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한 오라버니
이창기 기자님은 나의 남녘 생활에서 너무나 큰 여운을 주고 감동을 선물해 준 참으로 잊지 못할 소중한 분이시다.
그분은 무엇이든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제일 먼저 의논하고 조언을 받고 싶었던 동지였으며 웅심깊고(생각이나 사랑이 매우 넓고도 깊고 겉에 잘 드러나지 않으며, 무게 있고 경솔하지 않다는 뜻 -편집자 주) 따뜻한 오라버니이기도 하셨다.
내가 이창기 기자님을 만난 것은 고향으로 돌아갈 단 하나의 각오로 밀항, 위조여권, 자진간첩 등의 행위로 수감 생활을 겪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2016년 여름이었다.
당시 대구에 거주하고 있어 송환 기자회견이나 집회 등 일정으로 자주 서울에 와서 며칠을 묵어가곤 하자니 늘 부피가 큰 무거운 배낭 가방을 지고 대구와 서울을 오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이런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내가 머물고 있는 낙성대 만남의 집으로 예쁘고 귀여운 여행 가방 한 개를 가지고 오셨다.
그러고는 가족과 헤어져 가뜩이나 마음이 무겁고 아플 텐데 무거운 배낭을 지고 힘들게 다니지 말고 몸이라도 가볍게 다니라며 여행 가방을 건네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다시 더 크고 멋진 여행 가방을 가지고 오셨다. 저는 저번 것도 너무 좋으니 괜찮다고 하였으나 그건 집에서 쓰던 것이니 새 여행 가방을 쓰라고 굳이 고집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고향의 부모님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홀로 선 낯선 땅에서도 혈육의 정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오라버님처럼 느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분단의 비극으로 산생된 나의 이별의 고통과, 70여 년을 북을 악마화하는 무서운 반북 프레임에 갇혀 형제의 땅인 북녘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는 남녘 분들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는 길을 제일 먼저 열어준 분도 바로 이창기 기자님이셨다.
그분으로 하여 2016년 9월 나의 생애에 처음으로 기고 글을 자주시보에 올릴 수 있게 되었고 그 글을 바탕으로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라는 나의 저서가 태어날 수 있었다.
언젠가는 북녘의 선수들이 경기를 마치고 인천공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런 생각도 타산도 없이 무작정 인천공항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그때에도 이창기 기자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나와 함께 인천공항까지 함께 가주셨고 끝내 경찰들에게 붙잡혀 끌려다닐 때도 늘 곁에서 나를 챙겨주셨고 나의 아픔을 위로하며 더 아파해 주었다.
이처럼 현장취재와 여러 가지 활동으로 늘 시간을 쪼개가는 바쁘신 분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오라버니의 정으로 나를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맛집으로 데려가 함께 시간을 보내주며 무너지거나 지치지 않도록 항상 힘과 밝은 웃음을 선사해 주곤 하셨다.
이창기 기자님과 함께한 2년, 비록 13년간의 남녘 생활에서 길지 않은 2년이었지만 나의 타향살이에서 큰 자리를 잡은 귀중한 시간이었고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오늘 오랜만에 그 추억을 떠올리며 또 한 번 깊은 생각에 잠겨보며 다짐한다. 오라버님이 바라시던 대로 쓰러지지 말고 부러지지 말고 굳세게 나의 길을 끝까지 꼭 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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