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새해부터 ‘중대선거구제 개편론’을 꺼내 들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의도를 이번 글에서 짚어보려 한다.
윤석열이 던지고 조선일보가 띄운 선거구제 개편
윤 대통령은 지난 1월 2일 조선일보와의 새해 대담에서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국회의원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라며 “지역 특성에 따라 한 선거구에서 2명, 3명, 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라고 했다.
다음 날인 지난 1월 3일, TV조선은 「중대선거구제, 21대 총선 적용해보니」 보도에서 지난 21대 총선 당시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됐다고 가정해 분석했다.
그랬더니 서울에서 더불어민주당 24석, 미래통합당(국힘당)이 24석, 정의당이 1석을 얻었을 것이란 결과가 나왔다. (현재 실제 의석수: 민주당 41석, 국힘당 8석)
서울·경기·인천을 더한 수도권 전체 121석에서는 민주당이 60석, 국힘당이 59석, 정의당이 2석을 얻었을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실제 의석수: 민주당 103석, 국힘당 16석, 정의당 1석)
수도권에 한 선거구에서 의원 2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를 적용하면 민주당의 의석은 크게 줄어들고, 국힘당의 의석은 많이 늘어나는 반면 소수 정당(정의당)의 의석은 1석 늘어나는 데 그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TV조선은 “의석수가 많은 수도권에서 미래통합당이 가져간 의석수가 더 많다 보니 전체 의석수로는 민주당이 줄고 (미래)통합당이 늘었다. 다만 2명을 뽑도록 선거구를 획정하면 여전히 소수 정당의 기회가 차단된다는 점도 나타났다”라며 “중대선거구제 역시 여러 한계가 있지만 양당 정치의 폐해, 적대적인 진영 정치에서 벗어나는 데 의미가 있다”라고 긍정했다.
윤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를 꺼내고 조선일보가 이를 받아 선거구제 개편에 따른 국힘당의 의석 확대를 주목했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거구제는 대체로 하나의 선거구에서 당선자 1명을 뽑는 소선거구제, 하나의 선거구에서 당선자 2~3명을 뽑는 중선거구제, 하나의 선거구에서 당선자 4~5명 이상을 뽑는 대선거구제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서 중대선거구제를 시행해오다가 지난 1988년, 13대 총선부터 소선거구제를 시행한 뒤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첫 번째 노림수: 국힘당을 검찰 출신으로 장악
국힘당 내부에서는 중대선거구제 개편을 두고 셈법이 엇갈리고 있다.
유승민 전 의원은 지난 1월 5일 BBS 라디오 ‘전영신의 아침저널’에서 “지역구도, 이념적인 대결, 적대적 대결 이걸 전부 다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중대선거구제를 찬성한다”라며 “윤 대통령이 죽으라면 죽을 시늉도 하는 분들이 중대선거구제는 왜 적극 환영을 안 하고 있나”라고 말했다.
유 전 의원 말대로 윤 대통령이 직접 선거구 개편안을 던졌는데도 ‘친윤’ 정치인들조차 별다른 호응이 없는 분위기다.
정진석 국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월 5일 페이스북에서 “소선거구제 폐해를 절감하고 있지만 중대선거구제 문제점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다”라면서 “(일본이) 2인에서 5인까지를 뽑는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하면서 공천권을 갖기 위한 당내 파벌정치가 심화됐다”라고 에둘러 비판했다.
주호영 국힘당 원내대표는 지난 1월 8일 서울신문과 통화에서 “선거구제는 여야가 합의가 되어야 하고 의원들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여야 합의나 의원들 동의를 받기가 대단히 힘들 것”이라며 “중대선거구제를 하면 국민의힘은 영남지방에서 많은 손해를 본다. 한 30~40%의 의석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친윤’을 자처하고 당 대표 후보로 나선 윤상현 의원은 지난 1월 15일 펜앤드마이크와의 대담에서 “중대선거구제를 하면 국민의힘이 덕을 본다. 사실 1당이 민주당이라 국민의힘이 거의 당선될 것”이라면서도 지금 당장은 어려우니 실행 시기는 2028년으로 늦추자고 거리를 뒀다.
