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부와 제3지대는 전쟁 시기 토벌대의 대공세 속에 ‘고역의 장정’을 했다.
정전 이후에도 그들의 ‘고역의 장정’은 계속된다.
정전으로 휴전선에서 총성만 멎었을 뿐, 지리산 등지에서의 대토벌 공세는 더욱 불을 뿜었다.
남도부는 정전 이후 조선노동당 ‘당 중앙정치위원회 결정 111호’ 방침대로 유격전을 중단하고, 지하당 활동에 돌입하기 위해 제4지구당 지도부 거점으로 지정한 대구로 내려온다.
‘결정 111호’는 1952년 중반에 나왔지만 각 지역 빨치산은 토벌대의 대공세로 인해 산에서 내려와 도시와 농촌으로 근본적인 진출이 어려웠다.
그러나 정전 체결 이후 빨치산에게 정세는 더욱더 험악했다. 국방군은 휴전선의 병력을 이동시켜 빨치산 대토벌 작전에 전력을 집중했다.
이제 빨치산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도시와 농촌으로 진출해야 했다.
조선노동당,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 당사업과 조직에 대하여」 결정서
조선노동당은 정전 협상이 진행되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을 때 ‘방어’에 주력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장기전 태세로 전환한다. 그리고 이남 전역의 빨치산을 5개의 지구당으로 나누어 ‘제2전선’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빨치산의 각 지대는 유격대 체제에서 당 사업을 강화하는 지구당 체제로 전환했다. 이는 전쟁을 끝내고 정전 체제로 넘어간다는 것을 예측한 전술이었다.
조선노동당은 1951년 8월 31일 중앙정치위원회를 개최하고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 당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김남식은 『남로당 연구Ⅰ』(돌베개, 1984)에서 결정서 내용과 빨치산 조직개편이 즉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지하당 조직 형태와 그 사업 방법, 6.25에 있어서 당, 단체는 영용한 투쟁을 전개했으나 결정적인 ‘조국해방전쟁’ 과정에 있어서 자기 임무를 당이 요구하는 수준에서 수행하지 못했다. 전쟁 시작 후 1년 이상 결과했으나 빨치산 투쟁은 결정적 성과를 쟁취하지 못했으며 대중을 조직화하여 폭동을 일으키지 못했고 인민군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군 내부에 ‘의거운동’과 와해를 일으키지 못했다. (중략) 앞으로 당 사업 강화를 위해 종래의 행정지역에 따른 조직체를 일단 보류하고 잠정적으로 5개 지역을 설정하여 각각 지구조직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체의 당 사업을 지도하도록 한다. 제1지구는 서울·경기도 전지역, 제2지구는 남강원도(蔚珍郡 제외), 제3지구는 충청남북도(論山郡 제외), 제4지구는 경상북도와 울진군 및 낙동강 이동의 경남 밀양·창녕·양산·울산·동래·부산지역, 제5지구는 낙동강 이서의 경남도·전남북도 전지역 및 제주도와 충남의 논산군 지구 등으로 설정한다. (중략) 이러한 중앙당정치위원회의 결정서는 당시 별다른 연락 수단이나 북과의 효과적인 통신 유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재산(在山) 현지당들에 즉시 전달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52년 중반기에 가서야 조직개편을 하게 되었다.”
이때 남도부는 제4지구당 부위원장 대리, 제3지대장으로 임명됐다.
정전이 빨치산에게 준 희망과 혼란 그리고 계속되는 ‘고역의 장정’
김남식은 같은 책에서 빨치산 각 지구당의 조직에 관해 설명했다. 이 중 제4지구당에 관한 내용이다.
“제4지구당(경북·경남 낙동강 이동) : 경북도당 위원장이며 제3지대장인 박종근은 경남 신불산 일대에서 암약 중인 남도부 부대와 야합하여 지역을 북부와 남부로 나누었다. 북부지구는 지대장 박종근이 남부지구는 부지대장 남도부, 정치지대장 안철(安哲)이 각각 맡아 유격전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52년 봄 박종근이 사살되었다. 그 뒤 3지대는 52년 6월에 4지구당으로 개편하게 되었는데 위원장은 공석, 부위원장은 이영섭, 유격부장 남도부, 조직부장 손대수(孫大壽)였다.”
제4지구당은 담당 구역이 너무 넓어 부위원장인 이영섭이 남부인 경남 동부지구와 경북 청도군을 포괄하는 지역의 당 사업을 담당하고, 남도부는 군사 조직인 유격대 3지대를 이끌었다.
