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상 과정과 특징 - 상
1. 정전협상을 제안하기까지
1950년 시작된 한국전쟁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애초의 경계선이었던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고착 국면에 들어갔다. 소모전이 길어지면서 전쟁 당사자와 유관국들은 군사적 방법이 아닌 정치적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부터 휴전 혹은 정전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9월 16일 해리슨 매슈스 미 국무부 차관보는 국무부 대외군사문제 및 원조 담당 특별보좌관 제임스 번스 소장에게 북한의 휴전 제의에 대비한 휴전 구상 지침을 사령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1급 비밀문서를 보냈다. (김명기, 『한반도평화조약의 체결』, 국제법출판사, 1994, 40~41쪽.)
미국은 전황이 불리해진 북한이 먼저 휴전 제의를 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북한은 후퇴 과정에서 반격을 준비했을 뿐 휴전 제의는 하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은 전쟁 초기 낙동강까지 진격한 것을 전쟁 제1계단으로, 후퇴 시기를 전쟁 제2계단으로 구분하고 제2계단 전략적 방침을 제시했다. 1950년 9월 25일 북한군 최고사령부 작전회의와 27일 도당위원장협의회에서 제시한 전략적 방침은 “현 계단에 있어서 우리 당의 전략적 방침은 적들의 진공 속도를 최대한으로 지연시키면서 시간을 쟁취하여 인민군 주력부대들을 구출하고 새로운 후비 부대들을 편성하여 강력한 반공격 집단을 형성하며 계획적인 후퇴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김일성전집 12』, 조선노동당출판사, 1995, 323쪽.)
김일성 주석은 후퇴가 곧 패배는 아니며, 후퇴 기간을 반격 준비를 위한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 듯하다. 따라서 휴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김일성 주석이 이런 판단을 한 것은 유엔군의 포위에 약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유엔군의 포위가 형식에 불과하고 그 범위가 넓어 실제로는 서울 동쪽부터 전선 동부까지 빈 공간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기본 전선인 낙동강 전선과 상륙지점인 인천의 거리가 멀어 여기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리준항·김정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조국해방전쟁령도사 2』, 사회과학출판사, 2013, 9쪽.)
1950년 10월 1일 한국군 3사단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감행했다. (훗날 한국 정부는 이를 기념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했다.)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은 여러 논란을 낳았다. 그리고 이 논란은 한국전쟁의 성격 그리고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한미의 시각을 보여주었다.
한미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불법 남침’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한의 ‘침략’을 무찔러 38선 이북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이런 미국의 관점을 수용해 6월 25일 결의문 제82호에서 “북한 당국이 그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27일 결의문 제83호에서도 “무력 공격의 격퇴”를 명시하였다. 즉, 38선 이남에 넘어온 북한군을 ‘격퇴’하는 게 유엔 안보리의 결정이었다.
이런 논리와 시각에 따르면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것은 북한을 ‘침략’하는 것으로 된다. 그런데 한국군은 그것을 감행하였다. 물론 한국군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닌 유엔군, 더 정확히는 미군의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낙동강까지 후퇴를 거듭하던 7월 중순에 이미 38선 너머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딘 애치슨 국무부 장관, 존 덜레스, 딘 러스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등은 미국이 한반도를 무력 통일해 친미·반소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9월 1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하는 지침을 완성했고 11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서명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였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27일 중국이나 소련의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성공이 확실하다면 북한 전역을 돌파하라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지시했다. (Walter LaFeber, 『America, Russia, and the Cold War, 1945-1996』 8th ed., McGraw-Hill, 1997, 113~114쪽.)
10월 2일 맥아더 사령관은 전 부대에 38선 돌파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명백히 유엔 안보리 결의문의 내용을 넘어선 것이었다. 미국은 뒤늦게 유엔에 추가 승인을 요구했고 10월 7일에야 유엔은 총회 결의 376(V)호를 채택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한반도 전체에 걸쳐 안정상태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으로 38선 북진 승인 여부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남았다.
유엔군의 북진은 중국을 자극했다.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10월 3일 주중 인도대사 카발람 파니카와 면담을 하고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내용을 미국에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결국 10월 16일 밤 중국군 제42군 124사단 370연대가 샤오젠페이 부사단장의 인솔 아래 압록강을 넘어 북한 영내 30km 남짓까지 진입했다.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252·264쪽.)
