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찾아서] (28) 3.1정신으로 자주통일 달성하고 통일 방해 세력을 분쇄하자!- 1961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식 결의 -지춘란이 언제 출소한 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부군 황금수가 사진의 뒷면에 ‘1969년 秋夕 날’이라고 쓴 사진이 있다. 배경으로 보아 출소 이후, 서울 중구 신당동 산부인과 의원에 취직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4.19혁명으로 장기수 대부분은 형기가 ‘절반’으로 감형받는다.
노가원은 『南道富 하』에서 지춘란이 1968년까지 감옥살이를 하고 만기 출소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울교도소 여자 교도관인 전온전이 쓴 수기 『사형장의 황혼(하), 여자사형수 편』에서 지춘란은 20년 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지춘란은 14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1969년에 출소한 것이 분명하다.
지춘란은 출소 후 민족일보 편집국장 양수정 씨의 부인이 운영하는 신당동 산부인과 의원에서 간호원으로 생활하면서 1969년에 황금수와 결혼한다. 황금수에게 지춘란을 소개해 준 여성은 ‘사회대중당사건’으로 유죄를 받은 최만리 사회대중당 중앙당 부녀위원장이다.
4월혁명 공간의 혁신정당 중 여성 당원은 대부분 사회당과 사회대중당에 있었다. 그중에서 5.16쿠데타로 구속된 구속자 중 박정숙, 주명희(주명순), 최생금, 최순자, 최춘자(최정윤), 한정숙 등은 사회당 출신이었다.
추론컨대 주명희와 부부 관계를 맺고 있던 최백근 사회당 조직부장의 영향으로 여성 당원이 사회당에 집결한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당은 기본적 통일방안으로 ‘남북협상에 의한 자주적 통일’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여성 당원들 대부분은 해방공간에서 조국통일과 혁명을 위해 여맹에서 투쟁했던 분들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춘란은 5.16군사쿠데타로 구속된 이들 여성 당원과 서울구치소 여사(女舍)에서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교류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4월혁명 공간의 혁신정당 활동과 ‘남북협상론’ 등 통일 열기도 귀동냥하며 힘과 희망을 얻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제3차 헌법 개정과 7.29민참의원 선거 그리고 혁신계의 참패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국회는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포함한 제3차 헌법 개정을 하고 7.29민참의원 선거를 한다.
혁신세력은 사회대중당과 혁신동지총연맹 그리고 한국사회당 등을 창당하면서 4.19혁명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대규모로 제도정치권에 뛰어들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233개 민의원 선거구 가운데 사회대중당 125명, 한국사회당 18명, 혁신동지총연맹 15명 등 158명의 혁신계 후보가 입후보했다. 물론 입후보자의 약 70%가 전남과 영남지방에 집중되었다.
반면 민주당은 의석수를 초과하는 300명의 후보자를 냈다.
경쟁률은 민의원 선거 233개 선거구에 1,563명이 등록해 6.7대 1, 참의원 선거 58명 선출에 214명이 출마해 3.7대 1을 보였다.
혁신세력은 조직과 자금 면에서 보수정당에 비해 극히 불리하였기 때문에 주로 선전 홍보에 주력하였다.
대표적으로 사회대중당은 ‘이것저것 다 썩었다. 혁신밖에 살길 없다’, ‘보수하다 이 꼴 됐다. 혁신해서 바로 잡자’ 등의 선거 구호로 과반수 의석을 목표하였다. 특히 ‘미군정 당시의 한국민주당 시대부터 4.19혁명 직전까지의 광범위한 구악을 들추어내겠다’라고 한국민주당의 후신인 민주당에 전면 선전포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혁신계는 민의원 선거에서 사회대중당이 4석, 한국사회당과 혁신동지총연맹이 각각 1개의 의석을 차지하고, 참의원 선거에서는 사회대중당만 1석을 차지했다. 오히려 민주당이 민의원 175석, 참의원 3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물론 이유는 많았다.
