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김정숙 항일혁명가 가족의 피어린 투쟁사가 깃든 연길 팔도구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12/27 [04:0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해방직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김일성 주석 그리고 아내 김정숙 항일 투사, 김정숙 투사의 눈빛에는 김일성 주석의 신변안전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온 예리한 빛이 어려있다.

 

 

12월 24일은 북의 김정숙 항일혁명가의 탄생일(1917. 12. 24. ~ 1949. 9. 22.),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고사령관 추대일이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세계 곳곳이 크리스마스 이브 분위기에 들뜨는 12월 24일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김일성 3대 '백두혈통' 일가의 기념일로 각인돼 있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고사령관 추대일인 동시에, 김정일의 생모이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조모인 김정숙의 생일이어서 김일성·김정일 동상 참배나 경축 공연 등 김일성 일가를 기리는 행사가 이날 북한 곳곳에서 치러진다.

 

그러면서 연합뉴스는 1917년 12월 24일 출생한 김정숙을 '띄우기' 위한 관영매체들의 선전도 이날을 즈음해 활발히 벌어진다. 북한에서 김정숙은 김일성의 부인이자 항일투쟁 전우로서 '백두산 여장군'으로 신격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 2016년 12월 24일 김정숙 투사 탄생일을 기념하여 회령의 김정숙 기념관을 찾아간 북 주민들에 대한 북 언론 보도 장면     ©

 

관련 북의 보도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김정숙 투사가 나서 어린시절을 보낸 회령 오산덕의 초가집을 찾아가고 기념관을 둘러보며 김일성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이나 기념비가 있는 곳을 찾아 헌화를 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대통령령 공포로 만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김정숙 투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김정숙김일성(金日成)의 첫번째 부인이자 김정일(金正日) 북한 노동당 총비서의 친모이다. 함경북도 회령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만주의 길림성(吉林省)연길현(延吉縣)으로 이주하였다.

어릴 때부터 아동단에 가입하여 반일활동을 하였으며, 1933년에 공산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35년 9월에 항일유격대에 가입하여 1936년 이후 김일성이 지휘하는 항일연군 제1로군 6사에서 활동하였으며, 제1로군 6사가 주도하던 조국광복회 조직사업을 위해 공작원으로 장백현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그러나 항일유격대 기간동안 주로 음식과 재봉 등의 일을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김정숙 [金正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렇게 분명히 유치원과 초등학교 나이에 가입하는 아동단부터 시작하여 해방의 그날까지 항일독립운동을 벌였다고 적혀있다. 특히 1935년부터서는 총을 잡고 영하 45도를 오르내리는 만주벌판의 혹한 속에서 최정예 일본관동군 토벌대와 맞서 싸웠다. 재봉대와 작식대(취사원) 일을 했다고 좀 더 쉽고 안전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 당시 작식대원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전투를 하면서 밥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행군 쉴참에도 작식대원들은 나물이나 잣 등 먹거리가 될 만한 것을 채집하느라 잘 쉬지도 못했고 남이 잠든 시간에 찢어진 군복이나 군모를 수리해야 했다.

오죽 바빴으면 장철구 항일유격대 작식대원은 전투와 행군을 반복하며 대원들 밥까지 차려 내려니 조금도 시간을 낼 수 없어 바늘이 손바닥을 관통하여 꽂혀있는 상태로 며칠동안 일을 하다가 겨우 한 숨 돌릴 시간이 나자 대원들에게 바늘 좀 뽑아달라고 했겠는가.

 

중국 연변박물관 혁명사적주임으로 오랜 기간 항일운동을 조사 연구한 리송덕 역사가가 이런 이야기와 함께 들려준 김정숙 투사와 그 가족이 남긴 항일 투쟁사를 다 쓰자면 책으로 몇 권은 족히 넘을 것이다.

 

▲ 김정숙 투사의 오빠 김기준 투사 등 수백명의 항일투사들을 참수했던 팔도구의 호조참안지를 가리키는 리송덕 역사가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호조참안으로 몇날 며칠 동안 붉은 물이 흘렀다는 팔도구강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일제치하 연길 팔도구 경찰서, 여기에 김정숙 투사 오빠 김기준 열사 등 수많은 애국자들이 갇혀 숱한 야수적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던지 지금도 건물이 틈하나 갈라지지 않았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김정숙 투사의 발자취는 만주 곳곳에 남겨져있다. 특히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던 1935년 이후 김일성부대의 주된 활동지역인 백산지역에 많다. 여기에서는 리송덕 역사가가 들려준 팔도구 시절의 삶만 간략하게만 살펴본다. 리송덕 역사가의 주장이니 북의 주장과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 양지 바란다.

 

[김정숙  항일투사의 아버지 김중산 독립운동가는 천도교 관계자로 회령지역에서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 중에 하나다. 그 일로 일본놈들의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체포령이 떨어지자 가정을 두고 먼저 동북지역으로 들어왔다. 

