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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들의 가슴을 울린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린다 모 재미동포 | 기사입력 2022/01/29 [18:54]

재미동포들의 가슴을 울린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린다 모 재미동포 | 입력 : 2022/01/29 [18:54]

▲ 지난 1월 22일 <우리학교와 함께 하는 동포 모임>의 주최로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미주 온라인 상영회가 있었다.  © 린다 모

 

지난 1월 22일 <우리학교와 함께 하는 동포 모임>의 주최로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미주 온라인 상영회가 있었다. 상영일이 가까워 올수록 매일매일 새롭게 관람을 위한 등록과 후원을 해주시는 동포들의 높은 관심에 운영위에서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해방 후 일본에 남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모국에 대한 애환과 자신의 민족성과 언어를 지키고자 했던 삶을 해외동포들은 물론이고 영어권인 2세들과 현지인들과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영어 자막이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는 청년 김철민이 2002년 금강산에서 열렸던 남북해외청년학생통일대회에서 만난 재일조선인에 대한 깊은 인상이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동기로 18년 동안 수없이 일본의 여러 지역을 오가며 재일조선인 1세는 물론이고 이들의 후세들까지 찾아다니며 그들이 어떻게 모국과 민족성을 지키며 사는지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일본 극우단체인 재특회 사람들이 우리학교에 몰려와 일본 아이들의 놀이터를 빼앗았다며 “조선인들은 바퀴벌레다” “김치 냄새나는 조선인이니,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며 야유하고 조롱하는 폭력적인 극우 행동을 보여주는 첫 화면부터 영화는 우리를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입시켜간다. 

 

조국은 북쪽, 고향은 남쪽…

 

해방된 후 조선인이 승리했다는 기쁨으로 조선에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으로 자녀에게 조선의 말과 글을 가르쳐주자고 세워진 조선어 강습소로 시작된 조선학교의 역사는 이제 70년이 넘었다.

 

강수향 교토 제3초급학교 조선3학교 교장 선생님은 18살, 고교 3학년 때부터 교원 생활을 했지만, 부족한 교원들 때문에 정년퇴직을 미루고 계시고, 교원들의 임금을 제대로 주고 싶은 게 교장 선생님의 소원이라는 말씀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사실 조선어 강습소로 시작된 조선학교는 선생님들의 자원봉사나 소액의 사례비로 시작하였고, 현재도 일반 일본학교 선생님의 60~7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학교의 선생님들보다 훨씬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자세로 어릴 때부터 우리 말과 노래를 가르치면서 조선인으로의 민족성을 가르치는 데 집중한다고 한다.

 

조선인 3세이신 박금숙 님은 조선학교 출신으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장애 아들을 조선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에 망설임이 있었으나 교원들과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조선학교에 입학시켰고, 초급학교부터 고교까지 교원들과 학우들의 정성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 학교와 교장 선생님을 너무 좋아한다며 눈시울 적신다. 또한 박금숙 님은 온라인으로 참여자들의 조선학교에 관한 질문에 “현재로서는 일본 전역에 65개, 약 5,000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고, 2010년 고교무상화제도에서 차별받은 지 10년 만에 약 3,000명이 줄어 들었디. 우리학교는 각종학교(운전 면허학원이나 어학학원) 수준이라, 졸업 후에 진학과 취업을 위한 준비를 따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이 일본 정부의 차별이 심해지면서 학교와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학교 차별반대 운동은 각 학교의 교원분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모두 거리에서 투쟁하고 있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현지 일본인들은 현재 상황이라고 이해하고 있지 않다. 조선학교가 줄어드는 이유는 재특회와 같은 차별과 공격도 있지만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과 학비에 대한 부담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까지도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조선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진학이나 취업에 대한 차별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더 큰 공격에 시달려야 하기에 일본 사회에 말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현지의 상황을 진솔하게 전달해주셨다.

 

2017년, 재일조선인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서 한청 사무실을 찾아 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조선사람으로 살기 힘든 마음을 서로 나누며, 민족교육을 받지 못한 조선인들이지만 고립적인 상태에서도 민족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우리의 말과 문화를 가르치는 일도 한다. 원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청년 조직이었는데 조국의 민주화, 통일운동을 한다고 민단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분단을 극복하고 한반도의 통일이 가장 시급하다며 한국의 정세 변화에 맞춰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청년다운 자신감을 보여준다.

 

▲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의 한 장면  © 린다 모

 

해방 이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의 삶은 어땠을까?

 

서원수 님은 조선인으로 조선총독부에 취직하셨으나 일본인과의 황당한 임금차별에 조국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후 고베 감옥에 수감 된 경험도 있으시고 해방 후 75년 만에 조국을 처음 방문하신 조선인 1세이다. 온갖 차별과 혐오 때문에 왜 조선인으로 사는지 회의도 많이 들었다는 부만수 할머니, 사천이 고향이라고 또렷하게 말씀하시는 강경남 할머니도 1세인데 생전에 통일된 조국, 하나 된 조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어르신은 젊은 활동가의 북장단에 맞춰 어린 시절 불렀던 해방의 노래와 조국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절로 나오신다.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님은 “부모님까지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처음부터 조선에서 왔고, 현재까지 조선인으로 살았다. 남한의 군부독재 역사를 배우면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면서 자신이 가고 싶었던 나라가 남한이라고 생각한 자신에게서 분단을 발견하고 스스로 충격을 느꼈고 이런 활동을 한 이유로 남조국(남한)의 방문 여권이 거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북조국(북한)을 방문해보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조선사람이라는 것에 천국을 경험한 것 같은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식민지 종주국(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은 현재까지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다. 조국이 통일되어 일본과 동등한 관계가 되어야 재일조선인들은 차별과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말씀은 모든 해외동포들도 동감할 것이라고 믿는다.

