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맥경화에 빠진 글로벌 공급망
박진 외교부 장관은 오는 21일 열릴 한미정상회담에서 다룰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가 글로벌 공급망 관련 한미 경제안보 협력이라고 밝혔다.
12일 오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 장관은 “글로벌 공급망이 지금 많이 변화하고 있고, 또 교란되고 있다”라며 “여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경제안보에 중요한 조치들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한국과 미국이 이러한 경제안보 분야에서 어떠한 협력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깊이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글로벌 공급망 문제에 대해 거듭 관심을 보여왔다.
윤 대통령은 10일 취임사에서 세계적 난제 가운데 하나로 “교역 질서의 변화와 공급망의 재편”을 꼽았으며 16일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공급망의 블록화라는 새로운 흐름” 속에서 한국의 대외 여건이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글로벌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이란 제품의 설계, 부품과 원재료의 조달, 생산,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각 과정이 다수의 국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국제 분업체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화이자는 코로나 백신을 19개국 86개 공급처가 제공하는 280개의 요소를 활용하여 만든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글로벌 가치사슬이 공정별 부가가치를 누가 얼마나 가져가느냐를 따지는 경제적 개념이라면 글로벌 공급망은 제품 생산의 전체 흐름에 초점을 맞춘 정책적 개념이다.
이런 국제 분업체계는 1990년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본격화하였다.
원래 세계 경제를 이해하는 데서 글로벌 가치사슬에 주목했지만 현재는 글로벌 공급망이 더 중요한 개념으로 주목받는다.
윤 대통령이 글로벌 공급망 문제를 언급한 것은 미-중 무역전쟁, 코로나19 사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최근 몇 년 간 세계적인 물류 흐름에 동맥경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2010년대 들어 글로벌 공급망 위축이 시작되었다고 진단한다.
한국도 2019년 한일 경제전쟁으로 인해 반도체 소재 난을 겪었고 지난해는 요소수 사태로 화물차 운송난을 경험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시멘트 공급난, 식용유 대란 등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세계 각국도 글로벌 공급망 위축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호소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냉전 회귀
그렇다면 윤 대통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미정상회담에서 어떤 대책을 세우려는 것일까?
일단 취임사와 시정연설을 통해 예측해보면 이 문제를 이념 문제로 접근해 반중·반러의 입장에서 철저히 미국에 의존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무려 35회나 외쳤는데 이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즉 사회주의 중국과 이른바 “군사력에 의한 불법 행위”를 저지른 러시아를 반대하는 차원이었다.
즉, 이념을 넘어 실용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자유의 가치”에 입각해 이념 대결, 체제 대결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세계화의 물결이 세계를 휩쓴 1990년대로 돌아가보자.
소련과 동구권은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자본주의권에 편입되었고 중국 역시 자본주의 경제 요소를 받아들여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추진하였다.
러시아는 세계적인 석유, 천연가스, 석탄, 밀 수출국으로 막대한 에너지자원과 원자재를 자본주의 시장에 공급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어 제조업 세계 점유율이 30%에 달한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중국에 공장을 가지고 있다.
즉, 지금의 세계 경제는 중국, 러시아와 밀접히 얽혀있어 분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 세계 경제에서 중국, 러시아가 차지하는 영향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 카드를 꺼내들었다.
한 마디로 중국, 러시아를 세계 경제에서 고립시키고 나머지 국가들끼리 협력하자는 것으로 사실상 냉전 시대로 회귀하자는 것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명분으로 러시아를 봉쇄하고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중국을 봉쇄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현실에서 이미 불가능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미 세계 각국이 중국, 러시아와 경제적으로 밀착해있어서 이제는 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당장 러시아를 고립시키기 위한 천연가스 제재를 두고 유럽연합이 난색을 표하며 사분오열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이 중국 봉쇄의 가장 큰 우군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인도 역시 미국이 야심차게 꺼낸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불참하고 있다.
세계 각국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빠져 허우적대는 미국을 바라보며 과연 미국과 한 배를 타는 것이 현명한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런 미국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윤석열 정부가 편승하는 것은 난파선에 자진해서 올라타는 꼴이다.
실체가 없는 IPEF
윤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이번 주에 방한하는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를 통한 글로벌 공급망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IPEF는 미국이 지난해 10월 제안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포괄적 경제 협력 구상체로 반중 연대 성격을 띠고 있으며 현재 미국,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아세안 일부 등의 참여가 거론되고 있다.
반중 안보협의체 쿼드(QUAD) 국가인 인도의 불참은 IPEF의 실효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또, IPEF가 어떤 식으로 중국 경제를 견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미국도 뚜렷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IPEF 가입을 강행할 경우 중국의 강력한 반발을 각오해야 한다.
지난 10일 윤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시진핑 국가주석의 특사 왕치산 국가부주석은 윤 대통령에게 “양국 간의 산업 공급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한국의 IPEF 가입 움직임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16일에는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박 장관과 화상 통화에서 한국의 IPEF 참여를 “반대한다”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압도적 1위 무역상대국인 중국과 경제적 대립을 할 경우 우리 경제에는 재앙이 되리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이에 대해 상당히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박 장관도 앞에 언급한 기자회견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경제 프레임워크는 어느 한 나라를 겨냥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렇기 때문에 중국과 직접적으로 이해 상충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또 윤석열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 외교가 국익과 충돌할 경우 어떻게 조율할 것이냐는 물음에는 “한국의 입장이 일관된 어떤 가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국익과 부딪치는 면도 있을 수 있다”라며 중국과 경제전쟁도 피하지 않을 뜻을 내비쳤다.
재계는 IPEF 가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하기 어렵다며 긴장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23~24일 일본 방문 중에 IPEF를 공식 출범시킬 것으로 보인다.
안보에서 한일 군사동맹이, 경제에서는 IPEF가 윤석열 정부를 몰락시키는 요인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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