1919년 김정숙 투사의 아버지가 정착한 곳이 팔도구였다. 팔도구에 천도교가 흥성했다. 여기서도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후 김정숙 투사가 5살 정도 되었을 때 어머니, 언니, 오빠 등 가족 모두와 함께 용정을 걸쳐 팔도구로 들어와 팔도구 신흥동에서 아버지와 살았다. 땅이 없어 팔도구 공안국장 '다부살이'란 이름의 한족의 땅을 얻어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가 흉년이 든 해에  소작료를 내지 못했다고 대신 언니를 첩으로 끌고 갔다. 그것을 결사적으로 막아 나선 아버지와 오빠가 심하게 맞아 오빠, 김기준은 영영 다리를 절게 되었다. 가족은 다시 팔도구의 서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아버지도 얻어맞은 후유증으로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 김정숙 투사 가족이 연길 팔도구에 와서 일제와 그 주구들의 탄압에 다시 이를 와서 살던 서산 지역의 푯말, 지금은 관리가 잘 안 되어 길가에 방치되어 있었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엄마와 가족들은 팔도구 시가지에서 산을 몇 개 넘어야 갈 수 있는 깊은 살골 부암동으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 연길 팔도구 부암동의 항일유격근거지 기념비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2015년 가을에 방문한 부암동 유적지 기념비와 필자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당시 부암동에는 후에 김일성 장군이 직접 이끌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부관으로 활동한 곽지산이라는 유능하고 열렬한 항일혁명가가 야학 선생으로 있었는데 그 영향으로 오빠 김기준이 열렬한 투사로 자라났다. 중국 당안국 자료를 보면 김기준은 김세준이라는 가명도 써가며 1931년 3:7제 소작 투쟁 등에서 큰 공을 세워 동만특위 산하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팔도구의 금광에 들어가 금을 캐던 노동자들을 조직화하여 많은 양의 화약 등을 빼돌려 유격대에 넘겨 주는 등 뛰어난 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팔도구 공안국에 금광의 비밀조직이 포착되어 무리로 체포되어 수백명의 혁명가들과 함께 호조지역에서 참수를 당했다.

 

▲ 팔도구 금광이 있던 자리, 지금도 금광에서 캐내어 버린 버럭돌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금광 노동자들 숙소로 이용했던 건물     © 자주시보
▲ 연길 팔도구 금광 입구에 있던 포대의 흔적, 화약이 많고 금이 있는 곳이라 경계가 삼엄했던 곳이었다. 이 곳의 화약을 유격대에 넘겨주던 비밀지하조적 성원들이 호조참안에 수백명이나 희생되었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그 참수를 호조참안이라고 한다. 당시 시체에서 나온 핏물이 온통 팔도구강을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당시 일제는 그 참수를 팔도구 주민들을 다 모아놓고 진행했다. 일제에 대항하면 이렇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참안을 목격했던 당시 10여살의 김하수 노인의 증언을 직접 들어 채록한 기록이 연변 당안국에 있다.

김정숙 투사도 피어린 가족사와 오빠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일제와 그 주구 친일착취계급에 대한 저항의지가 남달리 뜨거웠다.

 

▲ 김정숙 항일투사가 지도했던 아동단학교가 있던 곳에서 바라본 부암동 마음, 아동단학교터는 토벌이 진행되면 제일 먼저 산으로 피신할 수 있게 이렇게 마을에서 산으로 깊이 들어온 곳에 있었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부암동 팔도구항일유격근거지 아동단학교가 있던 터, 여기를 발굴해보면 당시 관련 유적들이 나올 것이다.     © 자주시보

 

아동단 활동을 해오던 김정숙 투사는 31년도에 소년선봉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부암동에서 혁명이 일어나 유격근거지가 세워져 인민혁명정부 산하 아동단학교가 세워지자 교사일을 주로 맡았다.

이 부암동의 항일유격대가 팔도구 시가지를 들이치기도 하는 등 일제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자 일제는 부암동에 무시로 토벌대를 이끌고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김정숙 투사의 어머니와 올케언니가 학살당하게 되었다. 불타는 초가집에 가두어 학살했다.

 

▲ 팔도구 시가지 중앙로, 일제시대에도 이런 구조였다. 이 시가지 끝 2/3지점에 경찰서가 있다. 유격근거지 유격대가 이곳까지 진출하여 총격전을 벌였지만 경찰서까지는 점령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 부대가 정식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이런 시가지는 식은죽 먹기로 점령하였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마지막 남은 혈육인 동생 김기성 투사마저 토벌대와의 싸움에서 피난가는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쪽으로 토벌대를 유인하여 끌고 가다가 일제의 흉탄에 희생되었다. 

 

▲ 김정숙 항일 투사의 남동생 김기성 항일투사가 아동단원들과 함께 이 바위 위에서 보초를 서다가 토벌대가 들어오면 나발을 불거나 종을 쳐서 알렸다고 한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중국 공안국장의 첩으로 끌려갔던 언니 김정순만 살아남았다. 그 김정순 씨는 현재 일가친척들과 함께 북으로 들어간 상황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머니의 혈육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이상 리송덕 역사가의 진술)

 

김정숙 투사의 오빠 김기준 투사가 활동했던 금광을 취재하고 나오던 길에 그의 언니 김정순 씨와 그 남편 김낙현 씨 부부와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는 조선족 송영만(2015년 당시 72세)씨를 만나보았다. 그는 현재 연길시 소영진 오봉촌에서 살고 있다.

