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금주 선생에 대하여

양은찬 | 기사입력 2022/04/18 [10:29]

[기고] 이금주 선생에 대하여

양은찬 | 입력 : 2022/04/18 [10:29]

양은찬 선생이 지난해 12월 12일 작고한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에 대한 회고, 추억, 추모의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합니다. 양은찬 선생은 김양무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부의장(2000년 1월 26일 작고)의 아내입니다. 

 

지난해 타계한 이금주 회장은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초대 회장을 맡아 30여 년간 일본 강점기 시절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한길을 걸어왔습니다. (편집자 주)

 

▲ 이금주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아래 맨 왼쪽이 이금주 선생이고 사진 아래 오른쪽이 양은찬 선생이다. 

 

 

이금주 선생에 대하여

 

여고 시절부터 대학 졸업 후 완도 음악 교사 발령을 받을 때까지 나는 광주 월산동 성당 반주자였다. 이금주 선생과 최순덕 선생이 한 울타리 신자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서 특별한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젊은 성가대원이 아닌 어르신들이라서 특별히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으나, 두 분의 봉사활동 기억은 인상적이다. 민족 역사에서 크게 이름을 남긴 두 어르신의 인연이 나의 10대 때부터 시작된 것은 그분들의 운명과 맞물린 내 앞날이 톱니바퀴로 함께 돌아간다는 거였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해당한 역사이기도 하지만, 내게로 이어지는 쓴맛의 미래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양무와 백년가약을 맺은 장소로서도 월산동 성당은 내게 특별한 곳이다. 

 

이금주 선생의 생활 터전은 성당 오르막길 다다른 곳에 입구에 조그맣게 지어진 사무실이었는데, 아들 내외와 손녀 손자 모두 함께 생활하셨다. 유리 샷시문을 밀면 사무실이고, 방 한 칸이 딸려 있다. 뒤쪽엔 잡초가 무성한 진흙땅과 맞물린 시멘트벽에 창문이 보이지 않았다. 성당에 갈 때마다 거쳐 가는 곳이기에 누구나 아무 때나 이금주 선생의 생활을 접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본인을 소개하시면서 하는 말씀 중에 “한번 잠들면 깊이 잠드신다”라는 점을 인지시켜 주셨다. 아들 내외의 사생활에 크게 방해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었다. 

 

선생은 성당 교인들의 생활 터전을 위해 신용협동조합 운영하실 만큼 능력 있는 분이었다. 우리 엄마를 비롯하여 어려운 일상생활을 의논하러 오는 신자들이 더러 있었고,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운영으로 오랜 세월 조합을 키워나가셨다. 다부진 입술에 넓은 이마, 말씀 자세며 외모 어느 부분도 흐트러진 적이 없어서 함부로 다가가기 어렵다. 비녀 꽂은 검은 머릿결은 바뀐 적이 없고, 한복이 아닌 일상복 차림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성당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매우 친근하게 지냈다.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귀한 시절이라, 신부님은 미사 시간에 나를 성당의 보배라고 추켜세워준 적도 있다. 수녀님들도 나에게 목걸이나 손수건 같은 선물도 주셨다. 내 연주회 때는 교우들이 홀을 꽉 채워주실 만큼 애착을 보여주었는데, 다정다감한 기억 중 어느 부분도 이금주 선생과는 연관되지 않은 채 세월이 흘렀다. 

 

▲ 1979년 5월 18일 광주 시민회관에서 피아노를 치는 양은찬 선생.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분을 우연히 길에서 뵙게 되었는데. 애착 관계가 특별하지 않은 상태라 반가움보다는 어색했다. 내 옷매무새가 혹시 어긋나 보이지는 않나 살펴보게 된다. 그러한 분을 운명의 세월 속에서 기어이 만나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범민련 사건으로 남편 김양무가 감옥에 들락거리면서 병든 몸이 되었을 때, ‘가족보안법(남편의 활동을 반대하는 본인 모습의 표현-편집자)’을 휘두르던 나는 조금씩 마음 문을 열고 그의 세계로 동행해주었다. 회오리바람 같은 현실 속에서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시기에 이금주 선생과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다. 선생은 내가 이전에 알던 완고하고 어렵기만 한 분이 아니었다. 타고난 품성과 홀로서기 세월 속에서 성장해 온 자존감이 우아한 품격 속에서 접근 금지 분위기를 뿜어냈던 거다. 