정전협정 체결은 동해 남부지구 빨치산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001년 남도부의 유품 발굴에 참여한 임경석 교수는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08)에서 당시 정전협정 체결이 빨치산에게 준 희망과 혼란에 대해 기록했다.
“7월 27일 정전을 계기로 대내 사기는 앙양됐으나, 무장 부대의 선전·선동 사업으로의 전환이 강력히 추진되기 전에 적들의 대량 집중 공격에 봉착하여 하나둘씩 희생됨에 따라 대내가 또다시 혼란하여졌으며…” (제4지구당부 부위원장 대리, 제3지대장 남도부, 「조선로동당 제4지구당 사업 정형 기록」, 1953.10.10.)
같은 책에서 임경석은 임박한 토벌대의 공세와 제4지구당 희생에 대해 남도부의 「비장 문건」을 인용해 설명한다.
“남도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정전 이후 적의 단말마적 발악’이 격화됐기 때문이었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지 불과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8월 11일,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대토벌전이 임박했음을 예고했다. ‘현재는 다만 포위만 하고 있을 뿐인데, 오는 낙엽기부터는 소탕전을 전개하여 겨울 안으로는 완전히 소탕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휴전선의 병력을 후방으로 배치함으로써 빨치산 토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도부의 용어로 하자면 ‘적들의 대량 집중공격’이 개시됐다. 희생자가 속출했다.”
이제 제4지구당과 제3지대는 ‘유격전을 계속하느냐, 아니면 지하당 활동이냐’를 두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정전 이후 지하당 사업 방침과 각 지구 생존 인원
정전 이후 한 달도 채 못 되는 시기에 지하당 사업으로의 전환은 결정되고 ‘고역의 장정’은 계속된다.
임경석은 같은 책에서, 지하당 사업 방침에 대해 「비장 문건」을 인용해 설명한다.
“지하당 사업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은 이미 1년 전부터 중앙당으로부터 제시된 바 있었다. 당 중앙정치위원회 제111호 결정이 그것이다. 각급 당 지도부는 중요산업 부문과 노동자, 농민, 군부 속에 당 조직을 강화하고, 그 토대 위에서 지구당 지도부를 도시로 진출시키도록 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지구당 지도부가 하산하여 도시지역으로 들어간다는 말이었다. 이 지침은 동해 남부전구 유격대원들에게도 명확히 인지되어 있었다. 남도부 부대의 기관지 『붉은별』은 휴전한 지 한 달이 채 못 되는 시기에 이미 이 문제를 명백히 천명하고 있다. 당시 제4지구당 내 최고위 당직자 이구형李求炯이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논설에는 휴정협정 이후 행동노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중앙위원회 결정 94호 및 111호와 각 지대장과 정치 부지대장 및 전체 군관들에게 주신 지시는 적후에서 싸우는 우리들의 앞길을 태양과 같이 밝게 비추어(제4지구당부 제3지대 8.15해방 8주년 기념 경축합동대회 일동, 「김일성 원수에게 드리는 멧시지」’ 주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같은 책에서, 임경석은 생존자 인원에 대해 「비장 문건」을 인용해 성일기 회고와 배치된 내용을 설명한다.
그가 확인한 생존자는 37명 남짓, 그러나 성일기는 9명뿐이었다고 기록했다.
“성일기의 회고록(『정원석, 배내골-어느 소년 빨치산의 회상』(미발표 원고, 2001))에 따르면 휴전협정 이후 남도부 부대의 생존 인원은 9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고는 남도부의 보고서와 배치된다. 남도부의 노트에 따르면, 1953년 10월 1일 현재 생존자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제4지구당부 직속 당원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숫자만 12명이었다. 이외에 성명을 기억하지 못하는 공작원 수명이 더 있었다고 한다. 유격대 제3지대 소속 대원의 숫자는 더 많았다. 28명이었다. 이 중에서 당과 유격대에 동시에 이름이 올라 있는 세 사람을 제외하면 양자의 합계는 37명이다. 달리 말해서 휴전협정 이후 남도부 부대의 생존 인원은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약간 명을 포함하여 37명 남짓이었던 것이다.”
남도부의 「비장 문건」과 성일기의 증언에 나오는 생존 대원 인원 차이
임경석은 정원석의 미발표 원고(2001년)를 토대로 성일기가 생존 대원을 9명에 불과했다고 했지만 이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같은 책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각 소지구 생존자 인원에 대해 설명했다.
