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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준65] ‘중간 단계’를 둘러싼 한미의 진실 게임

문경환 기자 | 기사입력 2024/05/17 [09:39]

[정조준65] ‘중간 단계’를 둘러싼 한미의 진실 게임

문경환 기자 | 입력 : 2024/05/17 [09:39]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대양주 담당 선임보좌관은 3월 4일 한국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비핵화로 가는 과정에서 역내와 세계가 보다 안전해질 수 있다면 중간 조치를 고려할 것”이라며 미국 행정부의 당국자로선 처음으로 한반도 비핵화의 ‘중간 단계’를 언급했습니다. 

 

이후 정 박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 겸 대북특별부대표도 한 세미나에서 “궁극적인 비핵화로 향하는 과정에 중간 단계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라고 밝히면서 미국 내에서 중간 단계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음을 공개했습니다.

 

중간 단계란 고도화된 북한의 핵능력 발전을 막기 위한 조치로, 완전한 비핵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인식 아래 그것을 장기적 과제로 설정하고 당장은 핵동결에 집중하는 방안입니다. 중간 단계는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입니다.

 

4월 27일 장호진 대통령 국가안보실장은 KBS ‘남북의 창’ 특별대담에 출연해 “미국의 상당한 고위층을 포함해서 여러 차례 ‘중간 단계’라는 것은 없다고 확인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 장호진 국가안보실장.  © 외교부


그런데 장 실장이 이야기한 것과 전혀 다른 말이 미국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4월 30일 미국 NSC 대변인은 ‘중간 단계는 없다고 확인했다’는 장 실장 발언과 관련해 “미국은 중간 단계 조치를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북한과의 신뢰 구축과 비핵화를 향한 진전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또 “우리는 북한이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러한 대화에는 전제조건이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라며 또다시 ‘조건 없는 대화’를 북한에 요청했습니다. 

 

장 실장과 미국 중 어느 말이 맞는 걸까요? 

 

미국 NSC 대변인이 ‘미국과 한국이 중간 단계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엔 답변하지 않아 논란은 더욱 커졌습니다. 한국 외교부는 중간 단계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해석한 것이라는 취지로 해명했지만 그리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장 실장이 거짓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중간 단계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들은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경우입니다.

 

만약 장 실장이 거짓말을 했다면 의도가 있을 겁니다. 아마 윤석열 정부는 중간 단계가 마음에 들지 않고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과 등을 돌리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핵을 인정하고 협상해야 하는 중간 단계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중간 단계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어떻게든 윤석열 정부는 중간 단계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 미국에 맞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미국 고위 당국자라는 모호한 출처로부터 ‘중간 단계는 없다’고 들었다는 거짓 정보를 언론에 흘려서 우회적으로 자기 뜻을 표명했을 수 있습니다. 

 

둘째, 미국 내에서 나오는 말이 다를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대북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 본토로 날아올 수 있는 북한 핵미사일을 막는 것입니다. 미국은 어떻게든 북한의 핵위협을 낮추는 것이 대북 정책의 목표입니다.

 

겉으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부르짖지만 사실 그것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능력이 나날이 발전하여 시간이 갈수록 미국을 옥죄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 중간 단계 조치입니다.

 

그런데 만약 중간 단계를 추진한다면 미국이 북한에 완전히 밀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동안 자신의 대북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도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그냥 추진하기는 싫을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대북 정책에 대하여 같은 사람도 수시로 생각이 바뀌고 고위 당국자끼리도 의견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상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장 실장에게 ‘중간 단계는 없다’고 말한 미국의 한 고위 당국자가 잠자리에서 북한 핵미사일이 미국으로 날아오는 악몽을 꿉니다.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중간 단계가 아니면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후 기자가 중간 단계에 관해 물어보자 중간 단계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답변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중간 단계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한 고위 당국자가 장 실장에게 자기 생각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NSC 대변인은 생각이 달랐기에 중간 단계를 당연히 할 것이라고 답했을 수 있습니다. 백악관 내에서 제각각 생각이 다르며, 그것이 조율조차 되지 않고 있어 각자 생각나는 대로 그때그때 답변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셋째, 미국이 거짓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미국이 거짓말을 했다면 미국은 실제로 중간 단계를 실행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한국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중간 단계가 미국이 북한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나왔다면 ‘우리는 다 계획이 있고 북한 비핵화는 곧 실현된다’고 자신 있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간 단계는 미국이 북한에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조치라서 미국이 한국에 설명하는 것이 떳떳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차하게 변명하느니 그냥 거짓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간 단계는 미국이 한국에 한 약속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미국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대북 적대 정책, 대북 강경 정책을 부추겨 북한과 단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줄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만 믿고 북한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미국의 돌격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미국이 북한 핵을 인정하고 협상하는 중간 단계로 간다면 이것은 한미동맹의 근간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만약 중간 단계가 본격적으로 추진된다면 한국은 자체 핵무장을 추진하겠다고 떠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미국도 북한에 밀려 저 모양인데 우리가 저런 미국을 어떻게 믿느냐’면서 북한과 관계 개선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진실을 숨기고 장 실장에게 거짓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과의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나름대로 찾은 해법이 중간 단계입니다. 미국은 중간 단계로 북한과 협상을 해보려고 하지만 북한은 중간 단계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실현 가능성도 희박한데 미국 내에서 이견 조율이 안 되고 한국을 설득하는 것도 어려워 보입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미국이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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