 

김양무와는 언제부터 만남이 이뤄졌는지 모르지만, 양심수 후원회원들이 나에게 병든 남편을 잘 보살피는 지혜로운 아내라고 칭찬을 해주었는데, 바로 내 옆에 계신 분이 월산동 성당의 그분이었다. 그분이 얼마나 애틋한 분인지 감탄한 대목은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김양무에게 병문안 차 와주셔서 그를 대해주던 모습이었다. 최순덕 선생의 ‘내 몫까지 안아주고 오라’는 부탁 말씀을 곧이곧대로, 누워있는 김양무를 따뜻한 체온으로 품어주셨다. 남북해외 3자 연대 투쟁은 김양무 최순덕 이금주와의 교감을 더하여 현재와 과거와 미래 연대로 이뤄내는 거였다. 민족의 미래를 위한 싸움터에서 김양무는 아픈 과거사에서 외로이 투쟁하고 계시는 인물들을 발굴해냈다. 근대사 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외세와의 자주권 투쟁에서 현재를 극복하고, 미래의 승리를 창출해내야 하는 숙제를 실천하는 거였다. 김양무는 젊은 일꾼들에게도 명절 때라도 꼭 찾아 봬야 할 분들이라고 말해왔다. 

 

2,000년 1월, 내가 새내기 과부로 진입했을 때, 우리 집에서 최순덕과 함께 만난 자리에서 과거사 집필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 셋이 과부 3총사가 되었네요.”

 

웃음 많으신 최순덕 선생에 비하면, 근엄한 세월의 얼굴 이금주 선생. 그 표정이, 그 눈빛이 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심란하고 맘 아플 때면 농담을 하면서 감정을 삭이는 편이다. 그분들은 자주 웃어주셨고, 나를 안아주셨다. 

 

최순덕 백지동맹 사건 바르게 정립하기 작업을 마치면 이금주 선생 전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백지동맹 사건을 몇 년에 걸쳐 인쇄작업을 마치고, 나는 광주를 떠나게 되었다. 최순덕 선생은 수십 년간 손에 끼던 반지를 내게 주셨다. 함께 나주역, 전남여고 교장실, 교무실, 화단에 기념식수 식립회도 참석하고, 몸 아픈 회원들 자택도 방문하고, 동창회장 근무처인 소아과 병원 원장실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태평양 유족회 사무실, 회원 가족 장례식장 등 함께 한 추억들이 많다. 

 

그때의 다짐을 되새기며 오늘에서야 이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죄송하고 부끄럽다. 어느 날 나는 선생께 한 가지 제안을 했다. 88세 되는 날 오후 8시를 축하해드리겠다고. 그리고 2007년 88세가 되는 해 8월 8일, 나는 케이크를 들고 오후 8시에 맞춰서 갔다. 잊고 계셨다가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주셨다. 그다음 99세 9월 9일 아홉 시에 축하해드리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버렸다. 100세가 되는 해 10월 10일 열 시에 축하해드리지 못하고 영영 기회를 놓쳐 버렸다.

 

▲ 이금주 선생.

 

이금주 선생은 일본을 상대로 여섯 건의 재판을 진행하고 계셨다. 모국이 품어주지 않는 세월을 이 앙다물고 버텨내셨다. 휠체어로 이동하는 나리타 공항의 이금주 소식이 전국에 방영된 적도 있다. 하와이 모래밭에 위령들과 조우한 사연들. 서울에서는 일본 대사관으로, 일본에서는 법정으로 열정적 행군을 이뤄내셨다. 대한민국 아스팔트 도로에서 적으로 대항하는 대한민국 경찰들과 투쟁하느라 늙을 시간이 없어 보였다. 힘을 보태줘야 할 당사자들이 몸을 피하고, 젊은 세대들은 관심조차 없는 세월 동안 힘겨운 삶을 이어오셨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이 현재의 삶인데, 대중은 과거사로 덮어놓고 외면해왔다. 외로움 무게까지 안고 뛰어다녔다. 전투에서 물자 부족은 물리적 난관이지만, 대중의 외면은 화학적 형벌이다. 이 고독한 현실에 김양무의 지지를 얻어낸 거였다. 외로운 싸움터에서 온기를 회복한 최순덕은 지갑에 김양무 사진을 품고 다녔다. 내 앞에서 그 사진에 입맞춤으로 애정을 보여주셨다.

 

스물넷에 남편을 여읜 딸 이금주에게 친정어머니는 “어서 늙으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혼례 풍토에는 전쟁터로 끌려갈 일 없는 신체조건을 갖춘 신랑감이 최고 인기였다고.

 

이금주 선생은 대한민국 국회의원 몇백 명보다 크게 일하셨다. 대통령 스무 명을 다 합해봐도 이금주만큼 역량 발휘를 못 했다. 오히려 데모한다고 잡아 가두고, 적 두둔하기에 바빴다. 언론은 그런 정부의 몸종이다. 희생자의 미망인 신분으로 싸움터에 나온 분들이 거의 없어서 외로움 달래기 위로 주고받기 등 동지애를 기대하기는 사치였다. 

