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사람을 찾아서] 종이호랑이 미국과 일본의 비밀 참전

- 2년을 끄는 정전회담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6/15 [14:41]

[사람을 찾아서] 종이호랑이 미국과 일본의 비밀 참전

- 2년을 끄는 정전회담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6/15 [14:41]

전쟁은 단순한 군사행동이 아니다. 

 

세계 여론과 정치공작 그리고 외교 투쟁이 긴밀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특히 6.25전쟁에 참전한 나라는 전쟁 사흘 만에 참전한 미국과 유엔의 깃발 아래 직접 전투 군을 파견한 15개국, 의료지원단을 파견한 5개국 그리고 한국과 북한·중국인민지원군을 포함하면 24개국이었다. 또한 비밀리에 참전한 일본과 소련을 합치면 모두 26개국이나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나라가 모두 57개국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거의 반(半) 제3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란 두 초강대국으로 나뉘는 냉전 속에서 치러지는 국제전이기 때문에, 그 어느 전쟁보다 이념과 명분이 강조됐다. 

 

미국의 결론, ‘한국전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의 참전으로, 전쟁을 한반도로 국한하고 해·공군력도 제한했다. 더 이상의 증원 부대를 파견하지 않고, 38선 부근의 전선에서 머무른 뒤 휴전을 꾀해 6.25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리려고 했다.

 

중국의 참전은 미국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홍학지가 쓴 전쟁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에 따르면, 미국은 엄청난 지원과 직접 참전에도 불구하고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전망했다.

 

“병력과 물자 소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년간 투입한 것에 비해 2배나 되었다고 한다. 물자 소모량은 매월 평균 85만 톤으로 당시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1년 반 동안 원조한 물량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조선전쟁에서 전 육군의 3분의 1, 공군의 5분의 1, 해군의 2분의 1을 동원했다. 아군이 조선에 들어올 당시 42만 명의 미군이 나중에 69만 명으로까지 늘어났다.

이것은 유럽 우위 전략에 비추어 볼 때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병력이 부족하게 됐다. 미국의 전략예비대는 일본에 있는 미군 2개 사단과 국군 3개 사단, 미국 국내의 6개 사단밖에 남아 있지 않아 다시 조선에 더 이상의 증원군을 파견한다는 것은 아주 곤란했다.”

 

특히 군사와 정치적인 국면에 관해 미 육군 참모차장 브래드 마이어 장군은 “한국전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유엔군이 이길 희망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래서 5월 16일, 미국 국가안보위원회는 “휴전회담을 통해 적대행위를 멈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북중연합군 또한 비록 보병이 많고 전투력이 뛰어났지만, 미군 공습으로 해가 떠 있는 대낮 전투는 제약이 있었다. 특히 부대의 기동력과 물자 보급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우세를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쌍방의 속전속결 전투는 불가능하며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전쟁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면서 경제는 위기에 몰리고, 북중연합군의 공세가 거세어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양면 위기에 봉착한다. 

 

자연히 피아(彼我)간 역량이 균형을 이루게 되면서, 정전회담이 필요하게 되었다,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휴전회담을, 군사적으로는 ‘지구전을 펴면서 적극적인 방어를 하는’ 방침을 정했다. 군사투쟁과 정치투쟁을 번갈아 진행한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회담하는 대치 국면이 시작된다.

 

군사투쟁과 정치투쟁의 병행 그리고 정전회담

 

제5차 전역(1단계 1951년 4월 22~30일까지 9일간, 2단계 1951년 5월 16~22일까지 6일간) 후 쌍방의 점령 상황이다.

 

미군과 국방군은 동부전선에서 38선을 넘어 동해안의 산악지대를 차지했다. 북중연합군은 38선 이남 개성과 판문점을 포함한 평야지대와 연안반도, 옹진반도를 점령했다.

 

1951년 7월 10일 정전회담 시작부터 미국은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고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홍학지는 같은 책에서 정전회담이 부진한 이유가 미국의 무리한 요구때문이라고 했다.

 

“회담 도중 미국 측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데 동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해·공군 전력 우세를 앞세워 군사분계선을 38선 이북의 우리 측 진지로 삼자는 무리한 요구까지 해 왔다. 전쟁도 하지 않고 우리 측 1만 2천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거저먹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리하여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중략)

후에 우리는 저울질을 거듭한 끝에 동부전선의 산악지대는 군사적인 지형으로는 유리하지만 모두 민둥산이고 헐벗었다는 이유로 평가 절하한 반면 서부전선의 평야지대는 방어하기가 어렵지만 비교적 풍요롭고 서울과도 가까워 전략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해군과 공군력의 우세를 믿고, 육상에서 싸우지 않고 1만 2천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그냥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뒤로는 적극적으로 병력을 재배치하고 무기와 물자를 준비하며 전쟁 준비에 나섰다.

 

1951년 7월 20일 엄청난 장맛비가 며칠간 계속됐다. 40년 만의 최대 홍수로 곳곳에서 도로와 철도가 끊기고 집이 물에 잠기는 등 피해가 엄청났다. 설상가상으로 이로 인해 중국지원군 또한 수많은 창고와 야전병원이 물에 잠겼고, 고사포 진지와 트럭들이 유실됐다. 

 

이런 틈을 타 1951년 8월부터 미군은 미리 준비된 야포, 탱크와 공습 질식전을 병행하며 북한강 동쪽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80km의 전선에서 하계공세를 펼쳤다. 

 

당연히 회담은 중단된다.

 

북한군은 항령, 두밀리 북쪽의 773.1고지(피의 능선)와 851고지(단장의 능선) 등에서 격전을 치르면서 동부전선에서 일으킨 미군의 하계공세를 분쇄했다.

