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혜원을 기억하며] 7. 장재희 “동지가 남긴 시간을 이어가겠다”

장재희 | 기사입력 2021/05/17 [10:57]

[신혜원을 기억하며] 7. 장재희 “동지가 남긴 시간을 이어가겠다”

장재희 | 입력 : 2021/05/17 [10:57]

자주·민주·통일을 염원하며 자신의 한 생을 바쳤던 신혜원 작가.

 

신혜원 작가는 암 투병 중 지난 3월 22일, 4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많은 이들은 신혜원 작가의 삶은 조국과 민중, 조직과 동지를 위해 헌신해 온 삶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신혜원 작가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을 통해 그의 삶을 다시 한번 더 되돌아본다. 

 

[신혜원을 기억하며] 마지막 편은 신혜원 작가와 ‘베란다항해’에서 함께 활동했던 장재희 작가의 글이다. (편집자 주)


▲ 신혜원 작가 생전 모습.

 

신혜원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한 달여간이 되어갑니다. 봄볕이 유독 따사롭고 꽃이 색색이 만개하는 속에 우리가 동지를 잃은 상실감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야속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지의 삶을 되새기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동지와의 추억 속에 그가 남긴 정신을 기리고, 그 시간을 살아내야 할 몫이 우리에게 있음을 통감합니다. 

 

동지와 함께한 추억을 톺아봅니다. 동지의 삶은 말 그대로 운동가로서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1. 신념의 강자, 신혜원 동지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신념에서 나옵니다.

운동하는 예술가로 복무하고자 했던 마음, 왕성한 실천, 소중히 만들어온 동지들과의 관계

신혜원 동지의 모습의 뿌리에는 민중을 위해, 이 땅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다 바치는 삶을 살고자 했던 동지의 높은 신념이 있었습니다. 

신혜원 동지의 높은 신념은 ‘학습’에 있었습니다. 

작업실에서도,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동지는 항상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선물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불안이 엄습하는 속에서도 동지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학습하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동지는 병마 앞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자연치유를 선택한 신혜원 동지는 동지들의 권고대로 매일 하루에 6번씩 풍욕을 진행하고, 채식위주의 식생활, 냉온욕 등을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했습니다. 곁에서 지켜본 신혜원 동지의 하루는 1시간 단위로 쪼개진 투쟁과 같았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좌절에만 빠졌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병마와의 싸움, 삶 자체가 하나의 투쟁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신혜원 동지가 간직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철두철미한 조직관

동지와 한총련 활동을 함께해온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시절 신혜원 동지와 함께 한총련 활동을 했습니다. 신혜원은 항상 조직적이고 원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조직과의 규율을 철저히 지켰고, 원칙적 이야기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젠가 동지와 술자리에서 ‘힘들지 않니?’라고 물어보면 늘 나직한 목소리로 열심히 하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답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신혜원 동지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동지의 철두철미한 조직관을 많이 떠올립니다. 

조직과 동지들을 믿지 못하고, 혼자임을 멋으로 알던 저에게도 신혜원 동지는 항상 ‘조직과 동지들을 믿자’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만이 많았던 제가 몇 시간을 불평을 쏟아내면,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와중에도 동지의 마지막 말은 꼭 ‘조직과 동지들을 믿자’였습니다. 그 한 마디는 그 어떤 장황한 설명보다도 가슴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동지의 철두철미한 조직관은 작업의 결과물에서 더욱 빛나게 나타났습니다. 

예술가라면 자기 이름으로 만들어내는 창작물, 작업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혜원 동지는 조직이 제기하는 작업들을 항상 우선순위로 두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고민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신혜원 동지는 며칠 밤을 새고 작업을 한 후에도, 조직과 동지들이 요구하는 작업을 위해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는 사람이었으며, 그것을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맡겨진 작업에 대한 책임감도 높았습니다.

수정요구가 끝날 때까지 밤잠을 미루며 작업, 토론, 수정을 연이어 나가는 동지였습니다. 