 

한번은 일본에서 전쟁 반대 단체를 운영하는 기자가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러 한국을 방문했는데, 내 차로 봉사해달라는 부탁을 하셔서 함께 하게 되었다. 일본 대중에게도 본국의 역사가 부끄럽다는 것이다. 우선 식당을 정해놓고 대기하면 인터뷰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그분 자택에서 나와서 식당에 좌정했다, 음식이 나오는데도, 주인공이 나타나 주지 않았다. 밥상을 미뤄놓고, 그분 자택으로 재방문하고 설득하고 인터뷰 안 해도 좋으니 밥이라도 함께 먹자고 했다. 바닷바람 추운 날 이토록 어려운 여정을 반복하면서 밥맛도 씁쓸했다. 선생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 듯하다. 젊은 기자를 자택에 재우고, 아침엔 본죽에서 특별 메뉴를 주문해주셨는데, 많이 먹지도 않는다고 속상해하셨다. 

 

언론인 외에도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들이 수없이 많았다. 선생의 활동 열정이 알려지면서 대중적 단체가 협력해주고, 일본 변호사들이 선생을 도와 재판의 변론을 맡아주었다, 그분들이 방문할 때면 숙식, 회식 등 다양한 문제들을 감당해내셨다. 정부청사 부서에서 담당해주면 좋을 일을 피해 당사자들이 이뤄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운데, 고품격 인품에 유창한 일본어까지 적재적소에 활용하셨다. 작은 승리부터 성취해내는 이분이 기쁘게 웃는 날이 올까? 아련한 희망을 그려보면서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은 숙연해졌다.

 

피해자 유가족들을 설득해서 회원 유지하기, 회비 확보하기, 숨은 가족 찾아 싸움터로 끌어들이기. 본인이 피해자의 후손인지조차 모르는 분들을 찾아내서 역사적 사건을 되짚어보도록 인도하는 일도 이금주 몫이었다. 노동자로 끌려갔거나, 전장으로 끌려간 남녀 희생자 가족들은 그나마 호응도가 좋았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을 투쟁 전선으로 끌어내는 일은 험난했다. 자손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고, 수치스러움까지 감당할 수 없다. 설득을 거듭하고, 약속을 잡고, 쌓인 업무를 젖혀두고 만나러 갔다가도,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어 거절당하는 모욕도 감당하셨다. 그렇게 어려워하는 분들과 만남을 이뤄내는 것부터가 승리의 첫 단계다. 

 

그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단체는 유지될 수 있었고, 그 선두에서 이금주 선생의 지혜와 용기와 끈기가 첫 승리의 계단을 쌓아낸 거였다. “윗돌 빼서 아랫단 받치고, 아랫돌 빼서 윗바람 막고”. 단체 운영을 해내면서 외로운 속앓이를 해온 금전 출납부는 민족사의 보물로 모셔져야 할 것이다. 그분 행적의 일거수일투족 투명한 금전 출납부와 더불어 그분의 고무신! 안 보이는 길을 헤쳐나가고 때로는 모욕을 받기도 하고, 그런데도 매 순간 좌절하지 않은 발자국을 민족의 유물로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투쟁하고 돌아온 집엔 태평양 전쟁 희생자 유족회 간판이 붙어있고, 잠근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끈에 달려있어서, 한두 번 와본 사람은 벨을 누르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다. ‘보살 같은’ 자부와 아들 가족들은 아래층, 선생은 퐁퐁 계단을 딛고 2층에 계신다. 노인들이 많이 다니는 곳인데, 퐁퐁 구멍 알루미늄 계단에 눈이 얼어붙은 날은 젊은 내가 내딛기에도 아슬아슬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그 계단을 수십 번씩 오르내리며 며느리는 손에 쟁반을 들고 시어머니와 방문객들까지 극진히 챙겼다. 손녀 김보나가 일본 정부의 사죄를 위한 국도 걷기 대행진을 부산에서부터 개최하는데, 그 더운 여름 내가 엄두가 안 나서 거절을 한 기억은 오랜 세월 부끄럽다. 

 

죽음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김양무의 죽음도 현재형이고, 일제 총받이 조선 남자들도 현재의 일이다. 과거사 사죄받아내기, 대한민국 정부 앞장세우기, 남과 북 이간질 세력 화해로 전환하기, 한미 간 갈등 잠재우고 자주권 찾기. 이 모든 숙제를 거쳐서 승리를 이뤄내면, 그분들의 죽음이 과거사답게 묻혀도 되는 것이다. 잡히지 않은 승리를 한 걸음씩 일궈내신 분. 그분은 가셨지만 이뤄내야만 하는 마무리 승리가 우리 앞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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