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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특집] ③ 북한은 왜 7.27을 기념하는가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3/07/17 [15:05]

[7.27 특집] ③ 북한은 왜 7.27을 기념하는가

김영란 기자 | 입력 : 2023/07/17 [15:05]

 

올해 7월 27일은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반도는 지금도 정전체제에 있으며 전쟁 위기가 상존한다. 정전협정이 어떻게 체결되었고 또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이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이고 또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여 이 땅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 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에 주권연구소는 7.27 특집을 준비하였다. 

 

차례

① 정전협상 과정과 특징 - 상

② 정전협상 과정과 특징 - 하

③ 북한은 왜 7.27을 기념하는가

④ 정전협정 파괴의 역사

⑤ 평화협정을 누가 가로막았나

⑥ 유엔사의 실체와 문제점

 

 

북한은 왜 7.27을 기념하는가

 

▲ 지난해 7월 27일 열린 북한의 전승절 기념행사 모습.  

 

1. 6월 25일과 7월 27일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멈췄다.

 

한국 정부는 한국전쟁을 유엔군의 희생으로 북한의 남침에 따른 공산화를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전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기준은 전쟁을 일으킨 세력의 의도가 실현되었는가 아니면 좌절되었는가에 있다.

 

정부의 주장대로라면 공산화를 막아냈으니 한국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북한으로부터 승리한 날인 7월 27일이 아니라 기습 남침을 받았다는 6월 25일에 더 의미를 부여하며 기념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인 1954년부터 ‘6.25의 날’로 기념식을 열었고, 1965년에는 시가행진도 했다. 그러다가 1973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6월 25일을 ‘6.25사변일’이라는 이름으로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2014년에는 이름을 ‘6.25전쟁일’로 바꿔 매년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 대부분 나라는 자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날을 기념하고 있다. 구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5월 9일을 ‘승리의 날’로 지정해 기념했고 러시아도 이를 계승하고 있지만 독일 침공이 시작된 6월 22일은 기념하지 않는다. 유럽의 많은 나라도 5월 8일을 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로 기념하지만 전쟁 발발일을 기념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11월 11일을 1차 세계대전 휴전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주장대로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고 3년의 전투 끝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면 정전협정을 체결한 7월 27일을 기념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 7월 27일을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이었다. 한국은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을 통해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정전협정 체결 또는 전쟁 승리의 의미를 담은 기념일이 아니라 ‘유엔군 참전의 날’로 지정했다. 

 

정부가 7월 27일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정했다면 이날을 기점으로 유엔군이 한반도에 들어왔거나, 참전과 관련한 의미 있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료를 살펴보면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과 전혀 무관하다.

 

먼저 한국전쟁 관련한 정부의 주요 자료는 유엔군이 1950년 7월 5일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 고개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이날 6시간 15분간 북한군과 전투를 했는데 패배한 것이 유엔군의 첫 전투라고 주장한다. 경기도 오산시는 이 전투를 기념해 ‘유엔군 초전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 (스미스 부대를 유엔군이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이글에서 다루지 않고 ⑥ 유엔사의 실체와 문제점에서 살펴본다.)

 

한국 정부가 지정한 ‘유엔군 참전의 날’보다 앞서 유엔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 죽미령 전투 사진 [사진 출처: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누리집]  

 

그러면 7월 27일 유엔군 부대가 대규모로 한국에 들어온 것일까?

 

한국전쟁 발발 후 6월부터 7월까지 한반도에 전투부대를 파견한 나라와 날짜는 아래와 같다.

 

▲6월 27일 미국의 해·공군 ▲7월 1일 미 지상군 ▲7월 14일 네덜란드 해군 ▲7월 26일 캐나다 공군 ▲7월 28일 프랑스 해군 ▲7월 30일 캐나다 해군, 뉴질랜드 해군.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누리집, ‘유엔군 참전일지’ 항목.)

 

7월 27일 유엔군의 참전과 관련한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7월 27일이 유엔군과 다른 연관성은 있을까?

 

유엔군이 만들어진 날은 1950년 7월 7일이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날 회의를 열고 통합군사령부, 유엔군을 만들기로 했다. 유엔 안보리는 7월 7일 안보리 결의 제84호에서 ▲병력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전 회원국은 병력 기타 원조를 미국 주도 하의 통합군사령부에서 사용할 것 ▲미국에 통합군사령관을 임명할 것 등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 결의에서 유엔군은 자국 국기와 유엔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6.25전쟁과 유엔’ 항목.)

 

즉 유엔군의 창설도 7월 27일과 무관하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한국전쟁 당시에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부로 넘긴 것은 7월 14일이다. 

 

7월 27일은 유엔군이 참전한 날도 아니고, 유엔군이 만들어진 날도 아니다. 유엔군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날이다. 그런데 왜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정했는지 의문이다. (전반 유엔군 문제와 관련해서는 ⑥ 유엔사의 실체와 문제점에서 다룬다.)

