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패권이 몰락하면서 중동지역에 배치된 미군이 거점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됐다. 미국과 가까웠던 중동 각국이 이란의 눈치를 보며 미군의 군사시설 이용을 제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난 3일(이하 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의 동맹인 아랍에미리트(UAE)는 미국 측에 사전 통보 없이 예멘과 이라크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예멘과 이라크에는 미국에 대항하는 친이란세력들이 있다. UAE 정부는 미국의 군사작전을 도우면 자국이 이란의 표적이 될 것으로 우려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UAE는 미군을 향해 아부다비 알 다프라 공군기지에 주둔시킨 전투기와 드론으로 예멘과 이라크를 공격하려면 미리 허락부터 받으라고 통보했다.
이와 관련해 UAE 당국자는 월스트리트저널과 대담에서 “해당 제한 조치는 이라크와 예멘의 목표물 공격 임무에 대한 것”이라며 “UAE의 자기방어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미국은 중동 각국의 군사시설에서 후티 반군과 헤즈볼라 등 친이란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전투기와 함대를 출격시켜 왔다. UAE는 친이란세력이 자국 군사시설에 보복할 가능성을 차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미 국방부는 전투기와 드론 등을 인근 카타르 알 우데이드 공군기지로 옮기고 있다고 한다. 또 중동지역도 아닌 동아프리카 지부티의 군사시설을 이용할 것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를 두고 미군이 오랜 동맹인 UAE의 ‘눈치’를 받으며 전투기를 싸 들고 이동하는 신세가 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분쟁에 엮이기 싫은 중동 각국과 군사작전을 벌이려는 미국 간 긴장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UAE의 통보를 두고 미 정부 내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감지된다.
군사시설 사용 제한 통보에 관해 사브리나 싱 미 국방부 부대변인은 “(중동 내 미군 주둔에 관한 파트너십은) 중동 내 동맹국의 안보와 안정을 돕는 협력을 위해 여전히 중요하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정작 UAE의 미군기지 사용 제한 결정과 관련해서는 답을 거부했다. 싱 부대변인은 관련한 합의가 있었다면서도 합의 날짜와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이를 볼 때 합의에는 미국에 불리한 내용이 담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미군이 중동지역에서 떠돌이 신세가 된 모습은 이미 석 달 전부터 나타났다.
지난 2월 14일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UAE 등 중동 각국이 미군을 대상으로 자국에 있는 군사시설의 이용을 제한했으며, 점점 더 강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폴리티코 보도에서는 UAE뿐만 아니라 중동의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군사시설을 제한하고 있다’고 한 점이 눈에 띈다.
보도에 따르면 중동 각국은 ▲미국이 자국 군사시설을 이용해 이라크, 시리아, 홍해 등에서 친이란세력을 공격하는 것 ▲미국의 보복 공격에 사용된 전투기 등이 자국 기지에 접근하거나 비행하는 것을 제한했다.
이를 보면 UAE뿐만 아니라 다른 중동 각국도 미군의 움직임을 제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미군 전투기와 드론을 대상으로 한 UAE의 최근 통보는 미군의 움직임을 더욱 강하게 제한하는 조치로 보인다.
당시 미 당국자는 폴리티코에 중동 각국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민간인 집단학살을 벌이는 점을 우려하며 이란과 긴장 완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서방 당국자는 UAE가 미군의 군사시설 이용을 제한한 이유에 관해 “이란에 맞서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고, (국내) 여론 때문에 서방 및 이스라엘과 너무 밀착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전에는 군말 없이 미국을 따르던 중동 각국이 지금은 미국에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현상으로 미국의 힘이 약해진 상황을 보여준다.
특히 무하마드 시아 알수다니 이라크 총리는 지난 1월 미국이 이라크 내 미군기지를 통해 친이란세력인 헤즈볼라를 공격하자 “용납 못 할 주권침해”라며 조속한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앞으로 UAE와 중동 각국 역시 미군 주둔에 따른 피해를 우려해 이라크처럼 미군 철수를 요구하게 될 수도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중동 각국의 군사시설을 거점으로 쓰며 이라크, 시리아, 홍해 해상 등에서 친이란세력을 상대해 왔다.
그랬던 미국이 중동 각국의 조치로 군사적, 전략적 차질을 빚게 됐다. 중동지역의 군사시설을 통한 미군의 즉각 개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중동 각국의 조치는 미국의 중동 전략을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동 각국으로서는 더 이상 미국이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동 각국은 미국보다는 이란과 관계 개선, 협력을 하는 편이 자신의 안보를 위해 유리하다고 본 듯하다.
미국을 상대로 한 중동 각국의 움직임은 지난해 10월 발발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으로 본격화했다.
팔-이 전쟁이 발발한 뒤 이란과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 헤즈볼라 등 친이란세력은 이스라엘과 미군을 미사일 등으로 공격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끼어 있던 중동 각국은 언제 자국에 미사일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겪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중동 각국은 중동에서 가장 강한 이란의 군사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란은 54만 명이 넘는 병력과 함께 여러 종류의 미사일도 가지고 있다. 이란은 지난 4월 13일 이스라엘 본토를 300기가 넘는 미사일과 드론으로 직접 공격한 바 있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을 편드는 미국은 이란에 아무런 군사 대응도 하지 못했다.
중동 각국은 이를 보며 미국과의 동맹이 오히려 자국 안보에 피해를 줄 것으로 직감했을 수 있다.
만약 미국의 군사력이 이란과 친이란세력을 압도할 만큼 강했다면 중동 각국은 자신을 지켜달라며 더욱 많은 미군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동 각국의 판단은 정반대인 ‘미군 거부’에 집중돼 있다.
현재 미국은 중동 각국의 군사시설 사용 제한, 미군 철수 움직임에 항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군사 패권을 잃고 궁색한 처지가 된 실질적인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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