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금] 고려인은 왜 사할린에서 살게 되었을까

이인선 통신원 | 기사입력 2021/12/05 [11:04]

[러시아는 지금] 고려인은 왜 사할린에서 살게 되었을까

이인선 통신원 | 입력 : 2021/12/05 [11:04]

▲ 2019~2021년 기준으로 본 고려인 분포도.  © 이인선 통신원

 

2021년 11월 27일 낮 사할린발 항공편으로 1세대 사할린동포 21명과 동반 가족 등 91명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날 입국한 동포 중 최고령자인 1931년생 전채련 할머니는 8살 무렵 일제에 강제 동원되어 탄광에서 일하고 있던 오빠를 따라 엄마와 동생과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전채련 할머니는 광복 후 귀국할 방법이 없어 80여 년을 사할린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할린 한인들처럼 우리 동포들은 1945년 해방 이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오랜 기간 정착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동포들은 자신들을 고려인·한인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는데, 보통 과거 소련이었던 곳에서 살아온 한민족을 통틀어 고려인이라고 말한다.

 

이번 글에서는 고려인이 사할린을 비롯한 이역 땅으로 간 배경과 해방 후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한다.

 

러시아 땅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

 

(1) 식량난

 

러시아 극동지역에 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860년까지 이 지역은 청나라에 속해 있었지만, 많은 반란과 영국·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 청나라는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체결로 아무르·우수리 지역에서 조선의 접경지역에 이르는 동부해안 지역을 러시아 제국에 할양했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보았을 때 조선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1860년대 초부터 이뤄졌다. 사실 조선인들은 봄·여름에도 러시아 지역에서 벼농사를 짓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며 한카호와 우수리 남부지역에서 공공연히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1860~1870년대 기근으로 인한 식량난으로 한국 북부 지역의 많은 주민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찾아 두만강 너머 러시아 지역으로 건너갔다.

 

1869년에만 4,500명이 러시아로 이주하는 등 많은 이들이 이주하면서 1885년 러시아 동부지역에 20,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살았고 그중 우수리 지역에 8,800명이 거주했다. 1897년 이미 32개의 촌락이 형성하고 4개의 큰 조선인 마을이 생겼다. 1901년 해안지역에 32,000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게 되었고 조선과 접경지역인 프리모리 지역에서만 조선인 인구가 12,857명에서 32,380명으로 급격히 증가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렇게 온 이들 중 일부는 캄차카와 사할린으로 멀리 이주했고 그곳에서 농업·광업·어업에 종사했다.

 

1910~1921년 사이 조선인 46,064명이 러시아(소련)로 이주했다. 1923년 기준 소련 극동지역 전체 인구 중 17%가 조선인이었고 그 가운데 32.4%가 러시아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근처에 첫 번째 조선인 콜호스(소련 집단농장)가 형성되면서 사람들은 극동지역에서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26년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조선인 수는 52,000명이었다. 또한 1927년 소련 공식자료에 따르면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170,000명이었다.

 

  © 이인선 통신원

 

(2) 독립운동

 

1905년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점점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1907년에 조선 군대도 해체되면서 러시아로 이주한 사람들이 1906년 39,798명, 1907년 46,430명으로 늘어났다. 이주하는 주된 배경은 식량난 때문이었지만 1905년 이후부터 수많은 조선 의병들과 애국 지식인들이 고국을 떠나 만주와 러시아에서 일제에 대항해 투쟁을 벌이고자 이주하기 시작했다.

 

1910년까지 이렇게 이주한 사람의 대부분은 한국 북부에 있는 함경북도와 평안북도 지역 출신의 농부들이었다. 이들은 고향 땅에 만연한 식량난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1910년 일제와의 병합과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항일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러시아에 근거지를 찾으러 오면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소련 극동지역에서 항일 단체를 형성해 항일투쟁을 벌이려 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소련 땅으로 넘어오면서 1928년까지 172개의 조선인 학교가 설립되었고 여기에서 학생 12,420명이 수업을 받았다.