 

여기에 한국 정부는 6월 25일을 떠들썩하게 기념하고 있다. 중앙 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에서도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7월 27일 기념행사는 비교적 조용하게 넘어가고 있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기념일은 이해하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보면 7월 27일을 정전협정 기념일로 삼으면 되는데, 굳이 정전협정을 뺀 이유를 모르겠다. 그나마 올해(2023년)는 정부 행사를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으로 진행해 행사 이름에 ‘정전협정’을 넣기는 했다. 

 

반면 북한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인 7월 27일을 ‘전승절’이라 부르며 기념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침략으로 전쟁이 시작됐으며, 이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수호했다고 주장한다.

 

먼저 김일성 주석은 1950년 6월 26일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방송 연설에서 한국군이 6월 25일에 38선 전역에 걸쳐 38선 이북 지역에 대한 전면적 진공을 개시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북한의 군대가 38선 이북 지역에서 한국군을 격퇴하고 38선 이남 지역 10~15킬로미터까지 전진하여 옹진, 연안, 개성, 백천 등을 해방했다고 밝혔다. 

 

또한 이승만 정권이 오랜 기간 전쟁을 준비했고 그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 주석은 연설에서 “우리의 투쟁은 정의의 투쟁입니다. 승리는 반드시 우리 인민의 편에 있을 것입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한 우리의 정의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김일성 저작집 6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80, 9~16쪽.)

 

그리고 김일성 주석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다음 날, 평양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조선에서 정전의 달성은 외래 제국주의 연합세력을 타승하고 미 제국주의, 이승만 매국 도당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는 우리 조국 인민이 3년간에 걸친 영웅적 투쟁의 결과”라고 말했다. (「김일성, 1953년 남한을 전쟁 당사자 인정」, 중앙일보, 2013.7.27.)

 

‘외래 제국주의 연합세력을 타승’했다는 김일성 주석의 말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을 ‘쳐서 이겼다’라는 의미이다. 

 

▲ 1953년 8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열병식 모습.  

 

그리고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20주년이 되던 1973년에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경축 행사를 하고 있다. 

 

시종일관 북한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영토와 나라를 수호’했다는 관점으로 전쟁의 포성을 멈추게 한 날인 7월 27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 잊혀진 전쟁

 

미국은 가장 빨리, 가장 많은 병력을 한국전쟁에 투입한 나라이다.

 

미국은 전쟁의 발발 5시간 뒤인 6월 25일 오전 9시 30분에 전쟁 발발을 인지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주한미국 대사였던 존 무초는 미 국무부에 전쟁 발발을 보고했으며 미 국무부는 휴가 중이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트뤼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에게 한국전쟁 발발 사실을 통고했다고 한다. 

 

미국은 6월 27일(미국시간) 두 번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38도선 이남의 북한군에 대한 공격, 한국군 지원 등을 결정하고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이 내용을 훈령으로 전달했다. 이 결정으로 미국의 해·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됐고, 트루먼 대통령은 전투병 파병을 승인했다. 미 공군은 6월 27일 곧바로 한반도에 폭격을 시작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엔 안보리도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5일과 27일 연거푸 회의를 열었다. 

 

특히 6월 27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문 제83호를 통해 “무력 공격의 격퇴와 그 지역에서의 국제평화 및 안전의 회복을 위해 한국에 대해 필요한 원조를 할 것을 회원국에 권고”하여 회원국들의 한국전쟁 참전의 길을 열어놨다. 

 

회의 후에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룩셈부르크가 전투부대를 파견했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는 의료지원을 했다.

 

또한 유엔 안보리는 7월 7일 회의를 열어 미국 지휘 아래 유엔군이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했고, 미국이 유엔군 사령관을 맡도록 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기간 유엔군 지상군의 50.3%, 해군의 85.9%, 공군의 93.4%를 담당하면서 연 병력 178만 9천 명을 파병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국전쟁과 미국’ 항목.)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월등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2022년 8월 1일 기고 글에서 군사력 차이를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1950년 당시 북한군의 육군 병력은 1만 2,200명밖에 되지 않았고, 미국 육군 병력은 63만 명이었다. 미국 육군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6개월 동안 총 1,326대의 전차를 한반도 전선에 들이밀었는데, 북한이 보유한 탱크는 40대밖에 되지 않았다.