학생들이 창작 집체극 ‘해난디동동’을 준비하며 배경 걸개를 신혜원 동지에게 맡긴 적이 있었습니다. 신혜원 동지가 처음 만들어온 작업의 결과물도 훌륭했지만, 신혜원 동지는 “배경이 너무 어두워 보이지는 않는지”라고 묻고 학생들이 “조금 어두워 보이기는 한다”라는 답변을 듣자마자 ‘새로 작업해서 보내줄 것’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조직과 동지들을 믿고, 따르며 최선을 다해 자신을 다 바치는 신혜원 동지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모범입니다. 

3. 왕성한 실천가 

신혜원 동지는 투쟁의 현장을 지켜내는 예술가, 실천가였습니다. 

동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작업들을 통해 실천했고, 특히 베란다항해를 하는 기간 동지는 시대가 요구하는 작품을 내며 시대와 호흡하는 작가였습니다.

민들레 동지들과 함께한 전국 순회 투쟁, 통일 선봉대, 방미트럼프탄핵 청년단과 같이 굵직  굵직한 투쟁들에 동지는 빠짐없이 참여했고 그때 마다 좋은 작품들을 내며 시간이 부족한 것은 밤샘으로 채우고 또 다음날 실천을 나가곤 했습니다. 

동지는 늘 잠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동지는 자기 자신보다도 시대가 요구하는 투쟁과 실천, 즉 민중을 앞에 두고 사는 일꾼이었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예술인이라고 하면 자신의 작업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명한 작품, 명예, 권위가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다가 유명한 예술작가일수록 난해하고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며, 그것은 민중의 삶과는 괴리된 작품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들과는 대조적으로 동지는 절대 실천과 현장을 놓지 않았습니다. 조직적으로 제기되는 투쟁뿐만 아니라 동지는 항상 이 시대의 아픈 자리와 사람들 곁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지가 작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닌, 실천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운동가였기 때문입니다. 

동지와 함께 정신장애 인권단체 파도손이라는 곳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개인에게 부과되는 아픔은 더 큰 것이 되는 이 세상에서 정신장애는 이제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삶을 살다가도 문득 찾아오는 이러한 정신적 고통은 사회로부터 이들을 더 격리하고 악순환에 빠지게 만듭니다. 

오래전 동지가 작업을 통해 인연을 맺은 단체인 이곳에서 동지는 미술 수업을 진행했고, 그곳에서 정말 아프고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나는 날, 찾아와 오열하던 이 단체의 대표는 동지를 자신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윤미향 국회의원의 추모사는 신혜원 동지가 투쟁의 현장에서 살아온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신혜원 동지는 그러루한 ‘예술가’가 아닌 이 시대가 낳은 아픔들에 연대하고 늘 그늘진 자리마다 함께 찾아가 작품으로, 투쟁으로 실천하는 ‘예술가’, ‘왕성한 실천가’였습니다. 

“그대는 묵묵히 세상을 바꾸는 조용한 혁명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벗이기도 했다. 할머님들의 삶과 뜻을 작품으로 널리 알렸고 할머님들의 미술치료 선생님이 되어 길원옥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의 곁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 이름 없이 잊혀져 갈 할머님들의 삶을 들풀로 노래했다. 그대가 남긴 판화작품이 그대가 남긴 들풀 같은 발자취가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윤미향 국회의원의 추도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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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높은 실력가, 신혜원 동지

제가 신혜원 동지를 알게 된 것은 ’그해, 오월‘이라는 5.18 기림 거리 전시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동지는 이미 전문가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담은 기림책도 발간해 이미 실력 있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신혜원 동지의 작업은 많은 이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신혜원 동지는 언제나 실력이 서투른 제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생소한 벽화작업이었기 때문에 함께 참여했던 이들 모두 동지에게 의지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때마다 동지는 짜증을 내거나 화내는 일 한번 없이 모든 과정을 차근차근 알려주었고, 페인트 작업을 주되게 하며 양 조절, 색상 조절 및 보관 등등. 자칫하면 작은 색상의 차이로 벽화 전체의 그림이 깨질 수 있는 섬세한 작업도 동지가 있어 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동지는 손이 거친 저와 처음 온 봉사자분들에게도 차분히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동지는 늘 꼼꼼하게 준비를 해왔고, 매일 아침 남들보다 일찍 나와 조용히 작업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베란다 항해에서 맡았던 수많은 거리 전시, 기획 전시들에서도 동지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늘 실무적으로 꼼꼼히 준비를 도맡아 했었고, 동지가 있음으로써 심적으로나 큰 힘이 되었습니다. 