현직 국힘당 의원들은 왜 이렇게 중대선거구제 개편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펜앤드마이크는 지난 1월 15일 “(윤 대통령이 조선일보 대담에서 말한) ‘지역(특성)에 따라’라는 뜻은 수도권을 의미하는 것 같다”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중대선거구제 개편이 검찰 출신 측근을 수도권 지역구에 꽂아 넣으려는 의도가 아니겠냐는 주장도 나온다.
아래는 CBS 노컷뉴스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노컷브이’가 지난 1월 10일 내보낸 영상 「이게 지금 왜..? 기자들이 들어본 정치인들의 실제 속내」에 나온 주장을 정리한 것이다.
“윤 대통령 주변에 출마하고 싶은 사람들(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같은 검찰 출신 등)이 줄을 섰다. 기존 소선거구제는 지역구 조직의 세력이 강해 당선이 어렵다. 중대선거구제로 하면 서울 강남 등 포함된 권역에 꽂으면 당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차기 총선을 준비하는 현직 의원들이라면 선거제 개편에 따른 선거구 조정, 검찰 출신 인사들의 유입을 경계할 만하다. 이 때문에 국힘당에서 중대선거구제 개편에 확답하지 않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나오는 것으로 풀이된다.
두 번째 노림수: 민주당의 분열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윤 대통령이 던진 중대선거구제 개편론을 둘러싸고 찬반이 엇갈린다. 이와 관련해 조선일보는 지난 1월 3일 「李 “중대선거구제, 신인에 불리”…비명계는 “논의해야”’」 기사에서 “(민주당) 내부적으로는 주로 비이재명 진영에서 중대선거구제에 찬성하는 의견이 크다”라며 민주당 내부 분열에 초점을 뒀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선거구제 이야기를 꺼낸 지금 국민에게 의견을 물어 선거제도를 개편하는 ‘국민선거구제’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지난 1월 2일 이탄희 의원이 SBS와의 통화에서 한 말.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검토’, 국회의장의 ‘선거법 개정 방침’을 환영한다.” -지난 1월 2일 김동연 경기지사가 페이스북에 쓴 글.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지금 뭐라도 토를 다는 분은 기득권을 놓기 싫은 분들.” -지난 1월 5일 조응천 의원이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서 한 말.
중대선거구제 개편론에 뒤따라 나온 위 민주당 의원들의 발언은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에 힘을 실어준 셈이 됐다. 반면 위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민주당 내부를 ‘갈라치기’하려는 윤 대통령의 의도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김두관 의원은 지난 1월 5일 페이스북에서 “중대선거구제는 국민의힘이 수도권에서도 안정적으로 과반을 확보해서 다수당이 되고 장기 집권의 길을 열기 위해, 윤 대통령과 한동훈 검찰이 던진 민주당 분열의 떡값”이라고 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개편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민주당 지도부에서는 중대선거구제 개편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1월 2일 부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중대선거구제의) 장점으로는 소수자들 진입이 가능하고 신인 진출이 용이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득권, 소위 유명하고 경제력이 큰 사람들만의 장이 될 수도 있다”라며 “장단점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당내 의견을 모아가는 중이다”라고 밝혔다.
이후 이 대표는 지난 1월 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올해로 87년 헌법 체제가 36년째를 맞는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고 국민은 변화를 요구한다”라면서 “이미 수명을 다한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꿔서 책임 정치 실현, 그리고 국정 연속성을 높여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중대선거구제와는 결이 다른 개헌론을 꺼내 든 것이다.
정청래 민주당 국회의원(최고위원)은 지난 1월 13일 중대선거구제에 관해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서 “다선, 중진, 인지도가 높은 유명한 사람은 평생 해먹는 기득권의 영구화다”라며 “수도권이 121석이고 영남과 호남이 정확하게 1대 2다. 영남이 (호남보다 인구가) 2배 많다. 이거 한다면 민주당은 영원히 1등 하기 어렵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민주당 지도부의 반응은 중대선거구제 논의로 민주당 분열을 노리는 윤 대통령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계산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진보 정당의 반응
참고로 진보정당은 중대선거구제 개편에 어떤 반응을 보여왔는지 알아보자.
지난해 3월 30일, 정치개혁공동행동과 7개 원내외 정당(기본소득당, 노동당, 녹색당, 미래당, 시대전환, 진보당, 정의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정치를 하기 전부터 중대선거구제를 선호해 왔다”라고 한 윤 대통령의 발언을 언급하며 선거구제 개편을 촉구했다.
