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금] 소련의 수정주의로 부침을 겪은 북·러 관계

이인선 주권연구소 연구원 | 기사입력 2021/05/21 [17:14]

[러시아는 지금] 소련의 수정주의로 부침을 겪은 북·러 관계

이인선 주권연구소 연구원 | 입력 : 2021/05/21 [17:14]

북 외무성은 2021년 4월 25일 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담화를 내고 북·러 친선관계가 양국 정상의 깊은 관심 속에 더욱 높은 단계로 발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천일 북 외무성 러시아 담당 부상은 담화에서 전략적이며 전통적인 북·러 친선관계를 새로운 높이에서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강화 발전시켜 나가려는 것이 북의 확고부동한 입장이라고 언급했다. 임 부상은 북·러 정상회담 이후 지난 2년에 대해 양국은 유동적인 국제 정세와 예견치 못한 세계적인 보건 위기로 인해 많은 시련과 도전에 부닥쳤지만 정치·경제·문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상호 연계하고 협력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어떤 외부적 도전과 난관에도 끄떡하지 않고 두 나라 국민의 이익에 맞게 보다 높은 발전단계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과 러시아의 관계는 어떻게 돈독해진 것일까? 세 번에 걸쳐 북·러관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기사 : [러시아는 지금] 북·러 친선관계 시작은 언제부터... http://jajusibo.com/serial_read.html?uid=55390&section=sc91)

 


 

1. 수정주의자가 지배하는 소련, 자립성이 강해지는 북

 

해방 후 김일성 주석은 여러 차례 소련을 방문하여 북·소 두 나라 관계문제를 비롯해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노동운동에서 나서는 문제를 가지고 스탈린 서기장과 진지하게 협의했다.

 

당시 소련의 국내외 정세는 매우 복잡하고 긴장했다.  2차 세계대전의 후과로 파괴된 경제를 복구해야 했으며 한편으로는 소련과 지구상에 새로 출현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미국을 필두로 한 제국주의자들의 갖가지 포위·압살 공격에 대처해야 했다.

 

스탈린 서기장은 모스크바를 찾아온 김일성 주석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며 “조선 사람은 광복된 지 몇 해밖에 안 되었지만 많은 일을 했다. 토지 개혁과 산업국유화 법령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이 조선 사람들에게서 커다란 지지를 받는 것을 우리는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김일성 동지의 현명한 영도의 결과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친선관계가 발전하던 중 두 나라는 스탈린 서기장의 사망으로 일련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스탈린 서기장은 1953년 3월 5일 사망했다. 이날 소련의 중앙위원회, 각료회의, 최고회의 간부회의 합동회의는 베리야·불가닌·보로실로프·카가노비치·말렌코프·미코얀·몰로토프·페르부힌·사부로프·흐루쇼프를 정회원으로 선출했다. 베리야, 흐루쇼프를 비롯한 관료주의자들이 대거 권력을 쥐게 되었다. 

 

관료주의는 당의 핵심 간부들이 폐쇄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법과 조직구성의 한계를 넘는 권한이 집중된 직책을 서로 달아주고 이러한 최고 간부들 간의 연합이나 대립으로 파벌이 형성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소련은 1953년 4월 11일 각료회의의 포고령으로 각 산하 부서장들의 정책결정권이 강화되면서 관료주의가 득세했다. 농업 부분, 공업 부분, 생산재 공업, 소비재 공업, 군부 등에 똬리를 튼 관료주의자들이 정부 재원을 서로 많이 가지겠다고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이들은 사회적 부가 아니라 개인적 부를 위해 싸웠다. 다시 말해 스탈린 서기장과 달리 흐루쇼프, 베리야 등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인민과 당, 국가를 분리해 자신들만의 소련으로 만들고자 했다.

 

흐루쇼프는 1953년 9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장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 비밀연설로 사회주의의 지도체계를 개인 미신·개인숭배라고 매도하며 스탈린 서기장을 격하하기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미국 중심 제국주의와 전쟁 불가피론 부정 ▲평화공존론(사회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 간에 타협하여 무력 없이 평화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 ▲사회주의 이행의 다양성 ▲사회주의 혁명의 평화적 발전 가능성’ 등을 주장했다. 이에 스탈린 서기장과 가까이서 함께했던 카가노비치·말렌코프·몰로토프 등은 스탈린 격하 움직임에 분노해 1957년 6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흐루쇼프를 축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다시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주코프의 힘을 이용해 다수표를 얻었고 그를 축출하고자 했던 이들은 ‘반당집단’이라는 오명이 붙은 채 당에서 제명되었다.

 

당시 관료주의자들은 많은 민족을 사회주의로 묶어낸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파괴·수정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현대 수정주의가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태동하게 된 배경이었다.

 

이에 북은 흐루쇼프 서기장을 수정주의자, 대국주의자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북·소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특히 스탈린 격하 운동의 영향을 받은 북 내 소련파가 중국에서 활동했던 연안파와 합세해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일으키면서 북 주민들의 소련에 대한 인식은 안 좋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흐루쇼프는 자국 중심의 국제 사회주의 체제를 주창하면서 북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북은 독자노선을 정립하고 흐루쇼프 정권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북은 자립경제 노선을 천명했고 인민경제발전 5개년계획에 따라 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천리마 운동을 선포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와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 간의 친선과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했다.

