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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본 한신(阪神)교육투쟁 탄압의 원흉은 미국이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4/25 [11:55]

[기고] 일본 한신(阪神)교육투쟁 탄압의 원흉은 미국이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4/25 [11:55]

어제는 1948년 4월 24일 일본 오사카(大阪)와 고베(神戸)를 중심으로 일어난 한신 4.24교육투쟁 76주년이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일본은 이날을 ‘종전’ 기념일로 삼는다. 사실 8월 15일은 일왕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했다고 국민에게 라디오 방송으로 ‘종전조서(終戰詔書)’를 발표한 날이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패전의 굴욕을 지우고 희생자 추모를 위한 날임을 강조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다. 

 

일본이 정식 항복 문서에 서명한 것은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 전함 미주리(Missouri)호 선상에서다. 그래서 미국과 옛 소련의 대일 전승 기념일은 9월 2일이며, 러시아와 중국, 몽골은 9월 3일을 항전 승리 기념일로 삼는다. 

 

‘포츠담선언’은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 제거와 민주주의와 기본적 인권 확립을 요구하고 평화적인 정부 수립을 명하고 있었다. 즉 천황주권이라는 메이지 헌법 폐지가 일본 항복 후 연합국의 점령 정책의 기본 성격이었다.

 

연합국에 의한 일본 점령은 사실상 미국의 단독 점령이었다.

 

일제 패망 당시 일본에는 사할린을 제외하고 무려 200여만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재일조선인은 귀국을 서둘렀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온 조선인은 여러 부류가 있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도일(渡日) 조선인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조선의 토지를 대량 약탈하여 ‘국유지’, 즉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인을 대거 조선에 이민시켜 약탈한 토지를 불하하고 일본인 지주를 양산했다. 조선은 자연히 지주와 소작농의 수가 급증했고 농촌은 파산되어, 소작농은 실제로 농사를 지어도 먹고살 수 없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시장으로 유입되는데, 첫 번째 부류의 도일(渡日) 조선인이다.

 

두 번째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이었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전역(戰域)이 확대된다. 일본의 농촌이나 공장, 광산의 노동력은 전선에 동원된다. 그래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어 강제 연행이 시작된다. 

 

일본의 자본가는 저렴한 임금과 동시에 일본인이 꺼리는 위험하고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강요할 수 있는 식민지 노동력, 특히 조선인을 선호했다. 

 

강재언의 『일제하 40년사』(풀빛, 1984)에 나오는 강제 연행 기록이다.

 

“1939년부터 5년간에 걸쳐 100만 명이 늘어났는데 그중에서 강제 연행, 즉 억지로 끌려온 사람이 66만 7천여 명이었다. 이들은 여러 곳에 배치되었지만 31만 8천여 명이 탄광, 그 나머지 중 7만 5천여 명이 금속광산이었다. 반 이상이 지하에서 일한 셈이다. 그 다음이 10만 7천여 명으로서 군수공장 및 군사시설을 건설하는 토건 일이었고 나머지 11만 6천여 명이 기타의 산업에 종사하였다.

(중략) 후생성복원국(厚生省復員局)의 발표에 따르면 군인·군속으로 동원된 사람이 36만여 명이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일본 본토에만 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의 전역(戰域)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다.”

 

또한 강재언은 우가키(宇垣) 총독 시대에 그 비서역을 맡았던 가마다 사와이치로(鎌田澤一郎)의 강제연행 시행 방법을 그의 저서인 『조선신화(朝鮮新話)』를 인용해서 밝힌다.

 

“설득해서 응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는 여간해서 예정한 수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군(郡)이나 면의 노무계가 심야나 이른 새벽에 돌연히 남자가 있는 집의 잠자리를 덮치거나 밭에서 일하고 있는 때를 노려 트럭을 대어놓고 가차 없이 태운다. 그런 다음 집단을 편성하여 홋카이도(北海道)나 규슈의 탄광으로 보내 그 책무를 다하게 한다. 이러한 난폭한 짓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미연합군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의 재일조선인 정책

 

1946년 3월 18일에 미연합군사령부의 명령으로 일본 정부에 의한 조선인, 대만인의 등록이 시작됐다. 

 

강재언의 같은 책에서 나오는 조선인 등록 내용이다.

 

“그때에 등록된 재일한국인 수는 64만 6천 943명으로서 1945년 8월 15일부터 이때까지의 불과 7개월 사이에 무려 140만여 명이 일시에 귀국한 셈이다. 이때도 일본 정부가 따로 배를 배치시켜 계획적으로 귀국시킨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무리를 이루어 배를 빌리거나 사서 또는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배를 이용하기도 하는 등 갖은 수단을 다하여 귀국했던 것이다. 하카타(博多), 시모노세키(下関), 센자키(仙崎) 등에는 귀국하기 위해 일본 각지에서 몰려든 한국인들로 붐볐다. 철도 연변의 주요 역 부근에는 천막까지 치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이 역(驛)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 암시장의 시작이다. 오사카 역전에도 대규모의 암시장이 있었다. (중략) 그리고 귀국 준비로서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한 국어 강습소도 점차 한국인학교로 바꾸어 갔다.”