그러나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전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열린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맥아더 사령관은 중국의 참전 가능성에 대해 “개입의 공산은 극히 적다. …중략… 그들은 공군이 없기 때문에 만일 평양을 확보하기 위해 남하할 경우에는 사상 최대의 섬멸전에 의해 희생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고 “11월 23일의 추수감사절까지는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 때까지 제8군을 일본으로 복귀시키고 싶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이런 판단 아래 맥아더 사령관은 10월 24일 “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한 빨리 압록강과 두만강 선까지 진격”하라는 이른바 ‘추수감사절 공세’를 개시했다.
한편 같은 날 김일성 주석은 반격 준비가 일정하게 갖추어졌다고 판단하고 북한군 최고사령부 작전회의에서 전쟁 제3계단을 선포하여 “빠른 시일 내에 재진격으로 넘어가 공화국 북반부에 침입한 적들을 38도선 이남으로 구축하면서[쫓아내면서] 적의 역량을 부단히 소멸 약화시키는 한편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위한 모든 준비를 튼튼히 갖출 데 대한 (새로운) 전략적 방침”을 제시하였다. (『김일성전집 13』, 조선노동당출판사, 1995, 20쪽.)
김일성 주석은 당시 상황이 북한군 측에 유리하고 유엔군 측에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분석하였다고 한다. (리준항·김정철, 앞의 책, 86~88쪽.)
일단 북한군은 김일성 주석의 조처에 따라 후퇴 기간 병사, 사관, 군관을 과감히 등용하여 각급 군관학교에서 단기 강습으로 장교를 양성하고, 새로 조직한 예비부대를 후퇴해 들어간 북한군 연합부대에 편입시켜 주력부대를 급속히 확대하며 또 군수 생산도 확대하였다. 또한 전쟁을 통해 군인들이 김일성 주석의 독자적인 전법을 익히고 단련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중국인민지원군까지 참전하여 도움을 주었다.
반면 유엔군은 속전속결을 서두르며 전선 서부와 동부로 나뉜 2개 공격집단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연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수송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미8군과 미10군단이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 아래 독립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협동 과정에서 혼란이 많았다. 또 깊은 산악지대에서 엄동설한을 맞아야 하는데 이는 유엔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여기에 북한군 제2전선부대와 주민들이 직접 무장한 인민유격대가 후방에서 계속 유엔군을 공격했다.
이런 상황 판단 아래 김일성 주석은 총반격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10월 25일부터 전쟁 제3계단 제1차 작전을 시작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는 막대한 피해로 끝이 났다. 한국군 제6사단과 미군 제8기병연대는 부대가 와해하였으며, 한국군 제1·8사단, 미군 제1기병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 (강경표 외, 『한권으로 읽는 6.25 전쟁사』, 진영사, 2012, 211·226·227쪽.)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은 여전히 전황을 낙관하고 11월 24일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Home by Christmas)’ 작전을 명령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에 대비해 11월 17일 북한군 제2군단장에게 전쟁 제3계단 제2차 작전 방침을 명령했다. 김일성 주석은 “앞으로 진행할 작전에서 우리는 주 타격 방향을 전선 서부에 두고 전반적 전선에서 반공격으로 넘어가며 주력부대들과 적 후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2전선 부대들과의 배합 작전을 적극 벌여 적의 기본집단들을 청천강, 장진호반, 함흥, 청진 일대에서 포위 소멸하고 공화국 북반부의 전 지역을 적의 강점으로부터 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투성과를 38도선 이남으로 계속 확대하여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촉진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 작전적 방침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일성전집 12』, 조선노동당출판사, 418쪽.)
이에 따라 크리스마스 공세 바로 다음 날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이 총반격에 돌입하면서 유엔군은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한국군 제7사단은 덕천지역에서, 제2군단은 청천강에서 붕괴했다. 터키여단은 3분의 1 이상의 병력 손실을 보았다. 미군 제8군단은 심각한 붕괴 위기에 휩싸였고, 제2사단은 3천여 명의 사상자와 대부분 장비를 상실하여 완전히 와해하였으며 사단장은 직위에서 해제됐다. 특히 장진호 철수 과정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2·3중 포위를 당해 8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쟁’이라 부를 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강경표 외, 위의 책, 231~239쪽.)
결국 맥아더 사령관은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 철수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했으며, 연말에는 38선까지 후퇴했다. 동부전선은 퇴로가 차단돼 미10군단과 기타 패잔 부대들이 흥남항에서 해상으로 철수했다.
