살았습니다. 8살 때 한문을 좀 배우다 9살에 판교학교를 들어가 2학년이 되던 해 봄, 초여름에 6.10 만세가 있었습니다. 그게 순종에 조의를 표하는 건데 학교에서 청계산에 가서 집단으로 했어요. 행전 차고 모자에 조의를 표하는 베를 해 가지고 궁을 향해서 절을 했습니다. 제가 대표로 조의를 표했습니다. 그때 못한 학교도 많은데 우리 학교엔 좋은 선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얼마 안 있어 7월쯤 수원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우리 집은 몰락해가는 중농인데 내가 태어난 해에 1만5천 평을 가지고 있었어요. 5정보. 가난한 시골에서는 부자라 할 만하지만 어디 부촌 가서는 아무것도 아니죠. 시골에서는 그걸 가지고 자작을 하는데 머슴도 있었고 간간이 노력을 사서 썼어요. 그걸 자작으로만 하면 중농이 아닙니다. 평수가 더 작아도 사람을 사서 농사를 지으면 중농입니다. 할아버지 대에는 재산이 더 많았고, 증조할아버지는 모범농가예요. 고생 많이 하시고 농사를 상당히 잘 지었어요. 농사 지은 걸 가지고 서울 송파까지 송파장에 가서 팔았는데 봄이나 여름에는 짚신 닳을까봐 맨발로 다녔다고 해요.
가난한 사람을 끌고 가는 경찰
6.10 만세 전, 5월쯤 될 거야. 우리 집에서 판교 학교를 가려면 백현리라는 데가 있어요. 잣나무 백(柏)자, 고개 현(峴)자니까 잣나무가 거기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백현동이라고 부르더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부촌이야 거기가. 백현리를 들어가자면 첫째집이 길 왼쪽에 두세 칸짜리 집이에요. 단칸방에 부엌이나 우습게 꾸린 거 하고는 마루, 마루라고 해야 토방마루, 그런 집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보니까 경찰 두 놈이 그 집 아들을 수갑을 채워요.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내 아들을 왜 잡아가느냐, 내 아들은 죄가 없다’고 항변하는 거예요. 간밤에 나물죽 먹고 잤다, 조반석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간밤에 나물을 넣어서 쌀이고 수수고 좀 넣어서 나물죽 한 그릇 먹은 것밖에 없다, 가난한 살림이다 이거죠. 내 아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안 된다, 그렇게 항변하는 걸 내가 들었어요. 이게 왜놈들이 이렇게 우리 고생하는 가난한 집 사람들을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잡아가는구나. 그래서 그때 내 생각에는 남의 집 나무를 베어 왔거나 청솔가지를 꺾어 해 왔거나, 도박을 했거나, 그 후에 성장해서 생각한 거지만 혹 반일운동에 참가했거나, 아마 먼저 이야기 한 게 맞겠죠. 남의 집이나 남의 집 선산에 가서 청솔가지를 해 와서 잡으러 왔겠구나.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비참한가. 초라한 저 어머니가 경찰관에 막 항변하는 게’, 내가 그 후에 1937년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봤지만, 파벨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의 공판장에서 무죄 항변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기 아들을 잡아가도 꿈쩍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아들이 억울하다는 거, 우린 가난하게 산다는 거, 나물죽을 먹고 산다는 거, 무슨 죄가 있기에 데려가느냐, 이런 항변을 하는데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조금 있다가 순종 장례 치르고.
사이비 종교에 빠진 아버지
갈마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갈 때는 거의 완전히 파산을 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보천교라는 유사종교에 관계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생 많이 하시고 우리가 고생길에 들었습니다. 차경석이란 교주놈이 완전히 경무대 앞잡이거든요. 지금이나 그 때나 교도를 다 매수해가지고 정보를 수집하고 그놈들 이용해가지고 막 계급적으로 민족적으로 마비시켜서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그것을 다 손에 쥐었던 거예요. 제가 어릴 때부터 거기에 관계를 해서 패가를 더 빨리 한 거예요.
우리 외조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 다음에 들어오신 분의 오라버니가 보천교 관계자였어요. 그러니까 우리 외가로 해서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우리 외삼촌만은 절대로 그런데 흔들리지 않은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흔들리셨던 거죠.
