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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하에] 갑신정변 3. ‘삼일천하’로 끝난 꿈

구산하 | 기사입력 2023/02/04 [09:57]

[이 산하에] 갑신정변 3. ‘삼일천하’로 끝난 꿈

구산하 | 입력 : 2023/02/04 [09:57]

정변을 준비하다

 

1884년 10월 17일(음력), 개화파의 거사가 단행되었다. 개화파가 이 시기에 정변을 일으킨 데에는 청나라 움직임의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왔다. 

 

그런데 1884년 5월, 조선에 주둔 중이던 3,000명의 청나라 군인 중 절반이 철수하게 된다. 안남(지금의 베트남)을 두고 프랑스와 갈등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에 안남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종주국과 속국의 관계를 유지해온, 다른 나라에 빼앗길 수 없는 곳이었다. 결국 1884년 8월, 안남의 종주권을 두고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의 승기를 잡은 쪽은 프랑스였다.

 

개화파는 이 같은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청나라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허우적거리는 바로 이때가 정변의 때라고 판단했다. 개화파가 정변을 결심한 가장 큰 두 가지 이유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거기에 빌붙은 민비 일당을 척결하고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1883년부터 정변을 대비해 신식 군대를 양성했고 일본에 유학 보낸 사관생도들을 불러들였으며 비밀 무장 조직인 충의계를 조직해 여러 청년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갑신정변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 

 

이런 움직임을 면밀하게 살피는 세력이 또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영향력을 걷어내야 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이런 검은 속내를 가지고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에 접근했다. 

 

김옥균과 개화파 역시 정변의 성공을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청나라 군대의 무력에 맞설 힘, 정변 이후의 새로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줄 힘, 그 힘을 민중에게서 찾았더라면 갑신정변의 역사적 성격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들의 시선이 거기까지는 가닿지 못했다.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편에서 다뤘던 차관 문제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은 개화파에 마냥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조선의 근대화를 만들어갈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달가이 여길 이유도, 밀어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들을 어떻게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였다. 

 

이런 몇 번의 경험이 있다 보니 김옥균은 일본의 생각을 알 수 없다며 그 진의를 반신반의했다. 다케조에는 나라의 정략이라는 것이 수시로 바뀌는 것이라며 김옥균을 안심시켰고 일본군 병력과 재정 마련 등 정변의 지원을 약속했다.

 

김옥균과 개화파는 일본의 도움을 받되 그 역할을 국한하려 했다. 일본군은 왕궁 호위와 청나라를 막아내는 역할을 기본으로 하고 민비 일당의 제거나 내정 개혁에는 관여하지 않게 했다.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고자 일본의 손을 빌리지만, 이 정변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개화파 자신들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다. 

 

이제 거사 준비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거사를 5일 앞둔 10월 12일, 김옥균은 고종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옥균은 당시 국제 정세와 내정의 폐단에 대해서 쭉 읊었다. 그러고 나서 일본의 힘을 이용해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자고 고종을 설득했다. 

 

김옥균이 고종을 따로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 정변을 일으켜 내정 개혁의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제거하더라도 임금을 제거하기는 당시 정서상 어려운 일이었다. 개화파의 목표는 고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잡아 독립 국가와 내정 개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고종을 제거해 정치적 부담을 안고 가는 것보다 활용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고종은 김옥균의 진정을 알고 있다며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김옥균에 일임하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는 문서에 직접 서명한 후 옥새까지 찍어 주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진정으로 김옥균의 뜻을 지지했던 것일까? 개화파의 등용 과정과 이후 정국 운영을 보았을 때, 고종의 관심사는 자기의 권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청나라의 입김이 세지고 자기 입지가 줄어드는 상황이 불만이었던 고종은 일본과 개화파의 힘으로 자기 입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고종의 진의가 어쨌건, 고종의 지지를 확보한 김옥균의 가슴은 상당히 부풀어 올랐다. 10월 13일 거사 일을 확정하니 바로 10월 17일이었다. 우정국 완공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 축하연의 자리에 민비 일당(수구 세력)을 불러들여 제거하자는 것이 기본 계획이었다. 개화파는 별궁에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을 거사의 신호탄으로 삼자고 약속했다. 나아가 거사에 성공하면 고종과 민비는 경우궁으로 대피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기로 했다. 왕이 묵고 있는 창덕궁과 달리 경우궁은 적은 수로도 수비가 가능한 곳이라 청나라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우정국의 현재 모습. [사진출처- 문화재청]     

 

거사 당일

 

드디어 거사 당일이 밝았다. 우정국의 완공을 축하하는 연회에는 홍영식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등의 조선 사람들, 미국 공사와 서기관,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와 서기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과 통역관, 묄렌도르프 등 모두 18명이 초대되었다. 

