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를 덮친 미국발 도청 사태는 유엔도 비껴가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 대화를 도청당한 것으로 알려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에 항의하기는커녕 굴복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꽤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고 오랫동안 정치계에 몸을 담은 공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염탐하고 사적인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사적 대화가 왜곡되고 공개되도록 허용한 불법행위와 무능함이다.”
13일(현지 시각), 미국 CNN과 러시아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스테판 뒤자리크 유엔 사무총장 대변인은 미국발 도청 사태와 관련해 구테흐스 사무총장 대신 이렇게 성명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미국이 구테흐스 사무총장을 도청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밀문서의 유출과 왜곡이 문제라는 시각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유엔의 논리는 지난 11일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한미정상회담 조율을 위해 방문한 워싱턴 D.C 근처 덜레스공항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과도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당시 김 차장은 “미국이 어떤 악의를 가지고 (도청을)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라면서 “누군가가 (기밀문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권이나,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있는 유엔이나 도청 범죄를 벌이다가 발각된 ‘가해국 미국’에 오히려 쩔쩔매며 옹호하는 듯한 모습이 비슷하다.
특히 회원국만 190개가 넘는 유엔이 미국에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는 상황은 심각해 보인다.
유엔 사무총장은 대략 4만 명에 이르는 유엔 산하 기구 직원의 인사권을 비롯해 연 1조 3,000억 원에 이르는 예산권을 쥔다. 또 국제무대에서 국가원수급의 예우를 받는다. 또 안보리와 총회에도 참여하며 국제 분쟁 시 일정하게 중재자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런 사무총장이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유엔 헌장 100조는 유엔 사무총장의 권한과 역할에 관해 아래와 같이 규정했다.
“사무총장과 직원은 그들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어떠한 정부 또는 기구 외의 어떠한 다른 당국으로부터도 지시를 구하거나 받지 아니한다. 사무총장과 직원은 기구에 대하여만 책임을 지는 국제공무원으로서의 지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는 어떠한 행동도 삼간다.”
미국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유엔에 입김을 넣기 위해 구테흐스 사무총장 등 유엔 고위 인사를 도청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벌인 국제적 도청 범죄에 입을 꾹 다문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모습은 그 자체로 직무 유기, 또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이러한 모습은 그동안 유엔 사무총장이 미국에 휘둘려온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4년 임기로 연임이 가능한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추천한 후보를 유엔 총회에서 인준하면 결정된다. 그런데 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운데 한 국가라도 거부하면 해당 후보는 임명될 수 없다. 지금까지 미국은 이 점을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인사를 사무총장 자리에 앉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실제로 역대 유엔 사무총장 모두가 미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예를 들면 재임 당시 미국에 맞서 유엔의 독립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전 사무총장(재임 기간: 1992년 1월 1일~1996년 12월 31일)은 미국이 거부해 역대 사무총장 가운데 유일하게 연임을 하지 못했다.
반면 미국에 순종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반기문 전 사무총장(재임 기간: 2007년 01월 01일~ 2016년 12월 31일 )은 무난하게 연임에 성공한 바 있다.
현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반 전 사무총장의 임기가 끝난 직후 2017년부터 첫 임기를 시작해 지난 2022년부터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본래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자국인 포르투갈에서는 군부 독재에 맞선 사회당 출신으로 총리까지 지낸 유력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정작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도청 범죄를 자행한 미국 앞에서는 그 의지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다.
앞으로 유엔이 미국에 굴복하지 않고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유엔 개혁’이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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