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동지애는 떨어질 수 없는 말이다. 비판은 잘못을 추궁하고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지가 사업과 활동에서 더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래서 동지애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비판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다 알더라도 비판을 받으면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비판을 해준 사람을 탓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사례를 통해 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대학 시절 농활을 준비할 때였다.
나는 농활 실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농활 출발 하루 전날이었다. 한 선배는 나에게 농활 준비가 제대로 안 되었다며 몇 가지를 지적하고 비판했다. 선배가 하는 이야기여서 앞에서는 알았다고 했지만 ‘대자보 쓰기는 선전 담당에게 나도 얘기했다. 선전 담당에게 책임을 물어야지 왜 나한테 뭐라고 하나’, ‘다른 것 준비하느라 정신없는데 지금 그런 것을 말할 때인가’라는 마음이 들면서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농활 준비 상황도 모르고, 내가 무엇을 했는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비판을 한다는 불만이 치밀었다.
그런 불만을 품은 채로 꾸역꾸역 해당 실무를 수행해냈고 농활은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농활이 끝나고 뒤풀이에서 그 선배와 다시 얘기를 나눴다. 선배는 “실무 전체를 책임진다는 게 어렵지?”라며 책임을 진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움이 따르지만, 일꾼이라면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이야기해줬다.
나는 그제야 내가 선배의 비판을 잘못 대했다는 반성이 들었다.
당시 나는 ‘지금 그 사안을 말할 때가 아니다.’, ‘방법이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며 비판하는 선배를 탓했다. 비판을 내용 중심으로 대하지 않고 내 처지 중심으로 생각했고 또 당장 해야 할 이런저런 일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 나는 열심히 했는데 칭찬은 해주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것만 지적하니 그게 싫었다.
결국 내 중심으로 비판을 대하게 되니 비판의 내용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비판의 형식과 시기 등을 운운하며 선배를 탓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선배가 비판을 통해 내용과 운동의 원칙을 다시 세워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어야 했다.
무엇보다 나는 책임감을 더 가졌어야 했다.
자신이 맡은 일은 모든 것을, 끝까지, 목표대로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렸다. 게다가 ‘나도 할 만큼 했다’라는 핑계를 앞세워 나의 책임은 없는 듯이 대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의 최종책임자는 나였다.
또 나는 잘못을 인정할 용기가 부족했다.
부족한 것을 부족하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마음이 앞서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핑계만 늘어놓았다.
내가 혁신하고 우리가 혁신하는 만큼 좋은 세상이 온다.
그렇게 생각하면 혁신의 가장 빠르고 가장 유력한 방법인 비판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학창 시절 이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비판을 대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어서 그렇다.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도 비판을 받으면 선뜻 결심이 서지 않고 여전히 비판하는 사람을 고깝게 생각하는 실수를 하곤 한다.
최근 대학생들 속에서 나를 바꿔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를 들고 혁신의 불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며 많은 감동을 받는다. 내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게 되고 또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어린 비판과 허심한 접수, 그리고 끝없는 혁신만이 이 분단의 시대를 끝장내고 자주, 민주, 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새 시대를 열어내는 데 나도 한몫 단단히 하리라 마음먹으면서, 더욱 혁신에 앞장서겠다는 결의를 다져본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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