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이 집권 기간 외교안보 분야를 돌아보는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5월 18일 공개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안보실 비서관과 외교부 1차관을 지낸 최종건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정리된 이 책에는 한미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과 관련해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여러 뒷얘기가 담겨 있다. 이 가운데 미국과 관련한 부분을 살펴본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합의 실패의 책임
문재인 전 대통령은 미국이 북미 협상을 통해 관계를 정상화할 의지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북한과의 협상을 반대했던 것으로 보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평창 겨울올림픽에-필자 주) 북한 측 특사단도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당연히 그 기회에 펜스 부통령과 북한의 김영남 위원장 또는 김여정 부부장하고 서로 만날 기회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또 그 부탁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했어요. 그 역시 오케이해서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하도록 펜스 부통령에게 지시했죠. 그런데 펜스 부통령 본인은 한국에 올 때부터 북측과는 조우하지 않겠다, 자신의 동선에서 북측 인사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 좌석도 따로 해달라고 하면서, 환영 만찬 때 북측 인사들이 있는 헤드 테이블에 앉지 않고 인사만 한 뒤 가버리는 결례를 보였죠.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 때문에 북측 인사를 따로 만나는 것은 오케이 했는데, 그 대신 철저한 보안을 요구해 왔어요. 그래서 장소도 청와대 상춘재로 결정된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북한을 자극하는 행보를 하는 바람에, 결국 그 만남이 취소돼 버렸어요. 매우 아쉬운 대목이었고, 북한 측에서는 그의 결례를 두고두고 문제 삼았습니다”라고 하였다. (158쪽)
부통령이 대통령 지시를 따르지 않고 북한을 자극해서 시작부터 어려움을 조성했다. 게다가 행사 주최국인 한국을 무시하는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행태는 협상 중에 계속되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상황을 보면, 회담을 앞두고 미국에서 리비아 모델을 언급한 것은 회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고 할까, 강대국의 오만 같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북한이 리비아 모델에 극도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어요. 그런데도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이 굳이 리비아 모델을 언급해서 북한 측에서 한 번 강한 불만의 목소리를 냈는데도 미국 부통령이 다시 한번 리비아 모델을 언급하는 바람에 북한이 크게 격앙되었던 것이죠”라고 했다. (211쪽)
리비아 모델이란 핵을 폐기하면 경제 지원을 해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실제 리비아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미국의 경제 지원 약속을 믿고 리비아가 핵을 폐기하자 미국은 경제 지원 대신 반군을 지원해 내전을 일으켰다. 결국 리비아 정권이 무너졌고 리비아는 폐허가 되었다. 이런 리비아 방식을 북한이 수용할 수 없음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미국은 일부러 북한을 자극했던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당시 미국이 말한 리비아 모델은 결국은 북한에 대한 불신의 표출 아닙니까? 우리가 충분히 북한을 도와주겠지만, 먼저 다 내놓아야 도와준다는 거죠. 북한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싫다고 하는데도 되풀이하는 것은 강대국이라고 할지라도 바람직한 협상 태도가 아니에요”라고 하였다. (230쪽)
문재인 전 대통령은 “폼페이오가 평양을 방문해서 종전선언의 대가로 핵 신고 리스트를 요구했다는 거예요. 종전선언이라는 것이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고 정치적 선언일 뿐인데, 미국에서는 마치 그것이 북한의 표현에 의하면 ‘하사품이나 되는 듯이’ 종전선언 해줄 테니 핵 신고 리스트 내놓아라 했다는 거죠. 북한은 그것을 황당한 요구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김 위원장은 ‘제대로 사귀어 보기도 전에 폭격 타깃부터 내놓으라는 거냐’, ‘맹수 앞에 포수가 총 한 자루로 생명을 지키고 있는데 총을 내려놓으라는 것 아니냐’고 비유했어요”라고 했다. (282쪽)
협상이란 등가물을 교환하는 게 기본이다. 그러나 미국은 약소국을 일방적으로 약탈하는 외교에 익숙한지 북한을 향해 억지 주장을 폈다. 역시 협상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미국의 협상 태도가 잘못이라는 지적을 여러 차례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협상이라는 것이 서로 신뢰하고 양보해야 하는 건데, 힘 있는 쪽에서 상대에 대한 불신 때문에 먼저 다 비핵화하면 우리가 후에 보상해 주겠다, 이런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이죠”라고 하였다. (126쪽)
미국에서는 더 심한 주장도 나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근본주의자들은 북한의 현존하는 핵물질과 핵무기 생산시설을 폐기하는 것만으로 안 되고, 핵 능력까지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심지어 볼턴은 핵과학자들을 데려와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적이 있어요. 그건 사실 대화하지 말자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287쪽)
이에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뿐 아니라 하다못해 다음 회담을 약속할 수도 있었지요. 대화를 계속하기로 했으면, 막연히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다음 회담을 약속하는 정도까지라도 했어야 되는데, 그것마저 하지 않았던 거죠”라고 하였다. (317쪽)
미국이 정말 대화할 의지가 있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하노이 노딜은 정말로 유감스럽습니다”라고 하였고 최종건 전 1차장도 “그렇습니다. 유감스럽다는 말씀은 점잖은 표현 같아요. 저는 아직도 마음에 열불이 나는데요”라고 하였다. (285쪽)
두 사람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합의 실패에 미국 책임이 크다고 여겼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그날 밤 기자회견에서 말한 것은 민생과 관련된 제재를 우선 해제해달라는 것이었죠. 제재 전부를 해제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민생 관련 제재를 풀어달라는 것이었다면 미국이 수용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죠”라고 하였다. (286쪽)
