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1년 7개월이 지난 가운데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에서 전쟁을 둘러싼 부정적 반응과 체념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10월 2일(현지 시각)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키이우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를 맞아 발표한 성명에서 “승리는 직접적으로 우리(서방)의 협력에 달렸다”라면서 “우리가 더 강력하고 원칙적인 조처를 함께 시행할수록 전쟁은 더 빨리 끝날 것”이라며 더욱 많은 지원을 해줄 것을 호소했다.
영국 BBC에 따르면 로브 바우어르 나토 군사위원장은 10월 3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안보포럼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에서 사용되는 포탄, 무기와 관련해 “(탄약)통의 바닥이 보이고 있다”라면서 “훨씬 빠른 속도로 생산을 늘려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히피 영국 국방부 부장관도 연간 국내총생산의 2%를 방위비로 지출하기로 한 올해 7월 리투아니아 나토 정상회의 합의를 이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나토 회원국이 군사 지출을 늘려 우크라이나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는 말뿐인 희망사항에 가까워 보인다. 정치적 혼란을 겪는 나토 각국에서 지원 확대는커녕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분위기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토를 이끄는 미국의 혼란이 심각하다.
10월 3일 미 하원의장이 234년 만에 처음으로 해임되는 미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공화당 소속 매파 하원 의원 일부가 케빈 매카시 전 의장을 향해 ‘민주당과 손을 잡고 임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라며 해임안을 밀어붙인 결과다. 매카시 전 의장은 공화당 내 반발이 높은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전액을 민주당과의 협상에서 삭감시켰음에도 해임됐다.
이와 관련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다음에 협상할 때 매카시 의장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관해 (합의를) 하나 했다. (믿을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둘러싸고 바이든 대통령과 매카시 전 의장 간 합의가 있었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공화당 의원들이 같은 당인 매카시 전 의장 해임에 나선 건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은 하원이 미 연방정부의 예산 편성과 집행 권한을 쥐고 있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와 협상 여지를 남긴 매카시 전 의장은 해임됐고, 누가 새로운 하원의장이 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로써 바이든 대통령이 요구한 240억 달러(대략 32조 5,000만 원)의 우크라이나 지원금은 당장 심의조차 불투명해졌다.
이미 공화당 의원 상당수는 우크라이나 지원이 포함된 예산안을 극구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부하는 미 의회의 분위기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도에도 상당한 파장을 미칠 것으로 짐작된다.
우크라이나와 곡물 수입 문제 등으로 갈등 중인 인접국 폴란드는 미국보다 앞서 정부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거부를 선언했다.
CNN 등에 따르면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9월 20일 자국 방송과 대담에서 “우리는 (폴란드를) 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라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폴란드 등 동유럽 각국은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곡물 때문에 자국 농업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자 우크라이나 곡물 수입 거부 방침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우크라이나는 자국산 곡물 수입을 거부하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손해를 감수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오던 동유럽 각국의 분노가 폭발했다. 모라비에츠키 총리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거부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9월 30일 총선을 치른 슬로바키아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 중단을 공약으로 내건 사회민주당(아래 사민당)이 득표 1위를 했다. 사민당을 이끌며 차기 총리로 유력한 전 총리 로베르토 피초는 “우크라이나엔 탄약 한 통도 보내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고수 중이다.
일찌감치 우크라이나 지원 거부를 선언한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X(옛 트위터)를 통해 “애국자와 함께 일하는 것은 좋다. 기대된다”라며 피초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우크라이나를 향한 나토의 군사 지원이 제대로 됐던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독일이 숙고 끝에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전차의 상태는 전쟁에서 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9월 19일 영국 텔레그래프는 우크라이나가 독일이 제공한 레오파르트1 전차 10대의 결함을 발견해 수령을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는 이전에도 독일이 보내온 레오파르트1 전차가 기술적 문제 때문에 운용이 불가능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르쿠스 라이스너 오스트리아군 대령은 9월 19일 뉴욕타임스와 대담에서 “우크라이나군에 300대 이상의 서방 전차가 필요한데 지금까지 인도된 물량은 절반에 그친다”라고 털어놨다.
더구나 독일은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친미·친우크라이나 성향 사회민주당 연립 정권의 지지율이 저조한 가운데 정권 교체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독일에서 정권이 교체되면 ‘불량 전차’ 지원마저 중단될 것이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은 9월 26일 미국의 에이브럼스 전차 도입이 너무 늦고 적게 지원돼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지난 1월 에이브럼스 전차 31대 지원 방침을 밝힌 뒤 8개월이 지나서야 뒤늦게 전차를 보냈다.
겉으로는 우크라이나를 향한 대대적인 지원을 표방한 미 정부가 독일보다도 늦장을 부린 모양새다. 이는 미국 내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반대하는 여론, 전쟁에 깊숙이 개입해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혼란과 내부 분열이 심각한 나토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승기를 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점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반면 미국 주도의 제재에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러시아가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 전체의 전체 생산량보다 7배나 많은 포탄을 생산하고 있다고 9월 13일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또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 등을 통해 미사일과 무기 등 무기 제작에 필요한 핵심 부품을 조달하고 있다고 한다. 튀르키예가 나토 회원국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나토의 내부 분열로 풀이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나토의 군사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토의 지원 거부는 사실상 ‘러시아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토의 내부 분열과 불만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제 발등 불 끄기에 급급한 나토 회원국의 각자도생(제각기 살아나갈 방법을 꾀함) 분위기가 확산할수록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료가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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