이승만 하야 이후 선거까지 약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조직을 만들어 선거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또한, 선거 자금의 부족과 혁신계 연합전선 형성 실패, 내부 분열 그리고 용공 시비 등이 대표적인 참패 이유였다.
그럼에도 이승만이 하야한 후 무엇보다 북진 통일론과 무력 통일론이 없어지고, 각 당은 통일 관련 선거 공약에 ‘유엔 테두리 내에서의 평화통일’을 대부분 동의하였다.
이는 4.19혁명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였다. 또한, 7.29민참의원 선거에서 제한적 의미의 남북교류 주장도 제기되면서 이후 ‘남북협상론’이라는 통일방안도 나오게 된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결성과 통일운동의 전면화
4월혁명 공간의 혁신정당은 통일된 조직을 가진 정치세력이 아니라, 분단과 해방공간 그리고 6.25전쟁의 참화 속에 살아남은 다양한 정치세력의 집합체였다.
주요 핵심 혁신정당인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은 이승만의 사대 노예 독재정권에 반대하고 분단체제에 비판적이었다. 또한, 이들 혁신정당은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민자통을 결성해 당시 최대 쟁점으로 주목받은 통일문제도 ‘민족통일방안심의위원회’라는 공식 기구를 통해 공개적, 대중적으로 제기했다.
혁신계는 장면 정부의 ‘선건설 후통일론’은 결국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비판하면서 ‘선통일 후건설론’을 내세웠다.
특히 1961년 2월 25일 민자통 결성식에서 ‘3.1정신으로 자주통일 달성을 선언’하고 ‘통일 방해 세력을 분쇄’하자고 결의문을 통해 밝혔다.
“-. 우리는 외세에 의존하는 사대 노예들의 난무를 배격하고 민족통일 역량을 총집결하여 통일에 매진할 것을 엄숙히 맹서한다. -. 우리는 ‘통일유보’ 또는 ‘선건설 후통일론’으로 국민을 현혹케 하여 통일을 방해하는 일체의 세력을 철저히 분쇄한다. -. 우리는 유엔총회에 진정한 민족의 의사를 대표할 수 있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를 사절단으로 참가케 하여 국민 총체의 의사를 반영할 것을 주장한다. -. 우리는 유엔 및 미·소 양국이 이 이상 더 우리 조국을 냉전의 제물로 삼지 말고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하루속히 통일이 성취되도록 협조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 우리는 평화통일에 있어서 민족의 한 사람도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전국 결성대회 이전의 일체 범죄자에 대하여는 평화통일된 후도 망각법(忘却法)을 제정하여 일체 불문에 붙인다. -. 우리는 통일에 앞서 민족친화의 정신 밑에서 다음 사항을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할 것을 정부 및 국회에 건의한다. ㄱ. 완충지대에 우편국을 설치하여 남북 간의 서신 왕래를 실시할 것 ㄴ. 남북 간의 경제교류를 촉진케 할 것 ㄷ. 완충지대에 민족친화의 기구를 설치하여 때때로 남북동포가 서로 만나 민족 혼과 민족정기가 얼키도록 할 것. ㄹ. 신문기자 및 민간인 시찰단을 파견하여 이북 동포를 위무(慰撫)하고 실정을 호상토로(互相吐露)할 것 ㅁ. 금후 국제적인 모든 경기대회는 남북 간의 혼성 선수단을 파견할 것.” (출처: 민족일보, 1961.2.26.)
4월혁명 공간의 주요 혁신정당인 사회당의 계보와 통일민주청년동맹
사회당은 해방공간에서 근로인민당(1947.4.26. 여운형, 장건상, 백남운, 최백근, 유병묵 등)을 근간(根幹)으로 1957년 근로인민당 재건 사건(장건상, 김성숙)을 거쳐 1960년 11월 27일 창당했다.