 

1900년대 무렵 러시아 지역에 생긴 조선독립운동 단체 중 대표적인 곳은 동의회다. 동의회의 설립은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이범진이 주도해 이뤄졌다. 그는 군수금 1만 루블과 함께 아들 이위종(1907년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을 보내 의병 활동을 추진할 조직을 결성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08년 4월 연추(일명 얀치헤 또는 시모노보,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하산스키 군 추카노보 마을) 지역에서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엄인섭 등이 발기인으로 나섰고 이들은 최재형의 집에서 수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총회를 열고 동의회를 결성했다. 회장에는 이위종이 선임되었고 최재형과 엄인섭은 각각 총재와 부회장을 맡았으며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본부를 연추 지역에 두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지회를 설립했으며 ▲교육에 의한 구국정신 함양 ▲실력 양성 ▲단체 조직에 의한 동포의 일심(一心) 동맹과 무장투쟁 등을 강조했다. 1908년 여름에 동의회 의병부대는 국내 침공 유격전을 벌여서 성과를 거두었지만 러시아 제국의 탄압과 조직 내부 갈등으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후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 마을에서 안중근을 중심으로 12인이 손가락을 하나씩 끊고 동의단지동맹(同義斷指同盟)을 맺으며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비롯한 침략 원흉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리고 안중근은 논의를 통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했다.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패망하고 소련이 세워진 이후 소련 지역에서 벌이는 항일운동단체들은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았으며 소련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홍범도다.

 

당시 소련 내 독립운동가들은 소련의 붉은 군대(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 또는 노농적군)와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소련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그 과정에 홍범도 장군도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으며 극동대회에서 고려혁명군 대표 자격으로 레닌(본명 :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인민위원장을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누며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권총 1정과 금화 100루블을 받기도 했다. 

 

홍범도 장군은 부하들에게 소련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무산자들의 공화국을 세운 나라이다, 그러니 우리가 도와주고 또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홍범도 장군이 1920년 12월 초 돈화현 양수천자에서 해산한 부대를 재소집할 때 작성한 전단에는 “지금 (러시아)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를 충분하게, 또 무기와 탄약은 제한 없이 무료로 공급받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소련은 왜 이주정책을 할 수밖에 없었나

 

1931년 일제가 만주를 공격한 이래로 소련 극동지역에는 긴장감이 높아졌다. 일제는 훈춘 출신의 친일 조선 청년들로 국경감시 중대를 조직해 소련·만주국 경계선에서 소련 사람들과 싸우게 했다. 일제는 이러한 공작으로 소련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증오하게 만들었다. 서대숙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극동지역 러시아인들은 일제를 등에 업은 조선인들이 러시아인들을 괴롭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소련 공민권을 받은 조선인과 그렇지 않은 조선인으로 나뉘면서 소련 정책·계획에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 내 조선인 거주자들이 주로 항일투쟁에 목적을 두고 있을지라도 내분이 격화해 일부 조선인들이 일제와 연합하지 않으리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측면에서 조선인들이 소련으로 오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소련 국경지대 근처 지역에 이들이 거주하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사할린 북부는 소련 영토였지만 북해도 위에 있는 사할린 남부지역은 일제가 점령하고 있어 언제라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소련 정부는 일제 간첩활동·선동파업을 비롯해 충돌 상황의 격화로 생길 문제를 우려했다. 결국 소련 정부는 불가피하게 1930년대 중엽 극동에 살던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집단 이주시키기로 했다.

 

1937년 9월부터 11월까지 극동지역의 아시아 이주민들은 중앙아시아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시기 조선인 172,500여 명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1937년 10월 25일까지 조선인 36,442가구, 171,781명이 우즈베키스탄(76.525명), 카자흐스탄(95.256명)으로 이주했다. 사할린 북부에서도 조선인 1,155명이 이주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제는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조선인 4,800,000명을 강제로 동원했다. 그중 조선인 1,530,000명이 일본, 동남아시아, 남태평양의 섬들과 사할린으로 끌려갔다. 일본 정부의 공식 진술에 따르면 1939~1943년 사이 최소한 16,122명이 사할린 남부지역으로 끌려갔고 대다수가 조선 남부 지방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사할린 남부지역이 소련에 복속되었고 이 시기 사할린 남부지역에 조선인 43,000~50,000명이 살았다.