6.1 지방선거(아래 지선)를 앞두고 여야 합의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하면서 ‘중대선거구 시범 실시지역’ 109곳이 지정됐다.
그렇다면 지선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국회 입법조사처가 펴낸 보고서 「제8회 동시지방선거 중대선거구제 시범실시의 효과와 한계」를 살펴보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지선 때 기초의원선거 지역구 1,030개 가운데 30개 선거구(총 109석)에서 선거구당 3~5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를 시범 실시했다.
결과를 보면 소수 정당은 시범 지역 가운데 18개 선거구에서 후보 19명(정의당 11·진보당 7·우리공화당 1명)을 냈고 4명이 당선됐다. 중대선거구제 몫으로 배정된 109석에서 민주당·국힘당 양당의 당선자는 105명(96.3%)이었다. 반면 소수·진보 정당 후보는 인천에서 정의당 1명, 광주 광산에서 진보당 3명이 당선되는 데 그쳤다.
특히 평소 광주 지역은 국힘당을 향한 비토 정서가 강했다는 점에서 진보당 후보의 당선과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별 상관이 없던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리하면 지난 지선에서 한 선거구당 기초의원 3~5인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를 적용해봤음에도 여전히 민주당, 국힘당 양대 정당이 대다수 의석을 나눠 갖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는 중대선거구제 도입이 꼭 진보 정당의 도약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후 중대선거구제를 바라보는 진보 정당의 기조가 달라진 점도 지선 결과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의당 기초의원 후보로 지선에 출마했던 김가영 씨는 지난 1월 3일 오마이뉴스에 쓴 글 「윤 대통령의 선거구제 개편 거론, 못내 찜찜한 이유」에서 “2022년 제8회 지방선거 3인 선거구에 출마했던 진보 정당 출신의 후보로서, 선거구제만으로 정치개혁은 어렵다고 본다”라며 “선거구제가 아니라 투표제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난 1월 8일 경남도민일보 「“거대 양당 독식 구조 깰려면 비례성 높여야”」 보도에 따르면 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등 4개 진보 정당은 윤 대통령이 던진 중대선거구제 개편은 오히려 ‘양자 독식 구조’를 키우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보도에서 진보당은 권역별 대선거구제 도입으로 지역구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도 후보가 아닌 정당을 찍도록 해야 한다, 정의당은 국회 의석수를 360석으로 확대하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노동당은 지역 정당을 인정하는 정당법 논의를 함께해야 한다, 녹색당은 지지율에 맞게 의석을 나눠 가지고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을 막는 봉쇄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각각 대안을 소개했다.
선거구제 개편 논의에 따라 영향을 받는 진보 정당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마치며
앞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윤 대통령은 첫째 다음 총선에서 자신을 따르는 검찰 세력을 확대할 의도, 둘째 선거구제 개편에 이견을 보이는 민주당 내부 분열 등을 노리며 새해부터 중대선거구제를 꺼내 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해가 막 시작되고 윤 대통령의 발언이 여러 언론에서 대서특필됐던 때를 돌아보면 현재 중대선거구제 논의는 그다지 진척되지 않고 있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도 윤 대통령이 새해에 꺼내든 선거제 개편 주장을 두고 아래와 같은 비판이 나온다.
“현 우선순위는 10.29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검, 김건희 특검, 윤석열 끌어내리기가 먼저인 듯싶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씩 국민 의견 수렴해가며 고민해도 늦지 않습니다.”(러***)
“이렇게 선거제도 얘기하다 보면 국힘당이 원하는 덫에 빠지게 됩니다. 자꾸 이슈를 선거제도로 몰고 가면 안 됩니다. ‘윤석열 퇴진’, ‘김건희 수사’에 몰입해야 합니다.”(s**)
여론조사를 살펴봐도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민심의 우선순위가 아닌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1월 12일 발표된 1월 2주 차 전국지표조사(NBS)에서는 ‘1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당선자를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를 국회의원 선거에 도입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반대는 50%로 과반, 찬성은 37%로 나타났다.
지난 1월 17일 원내 과반인 민주당은 의원총회를 마친 뒤 윤 대통령이 내놓은 2~4인 중대선거구제를 논의에서 아예 배제하고, 오는 2월 말까지 선거법 개정안 당론 개정·개헌 논의를 동시에 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적어도 윤 대통령이 새해 벽두부터 꺼내든 중대선거구제 개편, 노림수는 별다른 소득 없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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