당시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민생 관련 제재 해제를 맞바꾸자고 하였다. 제재는 언제든 손쉽게 다시 부과할 수 있지만 핵시설은 한번 폐기하면 다시 만들기가 무척 힘들다. 북한이 굉장한 양보를 하겠다고 한 것인데 이걸 미국이 받지 않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런 미국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북핵 폐기가 지상 과제인 것처럼 집착하던 미국이 정작 북핵 폐기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볼턴의 회고록을 보면 처음부터 판을 깨려는 나쁜 의도가 작용했습니다. 최고의 북핵 전문가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저서에 의하면,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의 협상팀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김 위원장이 제안한 영변 핵단지의 불가역적 폐기와 핵무기 연구소의 완전 폐쇄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289~290쪽)
판을 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북한의 제안을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국 뒤통수를 친 미국
2018년 5월 22일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귀국길에 올랐을 때 갑자기 미국이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우리로서도 상당히 화가 나는 상황이었어요. 황당했고요. 역사적인 회담을 취소하기까지 과정도 화가 났지만, 미국이 취소 발표를 하더라도 그 타이밍에 그런 식으로 발표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중략… 그 회담에서 더더욱 리비아 모델은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회담을 잘 하기로 논의가 됐죠. 그렇다면 취소하더라도 적어도 사전에 우리에게 미리 알려준 다음에 했어야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 있을 때 발표해서 귀국하자마자 그 소식을 듣게 했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죠. 미국의 일방적인 행태에 분노가 컸어요”라고 했다. (214쪽)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고 알려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 정도 표현을 한 걸 보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던 듯하다. 미국이 한국을 완전히 깔아뭉개고 무시한 것이다. 한미관계의 현주소라고도 할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북미정상회담이 잘 될 경우 원한다면 회담이 끝난 후 내가 그 자리에 합류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어요. 합류해서 최소한 함께 축하하는 세리머니를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원한다면 3국 간에 종전선언을 하거나 종전선언을 논의할 수도 있다고요. 원한다면 언제든지 갈 수 있도록 그날 일정을 비워놓고 기다리겠다고 알려주었죠”라고 하였다. 이어 “나는 실제로 그날 일정을 비우고 지켜봤는데, 미국에서 가타부타 아무런 답이 없었어요”라고 하였다. (242쪽)
한국 정부는 나름대로 북미정상회담 성사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대통령 일정을 하루 종일 비우고 기다렸는데 미국은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이 얼마나 한국을 무시하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노딜 이후 통화할 때마다 김정은의 기분이 어떠냐, 알아봐달라는 식의 말을 했어요”라고 하였다. (330~331쪽)
미국은 한국의 대통령을 무시하고 뒤통수나 치면서도 필요할 때는 자신의 ‘정보원’으로 써먹었다. 미국에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존재인지, 한국의 대통령이 어떤 위치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은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남북을 이간질하는 치졸한 모습도 보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북한에서는 우리가 함께 가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 오히려 더 좋겠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미국 측에서는 내가 가길 꺼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북한 핑계를 댔어요. 북한이 내가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는 거예요. 김 위원장과 일대일 회동을 바라는 미국 측 속셈이 느껴졌어요”라고 했다. (333~334쪽)
미국이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다가 자기 발등을 찍는 일도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싱가포르가 회담 장소로 결정되는 바람에 북한은 결국 중국 비행기를 이용하게 됐고, 또 중국을 방문해서 시진핑 주석과 북중정상회담을 하게 됐습니다”라면서 “미국이 싱가포르를 선택했기 때문에 북한이 다시 중국과 밀착하도록 만든 셈이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23쪽)
미국이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한 배경에는 북한을 미국 쪽으로 당겨서 중국과 멀어지게 해 중국을 고립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런데 장소 문제로 기 싸움을 하다가 원래 목적에 어긋나는 결정을 한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금도 대화라는 말을 하고 있어요. 윤석열 정부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요. 끊임없이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고 하죠. 그렇지만 대화를 말하는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 거죠”라고 하였다. (625쪽)
윤석열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도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북미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한편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북 제재에 관한 이야기도 하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UN 제재 이전에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서 아예 접촉도 못 해, 가지도 못 해, 무역도 안 돼, 위반하면 형사처벌도 받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제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라고 하여 한국이 가장 강력한 대북 제재를 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127쪽)
문재인 전 대통령은 “남북연락사무소 개설에 대해 설명을 추가하면, 한미 간에 협의된 사안인데도 실제로 개설하려고 하니 UN 제재가 장벽이 됐어요. 컴퓨터 등 여러 가지 업무용 기자재와 발전기가 들어가야 하니까 UN 제재 때문에 상당한 실랑이가 있었죠. 그래서 북한에 제공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서 결국 관철시켰지요. UN 안보리 제재라는 것을 그렇게 돌파하면 되지 않느냐고 쉽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럴 수 없는 것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월경을 해야 하기 때문에 협의가 되지 않으면 유엔사의 협조를 받을 수 없죠. UN 안보리 제재는 그처럼 국면마다 애로로 작용했습니다”라고 하였다. (257~258쪽)
유엔사는 사실상 미군이다. 따라서 위의 말은 대북 제재를 빌미로 미국이 남북관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한미관계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남북관계도 정상화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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