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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이유는...

이흥노 재미동포 | 기사입력 2020/12/26 [14:48]

한국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이유는...

이흥노 재미동포 | 입력 : 2020/12/26 [14:48]

21년, 새해 전야에 에이는 슬픈 사연이 알려졌다. 장애아들과 함께 살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전기가 끊기고 먹을 것도 없다. 장애아들은 죽은 어머니 곁을 석 달 넘게 지키다가 길거리로 나섰다. “도와주세요”라는 팻말을 들고 전철역 입구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렇게 석 달이나 거리를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회복지사의 눈에 띠었다. 그래서 반년이 지난 후에야 두 모자의 가엾은 사연이 알려지게 됐고 어머니의 장례도 치를 수 있게 됐다.

 

2014년, 서울 송파구 세 모녀 자살은 온 나라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세상을 등지면서도 밀린 방세를 주인에게 남긴 너무나도 착한 어머니라 더 안타깝기 짝이 없다. 또 2015년, 대구에선 30대 장애 언니를 돌보던 여동생이 언니와 함께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평생 장애 언니를 돌봐야 하는 신세를 비관한 여동생이 언니와 같이 생을 마감한 것이다. 2018년 4월, 충북 진천의 한 아파트에 살던 40대 엄마와 딸의 시신이 발견됐다. 편지통에는 고지서와 독촉장이 잔뜩 쌓였고 수돗물을 넉 달이나 쓰질 않았다. 생활고 자살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시신이 넉 달이나 방치됐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자살자 중에 유독 탈북자들이 많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우선 정착금의 대부분이 탈북 브로커에게 ‘탈북경비’를 지불하고 나면 실제 손에 쥐는 건 몇 푼 안 된다고 한다. 사회 적응도 안 된 데다, 아직 순진해서 유혹에 잘 넘어가 사기꾼의 표적이라고 한다. 각종 범죄에 연루되고 심지어 매춘행위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이들은 대게 막일을 하고 소득이 비교적 낮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게 태반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버이연합’이나 ‘태극기부대’에 단골로 일당을 받고 동원된다. 몸을 파는 젊은 탈북 여성들의 단골손님은 외국인 노동자라고 한다.

 

19년 8월, 탈북 어머니(42)와 병든 아들(6)이 서울 관악구 임대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집세가 여러 달 밀렸고, 냉장고가 텅 비었고, 음식물이 전혀 없는 거로 봐서 굶어 죽었을 것이란다. 은행 통장에는 석 달 전 마지막 잔고 인출 소인이 찍힌 것으로 봐서 죽은 지 몇 달 됐을 거란다.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한 엄마는 병든 아들을 수발하느라 변변한 직장도 구할 수 없었던 거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어머니는 32살에 탈북해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10년 세월을 남녘땅에서 버티다 끝내 저승으로 가고 말았다. 북녘에서는 자살, 매춘 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을 법한데, 이게 당면한 현실이니!  

 

한국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에 등극한 지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다. 한국은 OECD보다 거의 세 배인 하루 40명(40분마다 1명)이 자살하고 1년에 1만 5천 이상이 자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런데 경제 대국들 중, 하필 한국의 자살률이 가장 높고 그토록 오래 선두를 달릴까? 나라마다 자살의 동기가 다르다. 남녘은 주로 빈곤, 실직, 실업 등 경제와 연관된 게 대부분이고, 그중에서도 생활고 자살이 가장 많다고 한다. 늘 죽은 후, 약방문을 두드린다. 수급 신청 자격, 부양 의무 유무, 책임 소재 등을 놓고 시비를 벌이곤 한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비껴간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일할 권리, 병원 접근 권리 등의 기본 인권이 보장돼야 한다. 누구나 이웃, 동회, 단체, 사회, 국가의 일원인 이상 서로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게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나. ‘살기 싫어 죽는 건 남의 일’이라며 말 없는 죽은 자에게 책임을 돌려선 안 된다. 산자의 몫이다. 어떤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황금만능주의’가 판치고 있는 게 오늘 현실이다. 이 더러운 ‘군사문화’는 군사 깡패들이 뿌린 악폐 중 악폐다. 만병의 근원이다. 이미 장구한 세월, 기득권 세력으로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군사 깡패들의 후예를 발본색원 않는 한 웃음이 넘쳐나는 사회를 만들기는 어렵다. 물론 자살도 더 늘어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이 지구상에 자살 없는 나라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코로나 사망자가 없다는 데도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은 판인데…심지어 강경화 외무부 장관까지 국제무대에서 공개적으로 북의 코로나 사망 전무 주장을 믿기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지 않았나. 방배동 모자의 안타까운 소식은 지난날 평양에서 북녘 젊은 여성과 자살에 관한 대화가 불현듯 떠오른다. 2008년 2월, 뉴욕필하모니 (지휘자 로렌 마젤) 공연이 동평양대극장에서 있었다. 나는 운이 좋아 이 공연을 참관하게 됐다. 창광호텔에 워싱턴 동료와 같이 들었다. 그런데 매일 일과가 끝나고 저녁이면, 동료의 조카딸 최영옥(당시 26세)이 우리를 방문했다. 매일 세탁물을 빨아오고 춥다면서 내복까지 사 왔다.

 

어찌나 영리하고 인정이 많은 데다 예의범절까지 훌륭했다. 친해지니 뭐든 서슴없이 물어보고 물어오는 사이가 됐다. 하루는 “영옥이 주변에 자살한 사람이나 자살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나?”라 물었다. 웬걸 대답은 하지 않고 되레 질문을 한다. “자살을 왜 하는데요?”란다. 나는 “예를 들어 연애 실패, 생활고, 직장 불만, 등으로 죽을 수도 있겠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재깍 “그 사람 아니라도 결혼 상대가 널려있는데 왜 죽어요”라고 한다. 그리고는 잽싸게 “우린 콩 한 조각도 나눠 먹는 사회라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절대로 않지요”라고 아주 서슴없이 말한다.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영옥이와 나눈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자살이 있을 수 없다는 영옥이의 말은 설득력 있고 신뢰가 간다고 느꼈다. 북녘엔 ‘예방치료 제도’의 일환으로 의사의 주기적 호별방문이 있고, 더구나 이웃, 단체, 직장, 당과 밀접하게 연계된 사회라 생활고 자살이나, 더구나 시체가 반년 넘게 방치될 수 없는 사회가 분명한 것 같다. 북녘 사회에서는 “하나는 전체를, 전체는 하나를!” 구호가 널리 애용되고 있다. 이것은 상부상조, 즉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건설에 임해야 하는 정신적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걸 강조한 거로 보인다. ‘나만 잘 사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의 정반대말이 아닐까 싶다.

 

자살의 책임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코로나 재앙과 경제 위기로 지금 비상시국이다. 나라가 일사불란하게 위기에 대처해도 부족한데, 갈기 갈길 분열돼서 온통 나라 전체가 흥신소로 변해가고 있다. 인정머리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이제 남은 건 확 뜯어고치는 대혁명뿐이다. 자주, 주권, 독립 깃발을 휘날리며 38선에 걸쳐있는 철조망을 때려 부숴야 한다. 남북이 하나 되는 걸 사생결단 방해하는 내외세력을 잘라내야 한다. 그래야 자살도 없고 살맛 나는 세상, 신명 나는 세상이 펼쳐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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