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성 점령 이후
전주성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은 농민군. 그것은 단순한 깃발이 아니라 농민군의 긍지요, 희망의 푯대와 같았다. 깃발이 펄럭일 때면, 있어 본 적 없는 역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승리의 벅찬 감정이 가슴팍에 차올랐다. 이제는 정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날이 올 것인가! 기대이면서 동시에 결의이기도 한 질문을 던지며 전주성의 새 아침을 맞이하는 농민군들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에만 젖어있을 수는 없었다. 농민군이 성을 점령한 다음 날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전주성 인근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농민군을 쫓아온 홍계훈은 전주성이 함락되는 모습을 보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농민군을 진압해 공을 세울 타산을 했었는데, 오히려 농민군에게 전라도의 심장부를 덜컥 내줬으니 그의 심정이 얼마나 절박했겠는가. 홍계훈은 완산에 진을 친 후 전주성을 에워싸고 곳곳의 산과 봉우리에 많은 수의 병력을 배치했다. 전주성이 훤히 보이는 요충지들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전주성을 수복하고자 마음먹은 홍계훈은 진을 치자마자 농민군을 향한 공격에 나섰다.
이제 농민군은 성을 지키는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키는 쪽의 화력이 공격하는 쪽보다 열세였으니 말이다. 농민군의 무장은 관군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대부분은 낫, 호미와 같은 농기구나 죽창으로 무장한 상황이었고, 관아를 습격해 탈취한 무기들도 구식 무기들이었다.
지키는 싸움만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이것을 아는 농민군도 전주성에서 나와 관군을 향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관군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계속해서 대포를 쏘아대는 탓에 농민군에게는 쉽지 않은 싸움이 됐다. 지난 편에서 봤듯이, 농민군은 ‘장태’라는 창발적인 무기를 만들어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관군이 농민군보다 높은 지대에 있어 장태를 밀어 올라가야 해서, 이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몇 번의 충돌이 계속되고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홍계훈은 농민군을 흔들기 위한 회유 작전을 펼친다. 대장인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를 잡아 넘기면 큰 상을 주고 나머지는 죄를 묻지 않겠다는 내용을 곳곳에 퍼뜨렸다. 농민군 내부의 동요를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당시 농민군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이 말은 바꿔말하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든 전쟁이었으나, 또 누군가는 그 정도의 결심까지는 아니었다. 전주성 점령까지 승승장구하던 때와는 달리 전세가 밀리는 형국이 되니 일부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이 싹텄다. 홍계훈은 바로 이 지점을 노려 분열 공작을 한 것이다.
대오의 단결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기이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굳게 단결한 민중은 패배를 모른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다른 객관적 조건의 열세를 극복하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도 단결이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역사적 승리를 일군 것도 준비된 지도부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 궐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들은 민중의 손에서 그 무기를 빼앗아 없애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분열을 통한 와해 공작은 적들의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다. 우리 역사가 진보적 전환을 앞둔 결정적인 순간마다 다양한 형태의 분열 공작이 판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유례가 없는 검찰독재로 민주주의를 짓밟고 오로지 일본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으로 돌진하는 윤석열에 대한 민심은 분노를 넘어 대폭발을 향해 가고 있다. 20%대를 기록한 윤석열의 지지율은 국정운영의 자격이 없음을 의미하는 정치적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그런 윤석열을 자기 손으로 몰아내겠다고 주권자인 국민이 나서고 있다. 광장에서는 벌써 37번째 퇴진 촛불이 진행되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윤석열과 그 일당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촛불에 대한 각종 음해와 분열 공작이 몰아칠 것이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치켜든 민주주의와 민족자주라는 깃발 아래, 촛불을 이끄는 지도부와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굳게 단결해야 한다.
5월 3일, 농민군은 다시금 반격에 나선다. 농민군 수천 명이 전주성의 문을 열고 나와 관군이 있는 곳을 향해 돌진했다. 역시나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 기에 눌려 관군의 일부가 도망치자 농민군은 그들이 차지했던 거점들을 점령했다. 이제 목표는 관군의 본진이 있는 완산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완산에서의 전투에서 농민군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날 전투에서 농민군은 지휘관의 일부를 잃고 수백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등의 손실이 발생했고 대장인 전봉준 역시 다리를 다쳤다. 이 전투 이후 농민군 내부에 동요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어떤 이들은 도망쳤고 또 어떤 이는 대장인 전봉준을 잡아서 관군에게 넘기려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일부의 이탈에도 농민군의 대부분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지만, 농민군 지도부는 급변하는 정세와 더불어 새로운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외세는 절대 안 된다!
5월 4일, 전봉준은 정부에 휴전을 골자로 하는 화약 체결을 제안하고, 그 조건으로 농민군의 요구를 담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정부는 이에 바로 응하지 않았으나 농민군의 거듭된 제안으로 마침내 5월 7일, 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 정부는 농민군이 제시한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수용하고 농민군은 전주에서 철수할 것을 약속했다.
원래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농민군이 이 계획을 포기하고 전주에서 화약을 체결한 결정적 이유는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 때문이다.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할 생각은 없고 외세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했던 무능한 조선 정부는 4월 29일,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농민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어떻게 개입할 명분이 없을까 고민하던 청나라는 옳다구나 싶었고, 재빠르게 병력을 출동시켰다. 5월 5일~7일에 2,500명 정도의 청나라군이 조선에 상륙하였다.
청나라의 군대만이 아니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맺었던 톈진 조약에 의해, 청나라의 출병 소식을 들은 일본군도 조선으로의 출병을 결정했다. 이는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약속에 의한 것으로, 엄밀히 따지면 조선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자 호시탐탐 노렸던 일본에,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5월 6일, 일본군은 약 6,000여 명의 병력을 부평에 상륙시켰다. 나아가 일본 공사와 함께 병력 일부를 서울로 보냈다. 농민군을 진압하러 조선의 경군(조선시대의 중앙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치 서울을 ‘점령’하러 온 모양새였다.
이 엄청난 일의 수습도 결국 농민군, 조선 민중의 몫이었다. 전봉준과 농민군이 항쟁에 나선 것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지 외세에 나라를 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농민군은 이 인식이 아주 명확하고 뚜렷했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관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며 진격하던 농민군이 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이 애국의 마음 때문이었다. 나라가 있어야 자기 삶도 있다는, 그 어떤 내부의 투쟁도 외세와의 싸움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발걸음을 돌려세우는 농민군의 심정이 어땠을 것인가.
혹자는 마치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이 농민군 때문인 것처럼 호도한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것은 사대에 찌들어 매국을 서슴지 않던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었지 농민군이 아니다. 농민군이 ‘빌미’를 주었다는 논리는 외세를 끌어들인 기득권 세력에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시도이며, 분명한 역사 왜곡이다.
1차 농민전쟁은 외세는 절대 안 된다는 농민군의 절박한 마음이 화약 체결로 이어져 일단락되었다. 1차 농민전쟁의 궐기부터 마무리까지, 그 모든 저항의 순간은 농민군의 뿌리 깊은 애국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풍전등화의 조선이 믿고 기댈 것도 오로지 이 애국심뿐이었다.1차 농민전쟁을 마무리 지은 농민들은 각 지역으로 돌아가 폐정을 개혁하기 위한 활동에 나선다. 이는 우리 민중이 정치의 주인임을 증명해낸 위대한 역사이기도 하다. 다음 편에서는 이 노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계속)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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