중심인물에 관해서는 필자가 사월혁명회 청년위원장 시절 『한국혁명재판사』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 구술’ 내용을 중심으로 「4·19전후 혁신계 현황」을 재구성한 것을 재인용한다. 재인용한 원본은 정태영의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후마니타스, 2007)에 수록되어 있다.
사회당 중앙당 주요 인사들이다.
* 근민당계 : 최근우(위원장, 옥사) 문희중(당무위원장, 옥사) 유병묵(선전위원장) 유한종(기획위원장) 최백근(조직국장, 사형) 김일우(통제위원) * 진보당계 : 김배영(조직담당) 이규영(집행위원) 진병호(학생부장) 하태환(선전부장) * 조선공산당계 : 김정규(부위원장/조직위원장) * 인민군계 : 김성습(청년부장) 구희서 * 김영옥(당무부장) 이계덕(부녀부장, 이현경) 이석준(선전부장/경북도당 선전위원장) 황금수(노동부장) 강호문(상임위원) 김영한 선승래 이재문 진량현 * 여성 당원 : 박정숙 주명희(주명순) 최생금 최순자 최춘자(최정윤) 한정숙
지방의 경남도당, 경북도당, 전남도당, 전북도당의 인사 또한 정태영의 책을 참조하면 된다.
그리고 최백근이 지도한 청년 조직인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에 대한 황금수의 증언이다.
“통민청이 먼저 조직된 것이 아니고, 사회당 정당 운동이 발전하면서 청년 조직이 반드시 있어야 해서 진보적인 청년운동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때 사회당에 참여하고 있는 나 자신도 청년의 입장이었으니까, 통민청 조직을 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를 했다. 그 운동을 지도한 선생은 최백근 선생이었다. 난 그렇게 사회당 노동부장을 하면서, 또 통민청을 조직하기 위해서 회합을 가졌는데, 그때 회합 장소로 당시 마포 쪽에 있는 우홍선 선생의 집을 이용하고 있었고. 그때 많은 청년 운동가가 참여해서 통민청을 내오게 되었다.”
4월혁명 공간의 주요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 혁신당의 계보
7.29민참의원 선거에 참여한 사회대중당(1960.6.)은 1946년 좌우합작운동 시기에 결성된 중간파인 민주주의독립전선(1947.2. 이극로, 조봉암)과 민족자주연맹(1947.12.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 홍명희 등) 그리고 한국독립당(1946.3.)을 중심으로 진보당(1956.11.)을 만들었다. 그리고 7.29민참의원 선거 이후에는 김달호 중심의 사회대중당(1960.11.24.)으로 개편된다.
사회대중당 중앙당의 중심인물 면면이다.
* 진보당계 : 김달호(집행위원장) 김병휘(정책위원장) 조중찬(조직위원장) 나창순(집행위원) 소륜(집행위원) 이창호(집행위원) * 김명세(통제위원장) 김판암(국토통일연구위원장) 선우정(선전위원장) 최만리(부녀위원장) 심돈섭(부서기장) 박형필(선전위원회 차장) 이성재(집행위원) 윤성식(집행위원) 전평배(중앙집행위원) 이재춘(민자통 선전위원장)
혁신동지총연맹(1960.5. 김창숙, 장건상, 정화암, 최백근 등)의 장건상은 7.29민참의원 선거 이후 선거에 참여한 일부 인사를 결집해 혁신당(1961.1.8.)을 창당한다.
혁신당 중앙당 주요 인사들이다.