 

김일성 주석은 1961년 7월 6일 모스크바를 찾아 흐루쇼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이하 조·소 우호조약)을 맺기도 했다. 흐루쇼프는 1962년부터 경제상호원조회의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들을 소련 중심 경제체제로 재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은 1961년 자립적 민족경제를 통한 인민경제발전 1차 7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중화학공업을 앞세운 북의 경제노선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며 1961년 11월부터 북에 경제 지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에 제공했던 차관을 황금으로 상환할 것을 요구했다.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1962년 10월 쿠바에 핵미사일을 포함한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이 쿠바를 봉쇄해 소련의 배를 막으면서 흐루쇼프의 계획대로 미국과 협상할 기회가 만들어졌다. 흐루쇼프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만나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북은 소련의 이러한 모습에 더는 소련을 믿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에 북은 군사적으로도 ▲전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라는 자주국방노선을 천명했다.

 

▲ 김일성 주석과 브레즈네프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 1964년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등장과 함께 북·소 관계도 복원되는 것 같았다. 북·소 정상회담이 1966년 5월 열렸고 1967년 3월에 북·소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시행하기 위한 의정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양국은 1976년 장기무역협정 체결로 군사·경제 협력을 재개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 서기장도 대국주의 경향을 보였는데 사회주의 체제가 위험에 처하면 개입할 수 있다는 제한주권론을 내세워 체코를 침공했고 폴란드 사태에도 개입했다. 북은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제한주권론에 반대하며 독자노선을 계속 견지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하자 브레즈네프 정권은 사건 초반에 북을 지지했지만 북에 압력을 가해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받고 북을 비판했다. 그러나 북은 소련이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더라도 미국과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에서 미국 정부의 명의로 된 사죄문에 서명하고 그것을 북에 전달했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사망하고 안드로포프를 거쳐 1984년부터 체르넨코가 뒤를 이었다. 체르넨코 서기장 시기는 스탈린 서기장 시기의 북·러 관계로 나아간듯 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84년 5월, 23년 만에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이후 3차례의 북·소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경제협력협정·상호군사지원협정을 체결하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기술 및 설비지원 협정 체결문제를 합의했다. 1985년에는 강성산 내각 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체르넨코 서기장이 1985년 3월 사망하고 고르바초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소 관계는 좋아지지 못했다.

 

▲ 김일성 주석과 체르넨코  


2. 1990년대 북·러관계

 

흐루쇼프 계승을 표방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 노선을 펼쳤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은 ‘▲사유재산 허용 ▲다당제와 대통령제 도입 ▲서방 문화 자유화’ 등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노선이었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계급투쟁을 포기한다는 소련공산당 새 강령을 마련하고 1991년 12월 벨라베자 조약을 통해 소련을 해체했다.

 

소련의 사회주의 포기와 함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이때 북·중국·쿠바·베트남·라오스만이 사회주의를 지키던 국가들이었다. 냉전 해체와 함께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로 급격히 정리되었고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더 거세졌다. 그렇지만 북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중심으로 자립경제 노선·자주국방 노선을 표방하며 미국의 공격에도 굳건히 자신의 길을 갔다.

 

고르바초프가 초대 소련 대통령이 된 날인 1990년 6월 12일은 사실상 러시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공표한 날이다. 옐친은 1990년 7월 소련공산당을 탈당했다. 옐친은 1991년 6월 12일 투표에서 57%의 지지를 받아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옐친은 당선되면서 소련을 탈피한 정치적 다원주의와 서방식 시장경제체제라는 선명한 기치를 내걸었다.

 

북이 1993년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고 북핵 문제가 전면에 부상하자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대북공조체제에 동참하고 북에 파견된 러시아 과학자들을 소환해버렸다. 옐친 대통령은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과 한·러 정상회담을 마친 후에는 한국전쟁 직전인 1948~1949년 북·소 관계 관련 극비문서의 복사본을 전달했다. 북은 옐친 정부가 동의 없이 문서를 공개한 것에 강력히 항의했다.

 

옐친 대통령은 미국·한국과 관계 증진에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오랜 친선관계를 맺어온 북을 배척하고 미국·한국과의 관계 증진에만 관심이 있다며 옐친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국을 추종하다 강대국 소련이 후진국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반미·반제국주의 입장이 러시아에서 인기를 얻었다. 자연스레 반미·반제국주의·자주화를 고수해온 국가인 북에 대한 우호적 인식이 커졌고 정치인들도 여론의 변화에 따르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1994년 9월 파노프 외무차관 방북을 계기로 북·러 관계 회복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0월에는 지리놉스키 자민당 당수가 방북했고 이듬해에는 러시아 의회 대표단이 방북했다. 

 

1996년 프리마코프 외무장관 취임 이후 북·러 관계 회복은 더욱 속도를 냈다. 고위급 인사들의 방북은 늘어났고 6년 동안 중단된 ‘북·러 경제·과학·기술 공동위원회’도 재개됐다. 1999년에는 조·소 우호조약을 대체하는 우호·선린·협력조약을 가조인(조약이나 협정의 내용이 거의 확정되었을 때 하는 약식 서명)했다.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000년 2월 9일 평양을 방문해 북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 사이의 친선, 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옐친 대통령은 1999년 12월 31일 전격 사임했다. 옐친 대통령의 뒤를 이어 등장한 푸틴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0년 7월 19~20일에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고 이때부터 북·러 관계는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다.

자주자립자주국방이정답 21/05/21 [22:56] 수정 삭제
  노스코리아의자주노선이정답이엿어... 미국놈들과서방놈들믿으면꼭뒷통수맞고 국가존망이나전쟁그리고지도자목숨을잃게된다는걸이라크와리비아에서분명하게볼수있엇지~~~
후회하면늦다 21/05/23 [19:44] 수정 삭제
  러시아가 미국에 굴복, 자본주의화하여 후진국이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ss 21/05/23 [20:59] 수정 삭제
  미국은 러시아에게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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