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76] 고구려 안장왕의 사랑이야기2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7/11/13 [01:0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방송에 등장한 광개토태왕 영상     ©자주시보

 

 

1. 국경을 넘은 사랑이야기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

 

인간사는 매사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도 우연한 인연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삶이나 역사 진행과정에 어떤 한 개인사는 필연이 아닌 우연한 계기로 중대한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면밀히 생각해보면 인간사는 어떤 우연한 계기가 아닌 필연적 계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한 사회, 집단, 나라 등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역사의 진행과정에 의해 개인의 일상사도 종속적으로 규정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고구려 제22대 안장왕과 백제 개백현의 장자(長子) 한씨의 딸 한주(韓珠)와의 사랑이 움트고 싹이 튼 것도 역시 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 의해 일어난 필연적 사건이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제부터 당시의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그에 더해 임나, 가라, 아라가라 사이에 얽히고설킨 복잡한 역사 진행과정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고구려 제22대 안장왕의 휘는 흥안(興安)이요,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의 맏아들이며, 문자명왕 7년(서기 498년, 이하 서기) 태자로 책봉되었다.

안장왕이 태자로 책봉되고, 고구려 제22대 임금(사실은 왕이 아니고 ‘임금’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된다.)에 즉위하여 재위에 있었던 시기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임나, 아라가라 사이에는 대단히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물론 국제적 관계라고 표현은 했지만 모두 한 겨레요, 한 뿌리 즉, 한국-신시(神市)-단군조선(檀君朝鮮)에서 나온 동족의 나라들이었다. 이와 같이 한 핏줄의 동족이요, 나라의 뿌리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신들의 처지와 위치에 따라 때로는 협조하는 동맹국이 되었다가 또 상황이 바뀌면 적대적으로 돌아서서 심각하게 대립을 하는 관계를 반복하였다. 이를 두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가들은 배신이요, 신의를 저버린 행위로서 민족 반역적인 행위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신라는 391년 이래로 맺어진 백제, 가라, 왜의 연합세력의 침략에 의해 나라가 붕괴 직전에 빠져있었다. 이때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392년 즉위, 22년간 재위)이 396년(영락 6년 병신년)과 400년(영락 10년), 407년(영락 17년)에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왜를 대파하여 신라를 위란에서 구원하여주었다. 이에 대해 조선의 사회과학원 손영종은 1985년 9월 일본 오사까에서 진행된 강연회에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해석’ 발표된 논문에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고증하였다.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릉비 탁본     ©자주시보

 

[남방에서도 고구려는 391년 이래로 백제-가야(가라)-왜 련합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한 편으로는 신라를 도와주면서 볼모까지 받아들임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396년(영락 6년 병신년)에는 백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백제왕으로 하여금 ‘노객’(천한 신하)을 자칭하면서 왕제, 10명의 대신을 볼모로 보내고 생구(노비) 1,000명, 세포(가는 새의 삼베) 1,000필을 배상으로 무는 외에도 58성 700촌 지역을 할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때 고구려의 지상군이 강력한 수군 무력과의 협동 밑에 한강 이남(한수 임-필자 주) 이북의 수많은 백제성들을 함락시키고 수도 한성(경기도 광주-원주, 남평으로 대륙 하남성에 있었음. 필자)으로 육박해 들어간 것은 고구려군의 강대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또 400년(영락 10년), 407년(영락 17년)에 각각 5만 명을 동원시켜 대규모 원정을 조직하고 수많은 성들을 함락시키고 투구 갑옷 1만여 개를 포함한 막대한 량의 무기, 기자재를 로획한 사실이나 404년(영락 14년)에 대벙계에 불법 침입한 왜군을 여지없이 격파한 사실은 고구려의 국력, 군사력이 백제-가야(가라)-왜에 비하여 훨씬 강대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광개토왕릉비문연구, 사회과학원, 중심

 

