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이 9월 19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다.
엘리자베스 2세는 무려 70여 년간을 재임한 영국 국왕으로 대영제국의 살아있는 식민주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은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아일랜드섬의 북부)의 연합왕국으로 입헌군주국이다.
아일랜드는 1171년 영국 헨리 2세에 정복당한 이후 수탈과 억압에 시달리면서 영국 지배를 받다가 결국 1801년 병합된다.
이후 1922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할 때까지 750여 년간 극악한 식민 지배를 당했다. 1922년 독립전쟁 끝에 남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이 되나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이 유지돼 남북 분단이 된다.
그리고 영국령으로 남았던 북부의 얼스터 지역 6개 주가 북아일랜드다.
당시 독립전쟁 전후 영화로 좌파 감독인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지미스 홀’이 있다.
아일랜드는 남북 분단 이후 한반도처럼 내전과 국제전을 겪지 않았고, 남북의 대립도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남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1949년 영연방을 탈퇴해 ‘아일랜드공화국(Repubilc of Ireland, 게일어로는 에이레[Eire])’으로 독립한다.
그러나 북아일랜드는 달랐다. 북아일랜드는 신‧구교 종교와 체제 갈등이 심각하면서 독립과 남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결국 북아일랜드에서는 얼스터 민병대(Ulster Volunteer Force, 개신교)와 아일랜드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IRA], 가톨릭) 간의 분쟁으로 1969년부터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인 ‘성금요일 협정(벨파스트 협정, 1998년 4월 10일)이 타결된 1998년까지 3,500여 명 이상이 숨졌다.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 통치와 북아일랜드의 남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위한 투쟁은 우리의 일제강점기 역사와 그리고 분단과 통일 투쟁역사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만행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어 교육과 조선어 말살 정책처럼 영국은 아일랜드의 자국어인 게일어 사용을 금지하고 말살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을 구실로 조선의 토지를 수탈한 것처럼 영국은 본토에서 이주해온 개신교 대지주를 이용하여 토지를 빼앗고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을 소작농으로 만들어 곡물을 수탈했다.
조선인의 주식이 쌀이라면, 아일랜드인의 주식은 감자였다. 그런데 1847년 감자 역병으로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이 발생해 100만여 명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아일랜드의 인구수는 대기근 전에는 800만 명을 상회했다. 그런데 대기근 시기에 100만여 명이 아사하고, 100만 명이 기근을 피해 이민을 가 기근이 끝날 시점에는 총인구수의 25%가 없어졌다고 한다.
대기근 참사는 아일랜드의 반영국 감정과 투쟁의 기원이 된다.
특히 북아일랜드 영국령에서 일어난 신‧구교 종교와 체제 갈등은 유혈 분쟁으로 이어졌다.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무지막지한 차별
북아일랜드 인구의 약 60%를 차지하며 영국에서 이주해와 지배층이 된 자본가와 개신교 합병주의자는 영국과의 분리 반대와 영국 통합을 지지했다.
그러나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는 원주민 가톨릭 민족주의자와 공화주의자는 독립과 남부 아일랜드공화국과의 통일을 지향했다.
영국의 무지막지한 차별은 북아일랜드의 주요 산업인 조선업 고용에서 나타나는데, 조선업 종사자의 95% 이상을 개신교도가 차지하였다.
가톨릭교도는 공립학교 입학을 하지 못했으며, 가톨릭교회 학교에만 입학 되었다. 가톨릭 학교에 가야 했던 아이들은 개신교도 지역을 지날 때 오물과 돌을 넣은 풍선 투척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공공임대주택 입주에도 차별이 있었고, 지방선거는 집주인에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집이 여러 채 있으면 여러 곳에서 투표할 수 있었는데, 무주택 가톨릭교도는 투표권이 없었다.
북아일랜드인은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의 조선인과 같았다.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만행
영국은 「비상권한법」(1922-1972)을 만들어 영장 없는 수색과 재판 없는 투옥을 저질렀다. 또 시위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하는 등 가톨릭교도가 소수라는 것을 악용해 온갖 핍박을 하였다.
마치 박정희의 긴급조치와 유사한 법으로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영국이 개신교 합병주의자를 지원하면서, 북아일랜드의 양대 세력은 모두 자체 무장 조직을 가지면서 충돌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30년 북아일랜드 분쟁의 서막인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데리(Derry) 시위이다. 영국 공수부대는 개신교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행진하던 비무장 가톨릭교도를 폭도로 간주, 강경 진압과 총격을 해 14명(7명은 10대 청소년)을 죽였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영국 검찰총장은 이 사건을 조사하고 ‘위드게리 보고서(Widgery Report)’를 발표한다. 보고서는 영국군의 행위가 불법 시위를 진압한 것에 불과하고 시위대 측에서 먼저 총을 쐈기에 영국군의 행동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정부를 옹호하며 오히려 진압 작전을 펼친 영국 지휘관에게 기사 작위를 부여하였다.
마치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간 5.18광주민중항쟁을 연상케 하며, 엘리자베스 2세는 아일랜드의 전두환과 같았다.
당시 협박과 고문 그리고 누명을 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아일랜드 출신 짐 쉐리단 감독의 ‘아버지의 이름으로’이다.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30년간 지속된 IRA 투쟁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피의 일요일’ 사건 유족과 청소년들이 가입하는 등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 가정에서 한 가구당 한 명 이상이 성원으로 참가한다.
초기에 IRA는 개신교 자경단 등 개신교 과격단체로부터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IRA는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전략을 선회해 영국 본토 무장투쟁 테러를 전개한다.
대표적인 것이 1979년 루이 마운트 배튼 백작(엘리자베스 2세의 시외숙부)이 탑승한 요트 폭탄 테러이다. 이 테러로 배튼 백작을 포함해 7명이 사망했다.
1979년 집권한 마가릿 대처 영국수상은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없다”라며 “정치적인 살인, 폭파, 폭력이란 것은 없다. 오직 범죄행위의 살인, 폭파, 폭력만이 있을 뿐”이라고 강경 대응을 한다.
이후 IRA 수감자의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옥중 단식 투쟁에 나선 27세의 바비 샌즈가 66일간(1981년 3월 1일~5월 5일)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한다. 그리고 이어진 집단 단식 투쟁으로 9명이 더 사망한다.
수감자들은 영국 정부의 강경 대응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또 다른 투쟁에 나선다. ‘죄수복을 입지 않을 권리’, ‘노역에 동원되지 않을 권리’, ‘다른 죄수들과 교류할 권리’, ‘주 1회 면회, 편지를 받을 권리’, ‘시위 중 상실된 감형 복구’ 등을 요구했다. 마치 박정희의 전향 공작에 맞서 투쟁하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습과 같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들에게 강제로 음식을 주입하고, 대처 수상은 대화를 거부했다.
이후 1984년 10월 12일 새벽 영국 근교 휴양도시인 브라이튼의 호텔에서 폭파 사건이 일어나 5명이 사망하고, 31명이 부상한다.
이렇게 끝없는 북아일랜드의 ‘피의 투쟁’은 사망 3,532명(민간인 2,000명 이상), 부상자 5만 명 이상을 낳았다.
하지만 북아일랜드는 성금요일 협정으로 또 다른 통일 계기를 만들었다. 협정에는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미래는 북아일랜드인 다수 동의에 따르기로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분쟁의 불씨는 통일이 되어야만 극복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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