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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하에] 갑신정변 2. 개화파의 선택

구산하 | 기사입력 2023/01/21 [10:53]

[이 산하에] 갑신정변 2. 개화파의 선택

구산하 | 입력 : 2023/01/21 [10:53]

날로 심해지는 청나라의 내정간섭과 노골화되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략, 부패한 민비 일당까지.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처지였다. 새로운 조선을 꿈꿨던 개화파의 위기의식도 날로 짙어졌다. 이번 편에서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개화파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다

 

개화파는 고종이 집권하며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는 다른 정치 행보를 보였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은 그것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통상 수교와 개항이라는 새로운 대외 정책은 기존 정치 세력의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했다고 해서 그와 뜻을 맞춰온 이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고종에겐 자기 뜻을 뒷받침해줄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일찍이 외국 문물의 수용과 조선의 근대화를 원했던 개화파는 고종을 통해 자기 뜻을 펼칠 기회가 되니 그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 조선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 의정부는 흥선대원군의 측근과 위정척사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고종은 자기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의정부와 비슷한 지위와 권한을 가진 통리기무아문을 새로이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개화파는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고종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국방과 외교를 전담한 통리기무아문은 점차 조선 정치의 중심 기구로 부상한다. 이후 개화파는 먼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청나라와 일본에 각각 영선사와 조사시찰단을 파견해 개화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해 국방의 근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위정척사 세력의 거센 반발과 흥선대원군을 복권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고종이 이를 강하게 탄압하며 고종과 개화파의 입지 또한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 강력해진 힘이 모두 개화파의 차지가 된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집권 초창기부터 그를 도왔던 민비 일당이 군사와 재정 부문의 주요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고종이 민비 일당과 개화파 두 세력을 자기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정치적 동지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비 일당에게는 권력과 부의 축적 외에 어떤 고매한 정치적 이상이랄 것이 없었다. 이와 달리 개화파에게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정치적 이상이 있었다. 개화파와 흥선대원군 세력의 갈등이 정치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민비 일당과의 갈등은 부정부패와의 싸움이었다. 개화파가 흥선대원군보다도 민비를 더 싫어했던 이유이다. 개화파와 민비 일당의 갈등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던 중 개화파가 영향력을 확대한 결정적 계기가 생기니, 바로 임오군란이었다. 일본이라는 외세와 부패한 민비 일당에 맞선 민중의 저항이 새로운 정치 세력에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눈엣가시 같던 민비 일당이 축출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자 개화파는 서둘러 정국을 주도한다. 통리기무아문을 부활시키고 외무와 내무로 나누어 국정 운영의 전반을 담당하게 했으며 그 요직을 장악했다. 갑신정변의 대표 인사인 김옥균도 현실 정치로 뛰어들었다. 

 

바야흐로 개화파의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서양 문물의 적극적인 수용과 내정 개혁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개화파는 새로운 조선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국가의 재정이 낭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생청을 설치하고 도로를 정리하는 것, 상업 장려를 위한 각종 지원의 확대,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의 발간과 근대 학교의 운영, 신식 군대의 양성, 의복의 개선, 전신과 전화의 개설, 근대 제도를 시행할 기구의 설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변화를 시도했다. 

 

특히 이들이 중요시했던 것은 인재 양성이었다. 개화파의 대표주자인 김옥균은 인재와 개혁, 부국강병이 한 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부국강병을 통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된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김옥균은 개항을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한 일본에서 조선이 나아갈 길을 찾았다. 출신과 당파를 가리지 않고 청년들을 선발해 일본 유학을 적극적으로 주선하고 후원했다. 일본에 간 청년들은 근대적인 국가 제도와 기구와 그 운영, 전문 지식 등을 배웠다. (일본에 관한 개화파의 입장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짚어보겠다.)

 

▲ 개화당 주요 인물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등 1884년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들이 함께 찍은 사진.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화파, 정변을 선택하다

 

그러나 개화파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다. 다시 돌아온 민비와 그 일당과의 갈등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민비 일당은 청나라까지 등에 업고 있지 않은가!

 

우선 개화파와 민비 일당은 재정 문제를 두고 크게 부딪쳤다. 재정은 부국강병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게다가 근대화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고종 집권 이후 민비 일당의 부정과 부패로 국가 재정은 심각한 위기 상태에 놓여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개화파는 감생청을 만들어 불필요한 직위와 기구를 없애 국가 재정을 절감하고 세금의 부정 징수를 막고자 시도했다. 이것은 결국 기득권 세력의 목을 죄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를 반길 리 없었다. 민비 일당의 방해 행위는 계속되었고 결국 감생청의 책임자였던 어윤중은 해임당했다. 이후 감생청은 설립 6개월 만에 제대로 된 개혁은 해보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재정 문제의 해결을 두고도 민비 일당과 개화파는 계속해서 대립한다. 민비 일당은 청나라의 조언을 따라 당오전과 당십전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기존 가치보다 높은 화폐가 발행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물가가 폭등할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도 민비 일당은 새로운 화폐의 발행을 강행했고 이 과정에서 화폐 주조 사업을 독점해 자기 부를 축적했다. 

 

개화파는 새로운 화폐를 무력화하고 국가 재정을 확보할 목적으로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고자 시도한다. 물론 일본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고 외국의 돈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개화파의 마음은 급했고 이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는 분명 개화파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일본의 차관을 도입하겠다고 판단한 김옥균은 고종의 위임장을 들고 찾아갔으나, 차관 도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이 원하는 것은 조선을 침략해 자기의 발아래 두는 것이지 조선이 자체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루고 부국강병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비 일당은 이를 빌미 삼아 개화파의 입지를 흔들기 위한 세력 다툼을 본격화한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의 운신 폭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부국강병의 필수 요소 중 하나인 군사 문제에서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갑신정변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박영효는 신식 군대 양성에 힘을 쏟았다. 박영효는 한성판윤에 취임한 후 신식 군대를 양성하고자 시도하다 민비 일당의 견제를 받아 광주유수로 좌천된다. 그러나 박영효는 포기하지 않고 1천 명에 가까운 병력을 모아 근대적인 훈련을 거친 신식 군대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민비 일당의 눈에는 신식 군대를 만드는 시도가 그저 위험천만한 일로만 보였다. 국방력 강화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민비 일당은 박영효를 파직하고 그가 만든 신식 군대는 중앙군대로 편입한다. 

 

이외에도 개화파가 추진하는 개혁안에 민비 일당은 일일이 제동을 걸었다. 고종은 개화파가 아닌 민비 일당의 손을 들어주었고 결국 개화파가 추진했던 개혁의 다수는 중단되었다. 개화파 인사들 역시 주요 요직에서 하나둘 물러나야 했다. 개화파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고 있었다. 

 

더욱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하는 청나라와 부패한 기득권 세력 민비 일당에게 개화파 세력은 걸림돌이자 크나큰 위협이었다. 정치적인 견제를 넘어서 상대를 완전히 제거해야만 자기가 살 수 있음이었다. 청나라가 고문으로 파견한 묄렌도르프는 민비 일당이 먼저 김옥균을 제거해야 한다고 속삭였고, 민비 일당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개화파 역시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이대로 죽을 것인가, 새로운 깃발을 들 것인가. 그들의 선택은 모두가 다 알다시피 정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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