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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이창기] ⑬ 헌신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창기 형

편집국 | 기사입력 2023/11/19 [09:20]

[내가 기억하는 이창기] ⑬ 헌신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창기 형

편집국 | 입력 : 2023/11/19 [09:20]

올해 11월 18일은 이창기 기자의 5주기입니다. 이창기 기자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추모 글과 시를 소개합니다. 열세 번째는 자주민보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보내온 글입니다. (편집자 주)

 

▲ 이창기 기자. 

 

 

헌신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창기 형

 

어느덧 창기 형이 떠난 지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비록 육체의 삶은 마감되었지만, 아직도 형을 잊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형이 남긴 삶의 흔적을 지금도 기억하고 찾고자 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잊힌 삶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에게 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월간 자주민보 발행인이자 기자였던 창기 형을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가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 진출을 고민하던 시기였습니다. 학교 앞까지 찾아와 자주민보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하셨고 저는 며칠 고민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다음날부터 전화로 집요하게 함께 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창기 형은 대치동에서 유명한 논술학원 강사 일도 했습니다. 강사 일로 얻은 수입 대부분은 자주민보 발행비용으로 충당되었고 학원 일이 끝나면 그때부턴 발행인이자 기자 역할로 자주민보 발간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창기 형을 겪은 분들이 공통되게 느꼈던 건 항상 잠이 부족하고 새벽까지 글과 기사를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창기 형은 현실적으로 이중삼중의 일을 하다 보니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해 새벽까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시대의 상황을 떠난 한 인간의 삶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민족 분단과 그로 인한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는 현실 속에서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극복하고자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열정을 자주민보 발행에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간염을 앓고 있던 형에게 충분한 휴식은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지만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 없이 분석 글, 현장취재, 학원 일, 가정생활을 병행했습니다. 

 

현재 주어진 일에 만족을 모르고 자주민보를 성장시키고 부단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 실력을 갖추기 위해 밤새 연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은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도 하기 어려운 고된 일이었지만, 창기 형은 힘든 내색 없이 주어진 역사적 사명감과 책임으로 인식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형은 항상 자기 스스로 강한 요구성을 제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구성이 높지 못하면 기사가 정체되고 생동감을 잃게 된다는 점을 늘 강조했습니다. ‘민족자주언론 조국통일 언론 실천’ 월간 자주민보의 기사가 많은 사람의 활동에 긍정적 효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얘기하곤 했습니다. 예리한 정세분석 글도 중요하지만 학생 운동의 모범 사례를 발굴하고 전파하는 일에 무척이나 애정과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학생 운동의 모범 사례를 찾아서’라는 지면을 만들고 정기적으로 취재를 다녔습니다.  학생회 사업, 동아리 운영, 연대 활동, 출범식 준비 사례 등 어느 단위에서 모범적 사례가 알려지면 현장에 내려가든지 시간이 없을 땐 장시간 전화 통화를 통해서라도 모범의 원인과 동기, 성과와 경험을 찾아 일반화, 전국화하기 위한 기사가 매월 정기적으로 발행되었습니다. 

 

효과는 좋았고 여러 단위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의 인사도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기사를 보고 우리 단위도 해 볼 수 있겠다는 집단적 혁신 결의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창기 형의 웃는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창기 형은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불같은 열정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늦은 밤 활동을 잠시 접고 집에 내려간 친구를 꼭 만나기 위해 무작정 차를 몰아 아침까지 기다려서 만나야 직성이 풀렸고 한 번 지역에 내려가면 강연, 취재, 구독 사업, 지역 원로 선생님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나서야 올라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1박 2일로 예정된 지역 일정이 2박 3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자주민보 활동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고초도 겪었고 사람들이 여러 사정으로 자주민보 활동을 그만둘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포기를 모르고 아무리 힘들 다해도 가슴속에 품은 뜻을 버리지 않고 더 많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주민보 기사 한 줄이 훗날 조국에 조금이나 보탬을 주게 될 그날을 상상하지 않았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기 형은 지금 어려움보다 먼 미래 우리 앞에 펼쳐질 새로운 세상을 확신했고 더 꿈꾸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바쁜 날에도 원로 선생님들과 자주민보 일꾼들의 부모님도 알뜰하게 챙기는 분이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원로 선생님들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선생님들을 직접 모셔 나들이도 가고, 인터넷 자주민보 시기에는 기사를 직접 출력해 가져다드리는 일을 거르지 않고 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지들의 부모님이 아프시면 자신의 부모님이 아픈 것처럼 병원이나 집까지 직접 찾아가 위로를 하고 손을 잡아 드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손을 잡아 준 창기 형을 고마워하고 기억하고 때때로 너무 젊은 나이에 돌아간 것에 대해 지금도 안타깝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여전히 창기 형은 뜨겁게 기억되고 있고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가슴속에 더 또렷하게 추억되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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