 

“중일 외교 이후 한청(재일한국청년동맹) 활동으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분단의 역사가 없었다면 모두 고향과 조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말한 김창오 선생은 “차별받기 때문이 아니라, 차별하는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투쟁하기에 당당하게 산다”라는 재일조선인 2세이다. 같은 2세인 강종헌 님은 분단 이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학교에 다니며 일본 이름을 썼지만 공무원도, 큰 기업에 취직도 하지 못하는 제한을 받으며 살았다. 이후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찾고자 연구하며 학업을 했다. 전태일 열사의 죽임에 충격을 받고 모국과 시대정신을 나누고 싶어서 모국유학을 선택했지만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간첩단>이라는 조작 사건에 걸려 모진 고문 후에 “간첩은 생존할 수 없다는 판결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고 13년 옥고를 치렀다. 수감 기간 조국의 모습과 현실 문제를 그대로 배울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않을 것”이라고 전한다.

 

캐나다에서 이번 상영회에 참여했던 박옥경 님은 “재일동포들의 가장 큰 문제는 민족성을 존중받는 것이다. 민족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를 바꿔내야 한다는 도덕성에 자부심을 갖는다. 한반도 전체가 자신의 나라다,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는 사람으로 통일된 조국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 강종헌 선생의 심정을 이해한다며 영화에 나오는 많은 분이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차츰 알아가면서 조선말을 배우며 조국을 찾은 과정이 눈물겹다는 이메일을 주셨다. 

 

일본인처럼 살아도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는 이동석 님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누구인가’ 고민하다 자신의 조국을 알고 싶어서 모국유학을 강행했는데 <일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사람의 자존심과 인간성을 말살할 정도로 받은 고문은 기억도 언급도 하고 싶지 않다며 출옥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철 선생 또한 모국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고난 겪은 분으로 “결혼식을 앞두고, 혹독한 고문을 견디기 어려워 경찰이 시키는 대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약혼녀와 함께 13년의 수감생활을 했다. 수감 당일의 충격으로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자식으로 평생의 죄가 되신다”라는 말씀은 보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런 간첩 사건에 연루된 재일동포의 수가 130여 명에 이르며, 사형이나 무기형을 받고 출소한 피해자들은 ‘재일 한국 양심수 동우회’를 만들고 2015년부터 재심 운동을 벌여 40년 만에 재심 법정에서 35분이 무죄를 선고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유학생 간첩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 모두 만나 잔치를 벌이며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은 판결을 서로 축하하고 현재까지도 한국의 양심수들을 후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상영 중에 올라오는 이분들에 대한 격려와 이전엔 미처 몰랐다는 사과와 앞으로 배워 나가겠다는 동참의 메시지가 동시다발로 뜬다.

 

조선학교는 민족성을 갖지 못한 조선사람이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에 대한 자긍심, 자존감을 지킬 수 있어서 학교의 중요성이 있다는 김창오 선생의 말씀이 얼마나 절실한 말씀인지 실감 났다. 졸업생은 물론이고 재학생들도 후배들의 교육 권리를 찾기 위해서 도쿄 일본 문무문화성 앞에서 “우리학교는 우리들의 고향이다”, “ 조선학교 차별반대”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간절한 마음에 우리들의 속도 탄다.

 

영화 상영회가 끝나고, 엘에이에 사시는 윤은영 회원의 자녀인 Deborah, David와 Diana는 자신들과 같은 청년의 나이에 조국을 찾았다가 젊은 나이에 사형수로 무기수로 살다가 나와서도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활동한다는 어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런 영화를 볼 기회를 준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주었다고 전한다. 무엇보다 초급학교 앞에서 극단적인 인종차별적인 공격을 하는 재특회에 충격을 받았다고도 한다. 또한 Leah Kim님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조국이지만 정작 떠나온 사람들에겐 영원한 짝사랑의 대상인가보다’는 메시지를 주었다. 재일조선인과 우리학교는 물론이고 한청련, 민단 등 모든 재일동포의 이야기를 다각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진 부분이 좋았다고 전해주신 한미나 님과 워싱턴에 사시는 양현승 목사는 “내일의 통일을 위해 오늘 ‘조선인’으로 실천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가 끝까지 마음을 사로잡았다”라고 한다.

 

장난기 잔뜩 어린 학생들이 서울에서 와서 자신들을 인터뷰하는 김철민 감독을 신기해하면서도 자신들의 고향이 어디라고, 한반도 지도를 짚어주며 깔깔대고 웃는다. 5년 전 이바라기 학교에서 내가 직접 들었던 학생들의 노래처럼 우렁차고 자신감 넘치는 아이들의 맑고 밝은 노래가 참여자 모두에게 통일된 조국의 미래를 보장한 긍정의 힘을 선물 받은 큰 기쁨을 주었다. 

 

▲ 온라인으로 진행된 재미동포와 감독과의 대화 한 장면.  © 린다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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