* 근민당계 : 장건상(집행위원장) 이영옥(민자통 총무위원장) * 진보당계 : 권대복(기획위 부위원장) 곽순모(선전위 부위원장, 곽현산) 정예근(통일문제위 부위원장) 황구성(조직위 부위원장) * 조선신민당계 : 기세충(부간사, 기준성) * 이형우(조직위원장) 허영무(조직부장, 허철) 이병연(조직위원) 이병일(조직위원) 배도원(재정부위원장) 강태수(재정부장) 장홍염(대변인) 한민산(통제위원) 강태운(집행위원) 김기갑(집행위원) 안종헌(집행위원) 함석희(중앙민자통 공동의장) 김철악(중앙민자통 선전위부위원장)
7.29민참의원 선거 이후 혁신정당 주력은 사회대중당, 사회당, 혁신당으로 새로 정비하거나 창당했다. 또한, 혁신정당과 청년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그리고 학생조직인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련)은 전선체인 민자통을 앞세워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남북협상론’과 민중운동의 중심, 민자통
민자통은 “우리는 조국도 하나이며, 민족도 하나이다. 수많은 선열들이 흘린 피와 4월이 뿌린 피는 조국의 완전자주독립과 민주주의 발전, 민족 장래의 번영을 위한 것이니 우리는 이 정신에 따라 하루속히 통일성업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또한, 1961년 2월 19일에서 3월 16일까지 영남일보에 기고한 민민청 경북간사장 도예종의 필명으로 추정되는 김영춘의 「조국통일의 기본방향」은 ‘남북협상론’이 통일방안으로,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데 이론적 구실을 했다.
이후 민자통 선전위원장 이재춘은 이 글의 핵심적 요지를 1961년 5월 8일과 9일 양일간에 걸쳐 민족일보에 「평화통일의 기본방향」을 발표함으로써 민자통의 공식 통일방안이 된다.
‘남북협상론’은 반외세, 민족자주의 문제를 전면에 제기하였고, 이를 위해 남북한의 협상을 통한 자주적 통일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2월 21일 중립화 통일을 주장했던 통일사회당, 사회혁신당, 삼민회, 광복동지회 등은 민자통을 탈퇴하고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중통련) 발기주비위원회’를 결성한다.
이후 중통련은 1961년 3월 6일 민자통의 민주·자주·평화의 개념적 통일론을 비판하고, 통일 원칙이 분명하지 않으면 ‘공산주의자의 편승’과 ‘보수 정권의 반동화’를 초래하여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발기선언문을 발표한다.
하지만 민자통은 4월혁명 공간의 위대한 3대 투쟁인 2.8한미경제협정 반대 투쟁, 2대 악법(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반대 투쟁, 남북학생회담 성사 투쟁 등을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전국적인 민중운동의 중심, 통일운동의 전선체로 우뚝 선다.
특히 1961년 5월 13일 민자통이 주최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 촉진 궐기대회’ 구호에서 분명히 밝히듯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뛰어넘어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라는, 민족을 오도 가도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미국을 몰아내 주요 모순인 민족 모순을 해결하려는 민중의 반외세 자주통일 투쟁을 민자통은 이끌었다.
민자통과 중통련은 분열이 아니라 사대 외세 노예와 자주 그리고 참가한 인사들의 과거 행보로 인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정리된 것이다.
분열이란 민주당이 7.29민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후 내각책임제 실권자인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신·구파가 갈려 이전투구를 벌였던 것이 진짜 분열이다. 그리고 민주당은 4월혁명 이후 통일운동이 전면적으로 활성화된 상황에서 민족, 통일문제를 용공으로 몰고 강력하게 대응만 했다.
지춘란은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를 서울구치소에서 겪으면서 사회당·사회대중당 여성 당원으로부터 정세 귀동냥을 하며 동지도 사귀었다고 본다. 그렇기에 사회대중당 최만리 중앙당 부녀위원장이 결혼 상대로 황금수를 소개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황금수는 “(남성 당원과 달리) 그 양반들은 특히 여성적인 어떤 성격이라 할까, 서로 당은 달라도 한식구처럼 자주 만났더라고. 옥살이도 같이했기 때문에 그분들은 언니, 동생으로 잘 통하는 그런 관계였습니다”라고 사회당·사회대중당 여성 당원에 대해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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