 

초기 일본 점령군 미연합군사령부는 재일조선인을 일본 패전 국민과는 구별되는 사람들이라고 간주했다. 조선인 자신도 해방 국민이라 규정했다.

 

그러나 1946년 봄부터, 재일조선인에게 기차표 등으로 특별 배려하던 것이 전혀 없어지고 “즉시 귀국하면 이에 대한 조건은 보장한다. 그러나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무르는 사람은 일본 국적을 잠재적으로 보유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라고 점령군은 입장을 바꾼다.

 

잠재적으로 일본 국적을 보유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실질적인 권리의 측면에서 일본 국민과 다른 특별한 우대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일본 사회의 법령에 복종해야 하며 점령군 아래에서 새롭게 창출되는 제 법령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을 원하는 재일조선인은 늘어났다. 

 

민족학교 탄생과 재일조선인의 일본 잔류

 

해방 직후 가까운 장래 고국으로 돌아올 날을 꿈꾸며 아이들에게도 최소한의 필요한 조선어를 알게 해야겠다는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헌신으로 옛날 서당과 같은 작은 민족학교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1945년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조련)이 출범하기 전부터 민족교육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련은 일제 패망 후 얼마 되지 않아 재일동포 사회에 만들어진 유일한 대중단체였다. 그리고 10월 15일부터 16일에 걸쳐 조련이 정식으로 결성대회를 갖고 출범한다. 한반도 이남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활동과 비슷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조련이 탄생하면서 조선어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체계를 갖추게 됐다. 

 

1946년 민족학교의 모습은 교실이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노천에 책상과 의자만 갖추고 공부하는 아주 열악한 상황이었다.

 

조련은 조선인의 생활과 인권을 지키는 일과 함께 교육에 가장 주력했다. 그래서 소학교 단계인 초급학교의 아동 수는 1948년 초에 4만 9천 명으로 절정에 이른다. 대체로 조선인 자제 중의 60% 이상이 민족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선생들은 독특한 식견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예를 들어 문학 수업 시간에는 여러 가지 풍부한 속담이나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며 틀에 박힌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한다. 

 

선생들 또한 해방 전부터 고생하면서 공부해 온 지식인들로 그동안 축적해 온 지식을 총동원하여 아이들 지도에 열중했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은 지식만이 아니라 일본에서 살아가는 방법과 민족의 긍지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매우 생기있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7년이 되면서 재일조선인의 귀국 열은 급속히 식어간다.

 

대부분 재일조선인은 99%가 이남 출신이었는데, 이남은 미군정과 친일 악질 민족 반역자 등용으로 정치 상황이 혼란에 빠졌다. 이남에서 미군정은 일본보다 가혹했다.

 

일본에서는 미연합군사령부가 간접 통치를 하였지만,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직접 지배했다. 더구나 1948년이 되자 미군정은 친미 사대주의자 이승만을 이용해 단독정부를 출범시키고 대통령에 앉혔다.

 

재일조선인은 정세가 불안한 이남에 귀국하는 것보다 일본에 잔류하는 사람이 자연히 많아지게 된다. 이제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 살기 위해 재일본조선인연맹(후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총련)과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在日本朝鮮人居留民團, 민단)으로 뭉친다.

 

미연합군사령부와 재일조선인 교육정책과 한신교육투쟁

 

1947년 10월 미연합군사령부는 일본 정부에 “재일조선인을 일본의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에 따르게 하도록” 지시했다. 1948년 1월 24일 문부성은 각 도도부현(都道府縣) 지사에게 「조선인 설립 학교의 취급에 대해서」를 통해 재일조선인 자녀는 법적 기준에 합당한 학교에 취학할 것과 교사는 일본 정부가 정한 기준에 합당한 사람만이 강의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본인 학교 건물을 빌려 쓴 조선인학교의 철수와 교과 내용은 학교교육법에 따라 모두 일본어로 교육하고, 조선어는 과외로 학습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일본 정부는 1948년 3월 24일, 다시 1월 24일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으면 학교를 강제로 폐쇄하겠다고 하면서 일본 전역에 재일조선인의 민족학교에 대해 강제적 폐쇄 명령을 내렸다.

 

재일조선인 학교 폐쇄에 대해 최초의 대규모 반대 투쟁은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였다. 이후 4월에 들어서는 히로시마(廣島), 오카야마(岡山), 효고(兵庫), 오사카(大阪) 등지로 투쟁이 확산한다.