 

연회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고 김옥균과 개화파들은 별궁에서 거사의 시작을 알리는 불길이 타오르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한 때가 지나도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기술 부족으로 별궁의 화약이 불발한 것이었다. 김옥균은 급히 나가 다른 곳이라도 불을 지필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긴박하게 울려 퍼진 소리, ‘불이야!’민비 일당의 핵심 인물인 민영익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자리를 떴다. 하지만 잠시 뒤 칼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거사에 참여한 이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연회장은 삽시간에 혼란해졌다. 원래대로라면 연회장에서 민비 일당을 제거했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처음의 계획과 틀어지자 김옥균과 개화파의 마음은 급해졌다. 김옥균은 먼저 일본이 마음을 달리 먹지는 않았는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확인했다. 이는 김옥균이 일본의 손을 잡고서도 일본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본 측의 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예정대로 고종과 민비를 경우궁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일부러 화약을 폭발해 고종과 민비의 불안감을 조성한 후, 일본 공사관에 호위 요청을 하자고 부추겼다. 박영효는 일본에 호위를 요청하는 고종의 친필 문서를 받아 다케조에에게 전달했고, 다케조에는 곧 일본군을 끌고 와 경우궁과 그 주변의 호위를 담당했다.

 

이제 남은 것은 민비 일당과 수구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개화파는 이날 밤, 국가의 위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외면했다는 이유를 들어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의 주요 인물들을 모두 죽였다. 

 

거사의 성공이었다.

 

삼일천하로 끝나다

 

김옥균과 개화파 일당은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에 거사의 성공을 알렸다. 그러고는 내정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새로운 정부를 꾸리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영의정 : 이재원

좌의정 :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 :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 및 우포장 : 서광범

좌찬성 겸 우참찬 : 이재면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 신기선

예조판서 : 김윤식

병조판서 : 이재완

형조판서 : 윤웅렬

공조판서 : 홍순형

호조참판 : 김옥균

병조 참판 겸 정령관 :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갑신정변(甲申政變))]

 

새로 꾸린 정부는 개화파 외에도 여러 세력을 포섭하고자 했다. 인사와 재정, 군사와 관련한 요직은 개화파가 잡되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온건 개화파, 민비 일당 중 온건한 세력 등을 등용했다. 이들은 대체로 기득권을 잡고 있던 민비 일당과 수구 세력에 의해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인물들이었다. 일종의 연합정부를 꾸린 것인데, 아직 개화파의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10월 18일, 새 정부 구성까지 마치자 이를 다시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에 알렸으며, 각국의 공사와 영사들은 새로운 정부를 방문하였다. 새 정부를 공식화하는 작업이었다. 

 

새로운 정부를 세운 조선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였으나, 이 꿈은 3일 만에 좌절되고 만다. 그동안 기득권을 잡아 온 민비 일당과 수구 세력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정변을 일으킨 세력에 대한 악선전을 통해 민심을 악화시키는 한편 청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정권을 되찾고자 했다. 

 

청나라의 출병 움직임이 전해지자 개화파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보유하고 있던 무기들은 형편없었다. 이 와중에 다케조에는 일본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아직은 청나라와 직접 충돌할 때가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다케조에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소연했다. 서글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다케조에는 철군 의사를 거둬들이긴 했지만, 막상 청나라 군대가 1,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신속하게 발을 뺐다. 

 

삼일천하. 

 

제대로 된 내정 개혁을 하기도 전에 거사는 싱겁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정변의 주요 세력은 일본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실패한 정변의 주모자들을 대하는 다케조에의 태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일본에 하등 쓸모가 없는 존재들이니 더 잘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케조에는 김옥균 등을 향해 배에 타지 말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일본인 선장이 이들을 승선시켰으나, 참으로 서러운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일본으로 망명한 이들은 목숨을 건졌으나 조선에 남은 그 가족들, 개화파 일당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새로운 조선을 꿈꾸다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갑신정변, 과연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거사 다음 날인 10월 18일, 개화파는 밤새 국정 개혁을 위한 정령 14개 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19일 아침 이를 발표하고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시내 곳곳에 관련 내용을 붙였다. 거사를 일으킨 지 채 이틀이 되기도 전에 구체적인 아래와 같은 내정 개혁안을 만들어 발표한 것이다. 이는 개화파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결과임을 알 수 있다. 

