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빨치산 출신으로 한평생 조국의 통일을 위해 헌신한 변숙현 선생이 지난 20일 낮 12시 45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0세.
빈소는 경기도 성남중앙병원장례식장 201호에 마련됐다. 추도식은 22일 오후 6시 장례식장에서 거행되며, 발인은 23일 오전 8시이다.
1924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1943년 북만주로 이주했다. 북만주에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에 대해 듣게 됐다. 선생은 항일투쟁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설렜다고 한다.
선생은 22살이던 1945년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한 박태원 선생과 결혼했다. (남편인 박태원 선생은 남로당 전라북도 장수군당 위원장을 지냈으며 46년 입산, 한국전쟁 중 사망했다.)
해방되고 남편의 고향인 전라북도 순창으로 돌아온 선생은 벽보를 붙이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47년 남로당에 입당했으며 1950년 빨치산으로 입산했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선생은 1952년 전라북도 순창군 용골산에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생포됐다.
선생은 회문산에서의 빨치산 활동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거기서는 서로를 존중하지.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여자나 남자나 평등헝께로. 하고 싶었던 공부를 원 없이 많이 했제. 참 좋았던 시절이었어. 행복하고.”
선생은 남원 포로수용소와 광주 포로수용소를 거쳐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 청주교도소에서 옥중 생활을 했다. 선생은 포로수용소와 감옥에서의 비인간적 대우와 전향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먼저 죽은 빨치산이나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굴함 없이 싸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0년, 동생의 도움으로 재심 판결을 받아 출소했다.
선생은 1990년 이후 통일광장과 성남여성회 등에서 활동을 하며 통일운동에 나섰다.
선생은 생전에 “사람은 참된 삶을 위한 실천으로 산다. 존재의 각성과 결단은 끝이 없다. 또 조국과 민중을 위한 혁명은 평생을 바칠 만큼 고귀한 것”이라며 “전사로서의 삶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래는 변숙현 선생 약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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