 

오사카에서는 4월 23일, 24일, 26일 조선인학교 폐쇄 반대 인민대회가 열렸다. 일본은 해산 명령을 내리고 3분 이내에 해산하라고 했다. 1만 명 가까운 사람이 3분 이내에 해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사카 경찰은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학교의 생도를 포함하여 8천 명을 동원했다. 일본 경관의 발포로 소년 김태일이 사망했고, 검거된 사람은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다행히 5월 3일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 책임자와 문부대신 간에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을 따른다. (중략) 사립학교의 자주성 범위 내에서 조선인의 독자적인 교육을 행하는 것을 전제로 사립학교로서의 인가를 신청한다”라는 각서가 교환되어 이듬해 1949년 탄압 때까지 민족학교는 지켜졌다. 그러나 1949년 10월 다시 학교 폐쇄 명령이 내려져 전국 대부분의 민족학교가 폐쇄된다.

 

한신교육투쟁 탄압의 원흉은 점령군 미연합군사령부이다.

 

그러나 조련은 굴복하지 않고 조직적인 대응을 했고, 재일조선인은 일본 전역에서 전면적인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은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에 의한 전면적인 반일 투쟁으로 이념의 벽을 넘은 전 민족적인 투쟁이었다. 

 

이 투쟁에 대해 조련은 4월 24일을 우리말, 우리글을 지킨 ‘교육투쟁 기념일’로 정했다. 그리고 투쟁의 중심이 된 오사카와 고베의 한자를 따와서 한신(阪神)교육투쟁이라 불렀다.

 

제주 4.3을 주제로 한 대하소설을 쓴 김석범(1925년, 일본 오사카 출생)의 『화산도(6)』에는 한신교육투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지난 4월에 한신(阪神) 조선인 교육 사건 등이 있어서, 조선인학교의 폐쇄나 조선인 단체의 해산과 같은 야만적인 탄압이, 그야말로 일본 경찰의 무장 탄압이 지금도 전국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재일조선인은 해방 후 3년이 채 못 돼서 큰 곤경에 처하고 말았지만요. (중략) 나는 이래 봬도 오사카부청 앞까지 조선인학교 폐쇄 반대 데모 행진에 참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소방차의 살수를 맞고 날아가면서 눈앞에서 한 소년의, 열네 살 소년이 경찰에 사살되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목격했어요. (중략) 나는 흠뻑 젖은 채 경찰봉의 난타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근처에서 들린 총성에 놀라 뒤돌아보니, 소년이 물에 젖은 채로 아스팔트 노상에 쓰러져 있더군요. 놈들은 무방비의 조선인 데모대에 실탄을 쏜 겁니다.”

 

한신교육투쟁은 계속된다!

 

한신교육투쟁 이후 일본 사회는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을 현재까지도 수시로, 또 노골적으로 수없이 많이 벌이고 있다. 아직도 교육투쟁이 지속되고 있다.

 

재일조선인과 아이들이 일본 사회로부터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현재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에게 행하고 있는 차별 정책은 단순한 차별을 넘어 우리 민족에 대한 명백한 탄압이다. 일본이 민족교육을 말살하기 위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까지 노골적으로 차별을 가하는 것은 치졸하고 파렴치한 ‘국가폭력’이다.

 

작년 조선학교 아이들이 자주 지나는 지하철역에 게시된 현수막에서 ‘조선인 죽이기 모임’이라는 낙서가 발견되는가 하면, 지하철역에서 한 일본인 남성에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발을 짓밟힌 학생도 있으며, 동포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훼손되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학교로 협박 전화가 오기도 하고, 심지어 실제로 찾아와 교문 앞에서 혐오 집회를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재일조선인 차별은 일본 정부의 묵인, 방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뼛속까지 친일주의자인 윤석열은 저자세 친일행각으로 민족과 조국을 배반하고 미국과 일본의 국익을 위한 외교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징용·징병 강제동원 배상 부정,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해양투기 등 모든 것에 대해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 지역화와 일본의 재무장 길을 열어주고, 자위대의 한국 출병도 가능하게 한 것을 보면 (윤석열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일본의 식민 지배, 전쟁범죄에 면죄부까지 바치고, 군사 대국화하고 있는 일본과 협력하겠다는 윤석열의 행태는 항일 애국 투사와 선열들에 대한 모독이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는 그동안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 온 우리 민족의 수많은 투쟁에 대한 폄훼이며 훼손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에 ‘고교무상화’, ‘유보무상화(유치원·보육원 무상화)’ 등 교육 평등권을 보장하라!

 

일본 정부는 민족교육을 탄압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당장 중단하라!

 

UN인권위원회, 아동권리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사회권규약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국제 인권 단체의 권고대로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 정책을 즉각 시정하라!

 

윤석열 정부는 대일 굴욕 외교 당장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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