 

▲ 김옥균이 썼다고 알려진 갑신일록. 개화파가 발표한 혁신 정령 14개 조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①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을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 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그중에서 재능 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⑤ 그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⑥ 각 도의 환상제도(還上制度)는 영구히 폐지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순사제도(巡査制度)를 시급히 실시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그동안 유배, 금고(禁錮)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⑪ 4영(營)을 합하여 1영을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近衛隊)를 시급히 설치할 것.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합문(閤門) 안의 의정소(議政所)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뒤에 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政令)을 공포하여 정사를 집행할 것, 

⑭ 정부는 육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 등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갑신정변(甲申政變))]

 

14개 조 주된 내용을 살펴보면, 제1조를 통해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를 선언하고 있다.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며 속국으로 삼으려는 청나라에 맞서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는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킨 주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은 신분제를 폐지하고 평등권의 확립,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한 것이다. 크게 양반, 중인, 상민, 천인으로 구분되는 신분제도는 당시 조선 봉건제의 핵심이었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평등권을 확립하고자 한 시도는 봉건의 시대를 넘어 근대로 이행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이었다. 

 

국가의 재정을 일원화하고 각종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도 담겨 있다. 민비 일당의 집권 이후 조선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부담은 모두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나아가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재정의 확보가 매우 중요했기에 개화파는 이 부분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또한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상인인 보부상에게 특권을 부여해주는 혜상공국을 폐지해 자유로운 상업 발전을 추구했다. 이는 보부상 집단을 자기의 권력 기반으로 삼은 민비 일당의 힘을 약화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했다. 

 

정부의 조직을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특히 13조와 14조의 내용을 보면 나라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주체로서 대신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는 국왕이 국정의 절대 권력자로서 기능하는 기존의 체제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개화파가 꿈꾸는 이상적인 정치가 서양 국가들이 실시하던 입헌 군주제와 같은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교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돌렸다.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규장각의 폐지는 근대 교육과 문화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김옥균과 개화파는 나라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의 내용이 낡은 유교 경전에서 벗어나 근대적 제도와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며, 이것이 일반 민중들을 대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 외에도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근대적인 경찰제도와 재판과 형벌 제도를 확립하는 등 각종 제도에서의 근대화를 추구했다. 더불어 민비 일당의 통치 아래 백성을 무자비하게 수탈했던 극심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자 했다.

 

갑신정변은 왜 실패했는가

 

그렇다면 새로운 조선을 꿈꿨던 갑신정변은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청나라의 무력 개입일 것이다. 그 부분을 제외한 실패 원인을 살펴보자.

 

먼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화파는 새로운 조선을 꿈꿨으나 그것을 누구와 만들어갈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민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자체도 소수였으며 이들의 상당수는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민중을 역사 발전의 주인으로 보고 그들의 힘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는 의식이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오늘 우리의 역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좋은 개혁도, 혁명도 민중의 지지와 힘없이는 불가능하다. 

 

두 번째는 일본이라는 외세와 손을 잡은 점이다. 물론 김옥균은 일본의 진의를 계속 의심하고 그 역할을 특정한 부분에 국한하고자 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분노하고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고자 했으면서도 정작 일본이 가지고 있던 침략 의도는 제대로 꿰뚫지 못했다. 당시 일본의 모습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던 개화파에게는 일정 정도의 환상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자기의 부족한 힘을 외세를 통해 채우려고 했던 것에 문제가 있다. 게다가 당시 조선 민중들이 일본의 침략과 약탈에 분노하고 맞서 싸웠던 것을 고려해봤을 때, 개화파 세력이 일본의 힘을 빌린 것은 결과적으로 민중의 지향과는 완전히 괴리된 꼴이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와 친일매국 세력과는 구분해야 한다.)

 

세 번째는 정변 이후의 정권 유지에 대한 고민이 깊지 못했다. 정권을 잡는 것은 혁명의 끝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혁명은 그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목표했던 바를 달성해 가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개화파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대비를 세우지 못했다. 자기들이 상대하는 청나라와 민비 일당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세와 적폐는 절로 사라지지 않으며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고 부활을 꿈꾸는 법이다. 이를 절대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역사에 남긴 의의

 

그러나 갑신정변은 우리 역사에 큰 의의를 남겼다. 

 

먼저 봉건국가를 넘어서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시도한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 발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은 자기들이 미개한 조선을 근대화해주었다며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려 한다. 이런 논리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친일 세력에 의해 여전히 설파되고 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조선은 자기 힘으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갑신정변은 이후의 민족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고자 한 정신은 갑오농민전쟁, 반일 의병 등 자주와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여러 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새 조선을 향한 열망으로 반짝였던 개화파의 열정과 그 한계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큰 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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