 

▲ 타슈켄트 국립사범대 고려인 학생들.  © 이인선 통신원


해방 후 고려인의 선택

 

해방 이후 사할린·중앙아시아에서 살던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곧바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일본과 소련은 사할린 내 일본인의 귀환을 논의해 사할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 모두(300,000명)를 일본으로 돌려보낼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본인들이 강제로 동원한 조선인들에 대해선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이에 더해 이들은 둘로 갈라진 조국을 바라보며 남으로 갈 것인지 북으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강제 동원으로 오게 된 이들 중 남측으로 가고자 했던 이들은 스스로 ‘사할린 한인’이라고 불렀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일제 강제 동원으로 오게 된 사할린 한인 문제를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로 제기하지 못했다. 또한 단지 북한과의 체제경쟁 속에서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문제’를 비난하면서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을 꺼냈을 뿐 실제적인 행동은 없었다. 이러한 입장은 사할린 한인 문제를 식민지 지배 책임의 문제라기보다 냉전의 문제로 보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일본 또한 사할린 한인의 문제에 무관심과 무성의로 일관했다. 한국과 일본의 이러한 태도가 사할린 한인을 점점 잊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가 한국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66년부터였다. 하지만 이것도 일본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한 문제 제기라기보다는 시민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에 대한 일종의 면피성 대응과 일본의 ‘재일조선인북송문제’에 대한 대응적 카드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1964년부터 시작된 한일협정 반대 운동으로 위기에 빠진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반공과 반일 감정을 일으키는 기제로도 사용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국적과 사상의 벽에 가로막혀 고국으로의 귀환이 좌절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은 점차 주어진 자신들의 상황에 체념하며 살아갔다. 그러다 1990년대 소련 해체와 함께 한·러 관계가 수립되어서야 몇몇 이들은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북한은 곳곳으로 흩어진 동포들이 언제나 올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스탈린 서기장 시기 이주정책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해 그곳에 정착했던 고려인은 해방 후 중앙아시아에서 사할린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그동안 2세, 3세를 키우며 소련의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어 또한 익숙했으므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소련 공무원이나 교사 등으로 근무했다.

 

소련 정부는 북한과 조약을 체결하고 협력을 시작하면서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일부 고려인들에게 해방되었으니 조선 땅에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이들은 각 지역 당·공산주의청년동맹·콜호스·기업체·교육기관·군 등에서 일하며 풍부한 실무 경험을 쌓았고 1945~1949년 약 500명이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

 

북한에 온 고려인들은 정치·경제·교육·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조기천과 남일이다. 조기천은 1947년 서사시 ‘백두산’을 발표하며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이 되었다. 남일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로도 많은 고려인이 북한으로 온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

 

▲ 1979년 노동절 기념집회를 하는 고려인들.   © 이인선 통신원

 

조선에서 식량난을 이유로, 독립운동을 이유로 러시아 땅에 이주한 사람들은 결코 혼자서 살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을 꾸리고 척박한 땅을 개간하며 공동체로서 살아갔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서도 땅을 일구고 마을을 구성했으며 극장·학교 등 생활 시설을 만들어 살아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정착한 그들은 자신을 소련 사람으로 여겼고 지금은 러시아 또는 중앙아시아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다시 민족 정체성을 잇기 위해 고려인들이 한국에 마을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 예로, 조 바실리 전 러시아고려인연합회장은 2021년 5월 23일 러시아 모스크바 롯데호텔에서 박병석 국회의장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한민족이지만 우리를 소통해주는 언어는 러시아어”라며 “한국어로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매우 통탄스럽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한국으로 가는 고려인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와 관련해서도 “러시아 정부는 상당히 존경으로 대우해주는데 한국에선 고려인 청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며 “한국에서 일하는 고려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니 75% 이상이 ‘러시아로 돌아오고 싶다’라고 응답했다”라고 말했다.

 

고려인들도 이러한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고 다시 민족 정체성을 가지는 데 필요한 것은 통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KTV가 2014년 9~10월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거주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 통일 인식 조사에 따르면, 통일의 필요성에 86.4%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통일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선 응답자의 과반(57.1%)이 ‘민족 동질성 회복’을 꼽았다. 또한 배 파벨 모스크바청년고려인협회장은 앞선 박병석 국회의장과의 만남에서 “남북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은 지속할 것”이라고 밝히며 통일을 소망했다.

 

이에 우리도 고려인을 비롯한 많은 재외동포에게 관심을 두고 민족 정체성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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