 

1950년 당시 미국 해군은 항공모함 31척과 전투함선 약 1,200척을 보유했고, 잠수함 32척을 한반도 전선에 출동시켰다. 그에 비해, 조선인민군 해군은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을 생각하지 못했고, 소형 어뢰정과 소형 경비정 30척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1950년 당시 미국 공군은 전투기 6종, 폭격기 2종, 정찰기 8종, 수송기 5종, 훈련기 1종을 실전에 배치했다. 맥아더 휘하에 있는 각종 작전기만 해도 1,172대나 되었다. 그에 비해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이 보유한 작전기는 136대밖에 되지 않았다.” (「한호석의 [개벽예감 502] 69년 뒤에 다시 읽는 7.27 명령서」, 자주시보, 2022.8.1.)

 

미국은 또한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제외한 당시 최신의 살상 무기를 총동원해 북한을 공격했다. 미 극동군은 폭탄 46만 톤, 네이팜탄 3만 2,357톤, 로켓탄 31만 3,600발, 연막 로켓탄 5만 5,797발, 기관총 1억 6,685만 3,100발을 한국전쟁에서 쏟아부었다. (「[곽봉호 칼럼]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서울투데이, 2023.6.24.) 

 

이처럼 대규모 병력과 최신의 무기를 한국전쟁에 투입했어도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폭탄을 투하하는 모습. [사진출처-영화 「초토화작전」갈무리]     

 

정전협정에 서명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1954년 출간한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서문에서 “이것(휴전협정에 조인한 것)은 사상 처음으로 승리 없는 전쟁의 휴전협정에 조인한 미군 사령관을 탄생시킨 것”이라며 한국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또한 한국전쟁 초기 미국 국방부 장관이었던 조지 마셜은 “신화는 깨지고 말았다. 우리는 남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강대한 나라가 아니었다”라고 말했고, 오마 넬슨 브래들리 미국 초대 합참의장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진행한 잘못된 전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국의 학계에서도 미국의 의도가 좌절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장상환 경상대학교 명예교수는 “전쟁의 진행 과정에서 유엔의 결의에 따라 유엔군이 결합했지만 실질적 내용은 미국의 한반도 군사 침략이었고 이렇게 북한군 대 미군의 전쟁으로 전화됨으로써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해보면 첫째, 한국전쟁은 미국의 의도가 좌절된 최초의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원 엮음, 『제국주의와 한국사회』, 한울아카데미, 2002, 162쪽.) 

 

그래서일까.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에 있는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에는 ‘잊혀진 전쟁’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잊으려 하는 분위기다. 

 

▲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에 있는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3. 7.27을 기념하는 북한

 

클라크 사령관은 회고록에서 북한의 갱도전, 해안가의 참호 그리고 산악지형 등으로 전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적었다. 또한 한국같이 산악지대가 많은 곳에서 전투에 이기려면 많은 해군과 공군의 지원이 필요한데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북한 공산군의 진지를 분석해보면 일부 지역에서는 후방 25마일(약 40킬로미터)까지 지하 보루로 되어 있기까지 했고 이러한 진지는 한국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연결된 것이었다. 그 구조는 너무나 견고해서 공중 및 야포 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은 사방으로 뚫린 방공 참호까지 구축했다. 그런 참호를 새로 구축한 고지들은 모두 우리로부터 점령한 고지들이다.” (마크 클라크,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165쪽.)

 

“우리가 상륙 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되는 전 해안선에 해안 방위선을 구축하고 병력까지 배치했다. (중략) 해안선의 방어조직도 전선과 같이 지하 시설에 의존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 역시 매우 깊숙이 확대 연장되어 있었다.” (마크 클라크, 앞의 책, 165쪽.)

 

북한은 군사력에서 열세였으나, 한반도의 지형에 맞게 군사전략을 구사해 미국의 공격을 무력화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정규군을 창건한 지 2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한국전쟁을 치렀다. 북한은 세계최강이라 하는 미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 김일성 주석의 군사적 ‘예지’와 전략 전술, 군사 전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첫 시기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되는 시기까지 김일성 주석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군사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직책으로 3년간의 전쟁을 진두지휘하며 전략전술적 방침을 제시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전쟁 발발 직후 즉각적인 반공격전을 개시하고 나라의 모든 사업을 전시체제로 개편할 것, ▲1950년 9월 중순부터 전략적 후퇴와 제2전선을 형성하며 유엔군의 배후에서 공격할 것, ▲38도선 인근에서 장기적인 대치 상태에 들어간 1951년 6월경부터 진지방어전, 갱도전을 할 것 등 다양한 전략적인 방침을 전쟁의 주요 시기마다 제시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미 제국주의를 타승한 위대한 전승의 력사는 영원할 것이다」, 조선중앙통신, 2012.7.25.)

    

특히 김일성 주석은 1951년 9월 23일 조선인민군 제256부대 지휘관들과 한 담화 「1211고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에서 “오늘 우리 앞에 나선 선차적 임무는 전선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미제의 대규모적인 무력 증강 책동에 의하여 조국해방전쟁이 장기성을 띠게 된 조건에서 완강한 진지 방어전을 하여야 합니다. 방어 진지들을 불패의 요새들로 만들려면 전연의 고지와 해안의 진지들을 철저히 갱도화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일성 저작집 6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80, 457쪽.) 