위 조선사회과학원 손영종이 고증한 ‘광개토왕릉비문’에 기록된 고구려가 신라원정을 하여 백제와 왜 그리고 일부 가라군의 협동작전에 의해 위기에 빠진 신라를 구원해주었다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광개토태왕의 대외 원정과 그 강대함 그리고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필히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 해석에 관한 자료를 접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신라 제19대 임금인 눌지 마립간(말한, 417년 즉위, 42년간 재위)은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임금에 즉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서기 400년과 407년 백제-왜-가라 연맹군의 두 차례에 걸친 신라 침공에 의해 나라 자체가 붕괴될 수 있는 누란에 빠져 있을 때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의 원정으로 구원을 받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으며, 눌지 마립간(말한)이 신라 제19대 임금으로 즉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고구려 제20대 임금인 장수태왕(413년 즉위, 79년간 재위)이 ‘북수남진정책(北守南進政策)을 펼치자 이에 위기를 느끼고 신라-백제-임라-아라가라와 대 고구려4국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할 예정이다.

 

한편 백제 역시 고구려와 그 뿌리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장수태왕의 ‘북수남진정책’에 맞서 이전까지 앙숙관계에 있던 신라와의 대고구려 4국동맹에 참여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게 된다. 물론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임나가라(대가라), 아라가라(안라가라)동맹을 맺은 것은 당연지사이다.

 

삼국사기 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始祖) 온조왕 조에 “그 세계(世系,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로 성씨를 삼았다.”고 하였다. 또 백제는 시조 온조왕 “원년(BC18)여름 5월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을 세운” 후 백제 제18대 전지왕(腆支王) “2년(406)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하는(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 등 나라를 개국한 이래 약 420여 년간 한 뿌리의 나라로서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왔다.

 

이처럼 우호적이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고구려 제20대 장수태왕(413년 즉위, 79년간 재위, 413-492)의 북수남진정책에 의해 급격하게 무너지게 된다. 물론 장수태왕 이전인 고구려 제19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392년 즉위, 22년간 재위, 392-413)이 백제-왜-임나,아라가라와의 동맹국들의 침략에 의해 나라가 붕괴될 위란에 빠진 신라를 도와 서기 400년과 407년 두 번에 걸친 대병을 동원한 원정을 통해 백제-왜-가라 동맹군을 완파하고 신라를 구원하면서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당시 백제는 광개토태왕의 백제원정에 패배하고 “백제 왕이 ‘노객’(천한 신하)을 자칭하면서 왕제, 10명의 재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고 하지만 아마도 내심으로는 강한 적개심을 품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는 전지왕 2년(406년)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한 이후 더 이상 후대 임금들이 배알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이후부터 백제는 고구려와의 관계를 멀리하고, 양국의 건국 이후 줄곧 원수지간이다시피 서로 침략을 일삼으면서 으르렁거리던 신라와 급격하게 가까워지게 된다. 이와 같은 기조에 따라 백제는 제20대 비유왕(毗有王,427년 즉위, 29년간 재위, 427-456) 7년(433) 가을 7월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和親)을 청했으며, 8년(434) 봄 2월 사자를 신라에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선사하고, 가을 9월 또 희귀한 매를 선사하니 신라는 겨울 10월 양금과 명주(明珠, 비단)를 보내 보답을 하였다.(삼국사기 권 제25 백제본기 제3, 비유왕 조)

 

백제 제20대 비유왕이 재위에 있던 시기 신라에서는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417년 즉위, 42년간 재위, 417-458)이 재위에 있었다. 백제 비유왕이 화친을 청하고 좋은 말과 희귀한 매를 신라에 보냈다는데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17년 조에는 “17년 가을 7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해 이에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8년 조에는 “18년 봄 2월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오고, 가을 9월, 또 흰 매를 보내왔으므로 왕은 겨울 10월, 황금과 명주로써 보답하였다.”고 하여 이 시기부터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후일 ‘라-제동맹’이라 불리는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백제-신라-임나가라-아라가라’의 대 고구려 4국동맹이 맺어졌던 것이다.(계속)-2017년 11월 1일 서울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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