“남도부의 노트에는 제4지구당 성원과 제3지대 성원이 똑똑히 구분되어 적혀있다. 남도부 부대 내에서 당과 군의 관계는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4지구당 지도부는 4명으로 이뤄진 조직위원회가 이끌었다. 이구형·남도부·유응재兪應載·안병화安炳華 이상 네 사람이 그 멤버였다. (중략) 당 지도부는 관할구역을 4개 소지구로 나눴다. 소지구의 명칭은 부산·동래지구, 대구지구, 울산·밀양지구, 북부지구였다. 유격대 제3지대 대원들은 이들 소지구에 분산 배치됐다. 부산·동래지구에는 11명, 울산·밀양지구에는 6명, 대구지구에는 6명, 북부지구에는 4명이 배속됐다. 북부지구가 이채롭다. 다른 지구와는 달리 지명이 특정되어 있지 않다. 이곳은 대구 이북의 경북지구를 가리키는 듯하다.”
필자는 성일기가 주장한 생존자 9명을 재확인하기 위해 성일기의 증언을 토대로 한 정원석의 장편소설 『북위 38도선』(교학사, 2006)을 확인하였다. 장편소설에는 구체적으로 9명의 생존자 명단이 나와 있다.
“남도부 부대의 생존 인원은 이제 아홉 명에 불과하였다. 사령관, 이구형, 김병수, 홍만식, 문일준(본명 문덕준), 유응재(본명 홍영식), 그 밖에 여대원 김상선, 지춘남, 그리고 차를 보태서 아홉 명이었다.”
‘지춘남’은 ‘지춘란’의 오류이고 ‘차’는 ‘성일기’로 가명은 ‘차진철’이다.
필자가 확인한 결과 임경석이 지적한 것처럼 ‘생존자는 9명이었다’라고 성일기는 기록했다.
그러면 성일기 회고와 남도부 노트와의 대원 숫자 차이는 무엇인가!
이는 성일기가 나중에 투항해서 밀고한 남도부와 지춘란 뿐만 아니라 다른 성원도 밀고했다고 필자는 추론한다. 그리고 나중에 성일기는 회고록에 ‘거짓’으로 9명에 불과하였다고 주장했다.
제4지구당 지도부, 하산 공작 전개
제4지구당 지도부가 4개 소지구를 나눈 것은 하산 공작을 위해서였다.
같은 책에서, 임경석은 모든 유격대원이 일거에 하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추론한다.
“제4지구당 지도부는 순차적인 방법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 대원들에 앞서서 지도부 성원들이 먼저 하산하고, 중소도시에 앞서서 대도시에 먼저 거점을 구축하는 방법이었다. 행동 개시는 9월 초에 이뤄졌다. 부산시당 책임자로 임명된 안병화는 5명의 대원들과 함께 9월 1일 부산지구로 출발했다. ‘지도부 하산 문제를 강력히 추진시키는 첫 조치’였다. 대구시에 거점을 마련하는 사업에는 제4지구당 최고위 지도자 이구형이 직접 나섰다. (중략) 그가 임지로 출발한 것은 9월 3일이었다. (중략) 남도부는 지도부 성원 중에서 가장 늦게 하산했다. 여타 지도부 성원들이 지하당 거점 구축을 위해 산을 내려간 동안, 그는 산 위에 잔류한 30명 안팎의 유격 대원들을 지휘했다.”
남도부는 유격전을 중단하고 지하당 활동에 돌입하기 위해 대원들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지춘란의 부군 황금수는 “남도부는 지춘란에게 조선족으로 말투가 표시가 나고 풍속과 행동도 조화가 안 돼 노출되기 쉬워 팔공산 아지트에 혼자 남아 있도록 했다. 남도부가 먼저 내려가서 조건을 확보하고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남도부의 지춘란에 대한 배려 깊고 염려하는 생각은 제주 4.3항쟁을 주제로 한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11)』에 잘 그려져 있다. 한라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여성이 당 지시로 하산한 뒤 친척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산부대는 냄새가 심하다고 듣긴 했지만, 아이고, 살아 있는 사람한테서 그런 냄새가 나는 걸까요. 용케도 그 냄새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냄새만으로 있는 곳을 알 수 있는데, 정말로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지요. 바로 솥에 물을 끓여 몸을 씻겨 주었습니다. (중략) 온몸이 이(蝨) 투성이라서... 마루방에 내놓은 화장품 상자가 여기저기 피투성이로 새빨갛게 되어 있어서, 갑자기 어찌 된 일인가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만, 참빗으로 머리를 빗고, 거기에 걸린 이를 손톱으로 짓눌러 죽인 흔적이더군요.”
남도부는 10월 6일, 제4지구당 지도부 소재지로 내정된 대구로 하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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