김정순 씨는 해방 후 첩살이를 그만 두고 건실한 김낙현이라는 조선족 청년을 만나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낳고 평범하게 살았다고 했다.

 

▲ 김정숙 투사의 언니 김정순 여사 가족이 중국에 살 때 이웃이었던 송영만(2015년 취재 당시 만 72세) 씨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김낙현 그 사람이 계산을 아주 잘했다. 마을 회계일을 맡아 했는데 틀림이 없었다. 그 아내(김정순) 는 요리를 잘 했다. 첩살이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바가 없다. 그런 과거는 누구도 절대 말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중국의 농민들이 다 그러했듯이 생활은 매우 어려웠지만 자녀들을 잘 키우며 오순도순 살았다. 자녀들도 다 예의바르고 똑똑했다. 신체는 작았는데 다 아들이건 딸이건 머리가 똑똑했다."

 

지금 그 언니 가족들은 북에서 살고 있는데 언론에는 거의 나온 적이 없다. 우상화나 신격화를 하려고 했다면 김정숙 투사의 살아있는 언니와 그 후손들을 내세우는 것이 유리할 텐데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항일투쟁을 하다 희생된 김기성 동생에 대한 기념물은 북의 보도에 가끔 나온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김기준 오빠에 대한 기념물은 거의 접하지 못했다. 아마 김기준 오빠의 희생에 관한 무수한 이야기들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검증할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김기성 동생의 장렬한 희생은 당시 아동단 교사였던 김정숙 여사가 직접 겪은 일이니 명백하게 검증된 일일 것이다.

 

북이 김일성, 김정일 영도자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다 무조건 영웅시하지는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일성 주석의 유일한 생존 동생인 김영주의 경우도 그렇다.

 

그런데 남측에서는 북의 최고영도자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우상화니 신격화니 하며 비하하고 조롱만 하고 있는데 후대들을 위해 피흘려 싸운 독립운동 선조에 대한 예의도 아닐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이제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백산 지역에서 취재한 김정숙 투사의 이야기는 정말 손에 땀을 쥐게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당시 국내공작을 나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할 할 일이었다. 실제 혜산 지역으로 공작을 나갔다가 압록강을 너머 중국으로 건너올 때 미행을 하며 따라오던 일제특무를 숲속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여지없이 사살하기도 했고 일제 경찰서에 끌려가 처형당하기 직전에 주변 인민들이 양민보증서를 순식간에 수백장 써가지고 와서 구원해 낸 이야기 등 김정숙 여사의 반일독립운동 활동은 실로 그 어떤 뛰어난 독립운동가 못지 않았다.

 

▲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는 전투지휘를 하느라 미처 적들이 겨눈 총구를 알지 못했던 김일성 주석을 위기일발의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한 몸으로 막아나서며 적들에게 명중탄을 안겨 김일성 주석을 구했던 경우가 여러번 있다고 리송덕 연변박물과 역사가가 증언하였다. 위 그림은 대사하치기전투에서 김정숙 투사가 김일성 주석을 노리는 일제 관동군 토벌대를 저격하는 모습이다.

 

특히 김정숙 투사는 김일성 주석을 일제로부터 지켜내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투 때마다 김일성 주석의 신변안전에 온 몸을 던졌다. 여러 전투에서 김일성 주석을 측면이나 배후에서 노리는 일제 관동군 토벌대를 발견하고 몸으로 김일성 주석을 막으며 먼저 쏴서 쓰러뜨렸다는 일화들을 리송덕 역사가도 여러가지 알고 있었고 그 전투 현장까지 안내해 주었다.

 

▲ 중국에서 13도구나룻터(북 신파나룻터 맞은편)세운 김정숙 여사 항일 유적표식비     ©자주민보, 이창기 기자

 

▲ 중국 13도구 맞은 편 북측 신파(현 김정숙 군)의 김정숙 여사가 압록강을 건너다니며 비밀지하독립혁명사업을 진행했던 나루터 사적비와 일제 감시 포대    ©자주민보, 이창기 기자

 

물론 중국 동만특위 산하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김일성 항일 유격대에서 활동했으니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독립운동을 한 것을 우상화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은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환되어 거의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이념적으로 다르다고 항일선조들을 버린다는 것이 과연 인륜에 맞고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럴 경우 좋아할 세력은 재침을 노리는 일본 국군주의자들과 우리민족이 서로 좌우로 갈라져 치고 박고 싸우다 망하기를 바라는 음흉한 주변세력들일 것이다.

 

▲  희생된 독립투사들의 피를 머금어 저리 붉은가!  팔도구 경찰서 앞에 피어난 유난히 붉은 다알리아.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2015년 가을 김정숙 투사 가족이 살며 투쟁했던 부암동 팔도구유격근거지 가는 첩첩산중의 절경단풍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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