 

북중연합군은 참호와 교통호 구축 위주로 공세에 맞서다 보니 적잖은 대가를 치렀다. 

 

이런 대응으로는 미국과 지구전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북중연합군은 지하 만리장성 ‘땅굴’로 대응한다.

 

일석이조의 땅굴 ‘지하 만리장성’

 

땅굴이 일부 전선에서 예상외로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면 병사들은 잽싸게 땅굴로 들어가 몸을 숨길 수 있고, 적이 다가올 때면 뛰쳐나가 백병전을 벌일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홍학지는 전쟁회고록에서 효과적인 작전을 위해, 땅굴을 보강하는 7대 필수 조건에 대해서 말했다.

 

“1952년 2월 상대는 우리가 땅굴 공사에 열을 올리는 것을 알고 계획적으로 중형포, 중형폭탄 등을 집중적으로 투하해, 일부 부실 땅굴이 무너져 적잖은 인명피해를 내기도 했다. (중략)

지원군사령부는 땅굴을 지을 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7방의 요건을 고려하도록 전군에 지시했다. 즉 공습에 안전하고(防空), 포격에 무너지지 않고(防砲), 독가스에 당하지 않으며(防毒), 비(防雨), 습기(防潮), 불(放火), 추위(防寒)를 피할 수 있어야 하는 7대 필수 조건이었다.”

 

또한 같은 책에서 홍학지는 땅굴의 전술 가치와 규모에 대해 기록했다.

 

“땅굴 파기 공사는 상대의 화력으로부터 아군의 병력을 보존하는 데 효과적일뿐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방어보다는 상대에게 기습공격을 가해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중략)

조선반도를 가로지르는 2백 5십 킬로미터 길이의 모든 전선에 20~30킬로미터의 두터운 방어선을 갖추고 땅굴을 핵심으로 한 거점 식 진지 방어 체계를 이룩했다. 난공불락의 ‘지하 만리장성’을 형성한 것이다.”

 

자연히 전선은 지구전으로 가면서 정전회담도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1952년 5월, 유엔군 사령관에 리지웨이 후임으로 마크 클라크가 부임하면서 강공을 구사하며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일본의 6.25전쟁 비밀 참전

 

미 공군은 회담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항공 압력 전략’을 사용했다.

 

안문석은 『북한현대사 산책 2, 전쟁과 사회주의 건설』(인물과사상사, 2016)에서 미군의 대대적 폭격에 대해 정리했다.

 

“1952년 6월 23일에 감행된 수풍발전소 공습에서 미군은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중국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다. 공습은 항공모함 4척과 500대 이상의 비행기를 동원해 전쟁 중 최대 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날의 공습에서 미 공군 폭격기들은 불과 몇 분 사이에 900여 톤에 달하는 폭탄을 수풍댐 위로 쏟아부었다. 

미군은 산업시설과 더불어 농업시설에도 공습을 감행했다. 미군은 휴전을 불과 1~2개월 앞둔 시점인 1953년 5월 6월에 이북의 주요 저수지를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미 공군의 이북지역 폭격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시점까지 하루도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특히 전쟁과 정전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이북의 주요 저수지와 댐의 위치, 공격하는 이유를 일본은 미국에 전수한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일본은 6.25전쟁에 비밀리에 참전했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1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일본의 참전에 대해 정리했다.

 

“로이터통신은 50년 7월 27일 ‘일본군 약 2만 5천 명이 한국 전선에 참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후 초대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로버트 머피는 1964년에 낸 회고록에서 ‘일본의 선박·철도 전문가들은 숙련된 부하를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가 미국과 나란히 유엔군사령부 산하에서 일했다. 그것은 극비였다. 그러나 유엔군은 한국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들 수천 명의 일본인 전문가들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에 체재하는 것마저도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 제국과 동질(同質)인 일본의 6.25전쟁 참전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운요호(雲揚號) 사건, 동학 농민전쟁 그리고 을사늑약 등 40년간의 조선 점령과 35년간의 식민 지배 속에서 우리 민족을 핍박해 왔다. 뒤를 이어 미국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이어받아 아시아대륙, 소련, 중국을 공격하는 거점으로 한반도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일본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조선 민족을 분단시키고 착취하면서 이권이란 이권은 다 가져가려고 했다.

 

일본의 6.25전쟁 참전은 일본에 전범 면죄부를 주고 경제적으로 기사회생시켜 주었다.

 

일본과 미국이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동질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미국과 일본의 6.25전쟁 참전이다.

 

일본은 미국을, 미국은 일본을 적극 이용했다.

 

강준만은 같은 책에서 일본의 참전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적시(摘示)했다.

 

“일본의 참전 사실이 가장 확실하게 알려졌던 것은 미군의 원산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1950년 10~12월에 수뢰 제거 부대를 파견한 것이었다. 당시 미군은 소해정(바다에 뿌려진 기뢰를 제거하는 배)이 10척에 불과한 반면 일본 해상보안청은 100여 척의 소해정으로 구성된 소해부대를 갖고 있었다. 일본은 소해정 20척을 포함한 25척의 선박과 총 1천 2백여 명을 지원했다.

 

2001년 6월 23일에 방영된 MBC-TV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25 일본 참전의 비밀」은 일본의 참전이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일본 전범들이 면죄부를 얻고 세력을 키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전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또다시 한반도는 ‘불타는 전선’이 되었다.

 

그러나 제3지대장 남도부와 지춘란은 2년이나 끈, 긴 정전회담을 소문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워낙 뜬 소문이 많아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지춘란의 부군 황금수는 “무전기는 있었지만, 고장이 나서 불통이었다. 조선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민가로는 군경의 빨치산 토벌 작전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