동지는 또 그 많은 경험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습니다. 누드 크로키 강좌를 듣고, 끊임없이 연습하며 작업을 해왔습니다. 

크로키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씩 있었고, 한 번 할 때마다 세 시간 가까이 50여 장 정도 되는 그림을 그려야하는 고강도의 학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지는 단 한 번도 수업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동지의 수첩을 보면 언제나 빼곡히 1분, 3분, 5분마다 움직임을 달리하던 모델들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지는 매주 조계사에서 진행하는 불화 수업도 들었습니다. 홍대 동양화를 전공했고, 그 실력도 인정받았지만 가진 실력에 만족하지 않고 발전하고자 하는 동지의 열정은 멈춤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마음 한구석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전시에 내놓은 작업들이 대중들에게 좋은 평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동지가 끊임없이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아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동지는 동양화를 자신만의 색감으로 변형시켜 현대적으로 오마주한 반미풍속화를 그려냈으며, 베란다 항해에서 진행한 반일마름전, 4.3전시 이제사 고람수다 등등의 전시를 통해 동지만의 개성 있는 화풍을 담은 훌륭한 작업을 그려내곤 했습니다. 

“동지의 가정환경이나 살아온 배경에는 갖춰진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동지는 욕심도 별로 없었고 그것이 신기했다. 그런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되니 절박했던 동지의 신념이 더 와닿는다. 이것저것 참 많은 역할이 있는데 자신의 예술성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동지는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민들레 시절, 홀씨에 들어가는 1:1 인터뷰를 동지가 진행했었다. 2~3시간이 넘는 인터뷰가 끝나면 항상 동지는 그림 선물도 주었다. 간단한 그림이었지만 깊이 있게 나를 보고, 결의를 높여주는 그림이었다.” 

5. 신혜원 동지의 정신을 이어나가자

아직도 동지의 부재가 믿어지지 않고, 신혜원 동지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삼키는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동지를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 동지의 정신을 이어받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작업을 하다 보면 실무적인 어려움과 동시에 빠른 기한 내에 좋은 작업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예민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걱정에 파묻히고, 끝내 자신감도 잃어가는 제게 동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힘이 될 거야.”

 

그런 동지의 말은 마법 같았습니다. 

예술은 개인의 몫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만큼 작업이란 오롯이 내 것이었고, 나를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결과물로 생각했었습니다. 때문에 매번 모자라지 않은가 하는 자괴감과 때때로의 자아도취 사이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혜원 동지는 제게 참된 예술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마음, 민중을 위한 예술, 평화통일을 향한 그림. 그것이 혜원 동지가 제게 가르쳐 준 예술이었습니다.

동지의 정신을 돌아보며 ‘진정한 예술 운동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신혜원 동지를 지탱해주었던 그 신념을 따르기 위해 더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리고 투쟁의 현장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어떤 작업을 하는 사람인지를 잊지 않겠습니다. 

‘내’가 아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예술을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동지의 정신을 받아 안아, 신혜원 동지의 ‘동지’가 되겠다는 오늘의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동지를 잃은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닌, 동지의 몫으로 사랑하고 투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언제인가 가장 아픈 날, 구부러져 동동 구르던 제게 동지가 한참을 동네를 돌아 말없이 건네준 따뜻했던 죽처럼 동지가 준 마음을 우리 민중들에게 돌려주는 그런 일꾼이 되겠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감싸는 햇살처럼 따사로웠던 동지의 길을 이어가겠습니다. 

신혜원 동지, 보고 싶습니다. 

신혜원 동지가 남긴 시간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아래는 신혜원 작가의 작품과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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