2. 미국의 요청으로 정전협상을 제안하다
두 차례 대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1950년 12월 14일 유엔 총회 결의 384(V)호는 “한국에서 원만한 정화(cease-fire)가 이뤄질 수 있는 근거를 결정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권고를 이행하기 위해 총회 의장을 포함한 3명의 그룹을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나스르알라 엔테잠 미국 주재 이란 대사 겸 유엔총회 의장, 레스터 피어슨 캐나다 외교부 장관, 베네갈 라우 유엔 주재 인도 대표 겸 유엔 안보리 의장이 정화 3인단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과 교섭에 실패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까지 북한에 내주며 후퇴를 거듭했다. 3월 14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하기 이틀 전인 12일 미8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는 “38도선에서 휴전이 된다면 유엔군의 대승리”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는 38선 이북으로 재진격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38선 부근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양측 모두 진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전선은 고착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김일성 주석은 전쟁 제4계단 전략적 방침을 제시하였다. 1951년 5월 30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등에서 김일성 주석은 “오늘 우리 앞에 나선 선차적 임무는 전선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미제의 대규모적인 무력 증강 책동에 의하여 조국해방전쟁이 장기성을 띠게 된 조건에서 완강한 진지 방어전을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김일성전집 14』, 조선노동당출판사, 1996, 64쪽.) 즉, 김일성 주석의 구상은 ‘튼튼한 방어진지를 만들어 현 전선을 지키면서 상대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한편 군대와 후방을 강화해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위한 조건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편 미국은 막대한 피해로 인해 난감한 처지에 있었다. 정전협상이 개시되기 직전인 1951년 6월까지 미국은 7만 8,800명의 인명 손실, 100억 달러를 상회하는 전쟁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이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첫 1년 동안 입은 손실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전쟁 승리의 전망이 보이지 않고, 미국 내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김상원 외, 『휴전회담 개막과 고지쟁탈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28쪽.) 정전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1951년 6월 들어 미국은 본격적으로 소련과 물밑 접촉을 시도한다. 6월 1일과 5일 전직 소련 주재 미국 대사였던 조지 케넌은 야코프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 대사를 만나 정전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형식적으로는 전쟁 당사국이 아니었던 소련이 먼저 정전협상을 제안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김상원 외, 『휴전회담 개막과 고지쟁탈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32쪽.)
이처럼 협상 제안을 복잡하게 가져간 이유는 정전협상을 먼저 제안한 측이 ‘패배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전쟁에 불리하니 정전협상을 제안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길 것을 우려한 미국은 북한이 먼저 정전협상을 제안해 자신이 ‘승리자’로 인식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북한은 이런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정전 담판을 먼저 제기하겠는가, 우리는 그 어떤 장기전도 할 수 있으며 적들의 온갖 군사적 모험을 철저히 짓부숴버릴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리준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조국해방전쟁령도사 3』, 사회과학출판사, 2013, 95쪽.)
1951년 6월 16일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이 휴전을 보장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23일에는 말리크 대사가 라디오 방송 연설을 통해 휴전을 암시했으며, 27일에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을 제안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6월 30일 리지웨이 사령관은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안했고, 7월 1일 김일성 주석과 펑더화이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공동명의로 동의를 표했다.
김일성 주석은 6월 30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결론 「미제의 정전담판 제의에 대한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립장」과 7월 초 내각 전원회의 등에서 정전협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제시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미국이 정전협상을 제의한 것은 패전을 인정한 것이며 정전 기간에 외국군대 철거를 요구할 수 있고 통일의 조건을 성숙시킬 수 있어 협상은 나쁘지 않다’라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리준항, 앞의 책, 96쪽.)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움직임을 격렬히 반대했다. 이 대통령은 정전논의가 본격화되기 전인 1951년 3월 24일 중국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에도 38선 휴전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에는 그로미코 차관의 휴전 제안 성명을 거부하였다.
결국 유엔군과 북한군, 중국 인민지원군은 한국 정부를 배제한 채 7월 8일 개성 북쪽 래봉장에서 예비회담을 열고 곧바로 10일 본회담을 개최했다. 본회담에는 터너 조이 미 극동 해군 사령관, 헨리 호데스 미8군 참모부장, 로런스 크레이기 미 극동 공군 부사령관, 알리 버크 극동 해군 참모부장, 백선엽 한국군 제1군단장이 유엔 측 대표로, 남일 대장(수석대표),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이 북한군 대표로, 덩화 중장, 세팡 소장이 중국 인민지원군 대표로 참석했다.
유엔군이 북한, 중국 인민지원군과 정전회담을 개최하기로 한 과정은 전적으로 미국의 판단 아래 이루어졌다. 트뤼그베 리 사무총장은 “미국은 유엔 총회나 안보리의 추가적인 허가나 지침 없이 정전이나 휴전협정을 체결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이상철, 「한반도 정전체제와 유엔사의 위상」, 가우리학문공동체, 2004.12.4.) 이는 사실상 미군이 유엔군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으며 유엔은 방관자 혹은 미국의 대리인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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