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반도 개입 역사④

진보당 권오창 고문 | 기사입력 2022/05/25 [07:01]

미국의 한반도 개입 역사④

진보당 권오창 고문 | 입력 : 2022/05/25 [07:01]

(앞 글에 이어)

 

미군정 4년을 몇 개 분야로 나누어 간단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 정치

 

민중들은 이미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발전한 인민위원회를 위시하여 1945년 10월까지 노동조합(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평), 농민조합, 민주청년동맹, 민족통일전선(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정치세력들은 전체 민중의 지지를 받아 해방 이후 역사적 과제인 민족해방, 계급해방의 과제를 충실히 달성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민중들의 변혁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친일파와 지주, 자본가를 하수인으로 내세워 소위 우익정치단체를 급조해냈고 지원해주었다. 

 

우선 9월 미군 점령과 동시에 친일파와 친미파 세력인 김성수(1891~1955)와 송진우(1890~1945) 무리를 필두로 한국민주당을 결성시켰고 또한 이승만(1875~1965)을 중심으로 독립촉성국민협의회(독촉)를 만들어 모스크바3상회의를 계기로 해서 좌와 우가 찬탁반탁 정국으로 팽팽히 맞서게 만들었다. 

 

친일경찰 출신으로 경찰이 결성되어 조병옥(1894~1960)을 미군정 경무국장에, 장택상(1893~1969)을 수도경찰청장에 임명하였다. 

 

또 미군정 자문기구로 친미친일 전력을 가진 우익들로 11인의 고문회의를 구성하였다. 

 

곧이어 남조선과도입법의원(1946.12.12.), 남조선과도정부(1947.2.5.)가 군정기관으로 설치되었으나 친일파와 친미세력으로 구성되어 군정을 합리화하는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하였다. 

 

그 외 서북청년단(문봉재), 대한민국청년동맹(유진산), 대동청년단(이청천), 민족청년단(이범석) 등 우익단체들을 조직하여 민중운동에 대한 폭력적 테러에 동원하였다. 

 

(2) 국방

 

해방 직후 우익진영에 대한국군준비위원회(유동열), 대한민국군사후원회(조성환) 등의 군사조직이 생기고 좌익진영에서는 인민공화국의 군사기구로 국군준비대(총사령 이혁기, 부사령 박승환), 조선국군학교(김원봉)가 창설되었다. 

 

이 중 좌익진영의 군사기구는 미군정이 해산시켰다.

 

이후 미군정 법령에 의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1946.1.15.), 군사영어학교(1945.12.5.)가 창설되었다. 

 

민중탄압기구로 미군방첩대(CIC)가 적극 활동하였고 미 육군 범죄수사대(CID)도 악질적으로 민중을 탄압하였다. 

 

국방경비대 지휘관은 만주군 출신(원용덕), 일본군 출신(이응준) 장교로 구성되었다. 

 

국군의 무력증강은 트루먼의 특사 웨더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1897~1989)의 자문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그리고 군사고문단장은 로버츠(William Lynn Roberts, 1935~1968)가 맡았다. 

 

(3) 경제

 

미군정은 우선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신에 신한공사를 설치하고 적산(미군이 몰수한 일제의 재산)을 이용하여 매판자본을 육성하였다. 

 

이런 매판자본은 미국에 의해 잉여상품 처리 중개자, 자본침투의 안내자, 자원약탈과 군수품의 현지 조달자 역할을 하였다. 

 

오늘의 재벌인 삼성(이병철), LG(구인회), SK(최종현), 현대(정주영) 등이 모두 미군정의 비호 아래 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오늘까지도 이 재벌들이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제헌국회는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발표하였으나 신식민지 수탈체제의 기본인 반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의 확립을 위해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전쟁 중에 국민을 기만하기 위해 겨우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주-소작 제도가 그대로 온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반봉건체제 유지를 더욱 강하게 남기는 방향으로 실시되었다. 

 

(4) 영구예속 조약

 

미군정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까지 권력을 이양했으며 이후 대한민국 정부 군사·정치 고문으로 남아있다가 1949년 6월 철수하였다. 

 

그러나 한국을 계속 예속하기 위하여 여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① 대한민국 대통령과 주한 미군사령관간에 체결된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1948.8.24.)

 

이 조약 제1조에는 “주한미군 사령관이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자기 작전권 내에서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군을 계속하여 조직, 훈련 및 장비를 관할할 권리를 가지며…”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미국이 국군통수권을 무한정 가진다는 것으로 예속성을 유지하겠다는 의도다. 

 

제2조에는 “한국군의 작전통수권은 미군사령관이 보유한다”라고 규정되어 작전통수권을 미국이 완전히 장악하게 만들었다. 

 

② 경제 및 군사원조에 관한 한미간 합의의사록(1954.11.17.)

 

합의의사록 2항은 “대한민국 국군을 유엔사령부의 작전지휘권 아래 둔다”라고 명시하였다. 

 

③ 한미상호방위조약(1954.11.18.)

 

이 조약 4조에는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라고 하여 우리 국토를 미국이 완전히 조차(租借·특별한 합의에 의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 기간 통치하는 일)하고 있고 이 조약 6조에는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라고 명시하여 주한미군 영구주둔을 못 박았다. 

 

④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1949.1.18.)

 

1조에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일체의 권리 이익을 한국에 이양한다고 해 놓고는, 11조에 가서 군정 시 과도정부의 일체의 현행 법률, 법령 및 규칙을 전적으로 계속 시행할 것을 협약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규정은 한국정부가 미군정 3년 동안에 꾸며진 500여 건에 달하는 군정법령을 시행하라는 규정이다. 

 

이 조약에 의하면 우리는 자주권이 전적으로 유리되는 것이다. 

 

* * *

 

우리 국민은 자주권을 빼앗은 미군정 통치에 항의하여 1946년 ‘10월 항쟁’을 일으켰고, 1947년 2월 7일 ‘단선반대 구국투쟁’을 진행했다. 

 

전국적 항의가 거세지는 가운데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하고 남로당이 탄압을 받았으며 제주 4‧3항쟁, 여순항쟁으로 이어졌다. 

 

나중에는 김구 선생이 암살(1949년)당하고 민족수난을 겪는 가운데 이승만이 통치능력을 완전히 상실, 한국은 내전상태로 돌입하게 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 요인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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