내가 한 댓살 적에 음식 차려놓고 ‘흠치흠치…’ 뭐라고 괴상한 주문을 외우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재산이 다 사라지니 사기꾼들이 더 안 모여들더군요. 이 유사종교가 무서운 겁니다. 유사종교가 아니라도 종교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는 명백한 거죠. 그래서 나는 유사종교에 대해서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랬죠.
사기교가 아닌 천도교나 대종교면 내가 좀 더 민족적 각성을 많이 할 수 있었겠죠. 대종교는 주로 중국에 많았는데 김일성 주석이 서중석 선생과 20년대에 이야기를 나눈 게 있습니다. 대종교는 우리 민족종교로 봐야 한다, 물론 거기에 여러 가지 오류가 있었다 하더라도 뿌리는 그렇게 봐야 한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보천교는 그런 것도 아니고 순전히 사기교예요. 그 일부가 지금 조계사 건물입니다. 정읍서 뜯어다가 고친 것이죠.
그 보천교 때문에 집이 기울어서 제가 10살부터 도시 빈민 생활을 했습니다. 비참한 생활을 한 거예요. 그때 돈은 지금으로 치면 조그마한 집이라도 하나 마련할 정도는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기꾼한테 그거마저 사기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집은 조그만 게딱지만 한 것도 장만할 수가 없었고 바로 세를 들었어요. 사글세. 광주에서 수원까지 인력거 값이 4원이에요. 인력거 둘을 우리 큰 누이, 둘째 누이가 타고 40리를, 그러면 8원 아닙니까? 8월이면 쌀 한 가마 값이죠. 내가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나는 맨발로 걸어가. 그러다 중간에 고무신 사 신고 간 생각이 나요.
그때 생각하면 담대하지 못한 거야. 4원이고, 8원인데 열 배를 하더라도 80원 내고 큰 누님과 둘째 누님을 소학교에 보냈어야 했는데 못 보냈어요. 학교는 형님하고 나하고만 겨우 공부를 마친 거야. 그것도 월사금을 제 때 못 내서 졸업 후에 차압을 당했지.
아무튼 집이 어려우니까 물건도 사 놓으시고 하신 것 같아요. 청솔가지를 사놨는데 장마 져가지고 싹 망했다고 그런 얘기도 들었고, 그러니까 뭐 되는 일이 없죠. 동물 농사라도 지으면 어떻게든 해서 패가를 완전히 다 하진 않았을 거예요.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으로 몰락한 집안
우리 집에 미국제 미싱(재봉틀)이 있었어요, 싱거미싱. 가난하면 그런 게 없죠. 어머니가 바느질을 잘 하시는 분이에요. 직성, 직폭, 짜는 거, 워낙 잘 하시기로 유명하신 것 같아요. 집에 식구가 많을 때는 열여섯 식구에요, 식구에 대한 바느질도 바느질이고 가세가 기울어지니까 동네 것도 해주신 것 같아요, 삯바느질을. 그런데 내가 대여섯 살 될 때 차압 들어온 걸 봤어요. 재봉틀도 가져간 걸 봤어요.
우리 집안 몰락은 왜놈들의 세부측량부터 시작합니다. 토지수탈 정책에 우리가 놀아나는 게 예요.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땅을 유지하지 못하고 몰락과정을 밟은 거죠.
세부측량이 1912년에 시작합니다. 내가 태어나기 5년 전이죠. 토지조사 사업에 대해 학계에서는 논쟁거리라는데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놈들이 여러 가지로 난해한 문구로 해서 촌에서 제대로 찾지를 못하는, 그건 뭐 우리 역사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농민들은 일본놈의 강점으로 인한 토지 수탈로부터의 몰락 과정을 밟는 것이지. 아까 얘기한 보천교나 이런 것도 다 그놈들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민족의식을 마비시키고 단결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런데다가 쓸어 넣는 거니까. 그러니까 더욱 촉진이 된 거죠. 우리 재산이 세부측량으로부터 더 몰락한 거예요. 우리 땅, 산이 수십 정보를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우리 선조의 유골이 지금 남의 산에 묻혀있는 거예요. 그게 어딘고 하니 청계산이죠. 굉장히 넓은 땅을 뺏긴 거예요.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뺏기고 이렇게 뺏기고, 그리고 나머지는 토지수탈에 의해서, 또 그놈들의 약탈, 수탈 정책, 착취 이런 데에서.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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