 

김일성 주석의 방침이 있었기에 유엔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북한군은 1211고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이 외에도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비행기 사냥꾼조 운동’, ‘탱크 사냥꾼조 운동’, ‘저격수조 활동’ 등 한반도의 구체적 지형과 실정에 맞는 ‘새롭고 독창적인 전술’을 구사해 한국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앞의 글.)

 

또한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북한군과 국민의 정신력을 끌어올려 전쟁 승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먼저 김일성 주석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에 서울 등을 찾아 북한군을 격려했다. 

 

1950년 8월 25일 자 김일성 주석의 명령서는 각 군 지휘관에게 작전명령을 하달하면서 문서 앞에 「서울에서」라는 기록이 첨부된 것으로 미뤄 적어도 이날은 김일성 주석이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미8군 정보문서에도 정확한 날짜는 명기되지 않은 채 김일성 주석이 개전 직후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나와 있다. (「<다시쓰는한국현대사>32<김일성명령서>전쟁 중 김일성 행적」, 중앙일보, 1995.6.25.)

 

또한 김일성 주석은 충청북도의 수안보와 전라도의 광주를 방문해 북한군을 격려하고 간부들과 회의를 하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은 1950년 8월 수안보에 있는 북한군 전선사령부를 찾아 군인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8월 10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그날 오후 8시경 수안보에 도착했다고 한다. 충주에서 수안보로 오는 길목에 ‘김일성 바위’라고 이름이 붙은 큰 바위가 있는데, 당시 김일성 주석이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 지시를 내린 바위라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광주 방문 (상)」, 현장언론 민플러스, 2021.8.16.)

 

▲ ‘김일성 바위’ [사진 출처-현장언론 민플러스]  

 

김일성 주석은 수안보에서 군인들을 격려하고 늦은 밤에 광주로 이동했다고 한다. 수안보 전선사령부의 지휘관들은 김일성 주석의 광주행을 강력하게 만류하였으나 김일성 주석은 뜻을 굽히지 않고 수행원 3명만을 동원한 채 광주로 출발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대전, 전주를 들러 일꾼들을 만나고 1950년 8월 11일 아침 광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서남 해안방어부대 지휘부를 돌아보면서 당면한 군사작전 문제와 관련한 지시를 했다. (「김일성 주석의 광주 방문 (중)」, 현장언론 민플러스, 2021.8.19.) 

 

그리고 김일성 주석은 북한 군인과 주민의 생활까지 살펴봤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1211고지를 지키는 부대장에게 전화로 “고지에서 싸우는 전투원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배들이며 혁명 전우들”이라며 “전투원들이 더운밥과 따끈한 국을 먹도록 해주고 잠자리도 춥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조선중앙통신, 앞의 글.) 

 

김일성 주석은 군인들의 건강을 걱정해 전선의 부대들에 콩을 보내주기도 했다. 전선 부대의 경우, 군인들에게 채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군인들이 비타민 결핍증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지휘관들에게 콩을 보내줄 테니 콩나물을 키워 군인들에게 먹일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김일성 저작집 6권』, 462쪽.)

 

또한 군인들을 위한 화선 휴양소와 전반적 무상치료제를 전쟁 중에 실시했으며 최고사령부에서 고아를 돌보며 키웠고, 서울에서 후퇴할 당시 서울시민의 땔나무까지 걱정했다고 한다. (조선중앙통신, 앞의 글.)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이런 활동은 군대와 국민의 사상의지력을 높이는 원동력으로 됐으며, 이 힘으로 한국전쟁에서 미국을 물리쳤다고 주장한다. 전 사회적으로 벌어진 전선 탄원 운동, 최고사령부를 끝까지 목숨을 바쳐 지키겠다는 의지, 미국과 사생결단하겠다는 각오로 나라를 지켰다는 것이다. (조선중앙통신, 앞의 글.)

 

클라크 사령관도 회고록에서 “한국전에서 공산 측의 지도력은 군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총망라하여 그것을 잘 융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라고 적어 북한의 주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북한은 평양에서 축포를 쏘며 전쟁 승리를 기념했고, 8월 15일에는 기념 열병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북한의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는 그날 김일성 주석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리영환외, 『조선통사 하』, 사회과학출판사, 2016, 231쪽.)

 

이로 봤을 때 북한은 3년간 한국전쟁에서 미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힘을 김일성 주석이 당과 군대, 국민을 잘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 같다.

 

북한은 해방된 지 5년, 정부 수립 2년 만에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전면전을 치렀다. 북한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이겼다는 자부심으로 7월 27일을 기념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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