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2월호를 발간했습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였고 비전향장기수로 총 27년의 감옥생활을 한 윤희보 선생의 구술을 연재한다. 윤희보 선생의 구술은 특히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어떤 활동을 하였고 박헌영, 이승엽 세력과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를 상세히 다루고 있어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윤희보 선생은 1917년 10월 10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2000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당시 북으로 건너갔으며 2015년 3월 사망,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제가 관계한 사람들 중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난 이들이 있습니다. 김일수, 서중석, 서완석, 안형준 선생들입니다. 나중에 그 내용을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고 확인을 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 24장 2. ‘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에서 김일수, 서완석, 서중석 선생에 대한 소개를 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이들이 1940년대 들어 서울에서 무장봉기 준비를 하였다고 기록하면서 “경성지구 무장봉기준비결사의 조직자들인 김일수나 서중석은 내가 길림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오랜 공산주의자들입니다”라고 하였다.
1943년 체포된 뒤 출소하고 보니까 김일수 선생 생활이 말이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돈을 만 원을 주었어요. 그때 돈 만 원이면 백석 정도 됩니다. 당시에는 나를 동정해서 후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만 원이 아니라 20만 원도 나왔어요. 굉장히 많은 돈이죠. 아마 국내에서는 내가 제일 많았을 거예요.
김일수 선생은 화전민의 아들로 참 좋은 데가 많은 분입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제가 1946년 북에 올라가서 보니까 김일수 선생은 사법성 공증과 과장으로 있었습니다. 1952년에 다시 남으로 내려왔는데 그 때도 과장이었죠. 제가 1952년 8월인가 9월쯤 서울로 나올 때 인사드리러 갔더니 “동지가 아무래도 남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것 같다. 나도 내려갔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37살이고 김일수 선생은 50대였는데 키가 후리후리하고 깡마르지만 아주 눈에 광채가 번쩍번쩍해요. 내가 제일 존경하던 분이에요.
김일수 선생은 1926년 김일성 주석을 만났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에서 “김일수는 소련 원동지방에 들어가 이준의 아들 이용과 함께 소련적위군 조선인 대대에서 중대장으로 복무한 적도 있습니다. (중략) 그는 당건설을 중앙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선포하는 하향식방법이 아니라 대중 속에 들어가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면서 상향식으로 해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도 허심하게 받아들였습니다”라고 기록하였다.
서중석, 서완석 선생도 김일성 주석을 만났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해방 전에 여운형, 이용, 이극로, 홍벽초 이런 분들하고 관계가 깊었죠. 그러니까 상당히 넓고 깊었는데 그만 일을 못했어요. 일을 못했으니까 죄가 많은 거죠. 서중석 선생이 벽초 홍명희 선생 아들 홍기문, 홍기무 형제와 (혁명)사업관계를 맺고 사회주의 사상을 직접 영향을 주었어요. 해방 후에 이용, 이극로, 이기석(영덕사람으로 호가 걸소일겁니다), 김태준, 이런 분들이 건국동맹에 관계했습니다.
해방 후에 서중석 선생이 김원봉 씨를 만나는 것도 봤습니다. 김원봉 씨가 황포군관학교 동기 어윤봉의 생일이라고 해서 해외에서 귀국했는데 어윤봉 만나면서 서중석 선생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상해에서 운동관계가 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들어오면서 만났죠.
서중석 선생은 서재필도 만났습니다. 두 분은 달성 서씨 가문으로 일가입니다. 옛날 명문의 후예로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유대가 깊었습니다. 이처럼 서중석 선생이 상당히 폭이 넓고 깊고, 통이 큽니다.
동생 서완석 선생도 존경합니다. 서완석 선생이 정말 일꾼이에요. 형님보다 동생이 더 치밀합니다. 그런 일꾼이라는 걸 내가 알죠. 그 분들은 내가 해방 전에 주로 관계했고, 해방 후에는 몇 번 만나 뵈었지만 조직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해방 직후에 잠깐 연관이 됐을 뿐이지. 하지만 활동하는 범위가 달랐어도 내가 존경하던 분이니까 건강이 나쁘면 내가 간호하고 그랬죠.
서중석 선생 건강은 비교적 괜찮았는데 서완석 선생은 고문을 받아서 폐가 양쪽 다 상해 폐결핵에 심장비대도 있었어요. 그분은 조사를 받아도 조서가 아예 백지였어요. 말 안 하기로 유명한 분이죠. 그러니까 취조할 때 저놈들도 포기할 정도입니다. 고문을 받을 때도 아프다 소리도 안 합니다. 신음소리도 안 냅니다.
서완석 선생은 서울서 지하활동하면서도 북에 두 번이나 갔다 왔어요. 그 얘기를 나한테 해줘요. 쪽지 적어온 것을 보면 여기 살아계실 때에 동생 서중석 선생은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의 훈장을 받았어요.
두 분은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가셨습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당의 기밀이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없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에서 “서중석, 서완석 형제도 내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나는 서중석이 길림에서 청년사업을 할 때부터 그와 알게 되였습니다. 내가 하숙을 정하고 있던 장철호네 이웃에서 서중석이 살고 있다나니 그와도 얼굴을 익히게 되였습니다.”라고 기록하였다.
1944년 12월에 사건이 터져 경기도 경찰부 감옥에 갔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잡혀서 한 방에 같은 사건 연루자가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 때 안형준 선생과 한 방에서 지냈어요. 안 선생이 김일수, 서중석 선생하고 가까워서 나에게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옛날엔 사실 많이 묻지 않았죠. 묻지 않고 필요 이상 말 하지 않고. 그런데 지금 후회스러운 건 내가 좀 궁금한 거 물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만날 수 없는데, 안타까운 생각이 들죠…
안형준 선생은 고향이 혜산진 근방이고 혜산진 을종농업학교를 나와서 아이들 교육을 했습니다. 브나로드 운동이라고 농민들 계몽운동을 했습니다. 안 선생은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인 김형직 선생의 동생 김형권 선생과 사업관계가 있었습니다. 또 1931년 공작위원회 사건으로 김일수, 서중석 선생과 징역을 살았습니다. 징역 3년을 살았습니다.
안 선생은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관계하다 북으로 갔는데 폐결핵이 심해서 일을 제대로 못하고 거기서 임산(林産) 관련 무슨 외곽 단체 활동에 관계했습니다. 원래 임산 관련 일을 했던 분이고 혜산쪽에 환합니다. 보니까 앞에서 드러나는 활동보다는 뒤에서 많이 일한 것 같습니다. 건강 문제로 활동은 제대로 못했지만 가능한 범위에서 쉬지 않고 일한 것 같아요. 아마 박달 선생 근방에서 교육을 담당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데, 주말이면 매번 김일수 선생과 남포 요양소에 박달 선생 만나러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안형준 선생은 해군 무관부, 왜놈들을 매수해 가지고 광목을 중국으로 수출해 가지고 최소한 3백만 원 내지 7백만 원 수입을 보려고 했어요. 안형준 선생이 ‘3백만 원은 해낸다’라고 했었어요. 그래서 그 돈을 반일전민항쟁 기금으로 쓸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고 나는 바람에…
안형준 선생도 김일성 주석을 만났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에서 “안형준도 서울에서 전민항쟁조직들을 꾸리고 잘 싸웠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북부국경일대에서 형권삼촌의 지도를 받으며 반일청년운동을 해온 사람입니다. (중략) 나는 1946년 봄에 김책과 함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보았습니다.”라고 기록하였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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