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93]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20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3/22 [14: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부여 시조 해모수 임금 재위시에도 치열한 대결전을 벌였다. 당시에는 화하족의 나라로는 진이 있었으며,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던 연나라가 있었다. 특히 북부여는 연나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우선 북부여의 대외항쟁사를 보기 전에 과연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역사에서 알려져 왔던 이론이 옳았는가를 보기 위해 우리 겨레의 역사 속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자조선을 간략히 보도록 한다.

 

기자조선에 대해 기존의 역사서나 학설들에 대해서도 주 무왕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니 이에 은의 왕족인 <기자>가 무왕에서 홈범구주를 변론(강의)하였다. 그래도 주 무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자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도망쳐와서 <기자조선>을 세우고 후박달나라를 이어 이끌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위와 같은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역설에 지나지 않는다. 기자에 관한 단기고사 <기자조선> 3세 솔귀 임금 45년 조에는 “45년 은나라 주의 친척인 기자가 주 나라의 신하될 마음이 없어 동쪽으로 나오니 강달, 궁흠 등 50여 명이 따라와 요수변에 이르러 머물렀다. 임금께서 그 사정을 가련하게 여기고 요서의 한 모퉁이에 거주하게 하셨다. 은 백성들 중에는 기자를 우러러 받드는 자들이 모여 살면서 기자정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망명자 기자의 사정을 가련히 여겨 기자와 그를 따라 함께 망명한 망명객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마련해주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단기고사의 기록은 결코 <기자조선>이 성립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한단고기 단군세기 솔나 임금 재위 38년 조에는 정해 37(B.C 1114) 기자가 서화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세기의 기록 역시 단기고사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주 무왕이 조선으로부터 전해진 홍범구주를 배척하니 이를 다시 한번 더 강설을 해주고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니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망명을 해 오자 그가 살 땅을 마련해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즉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해 온 사실과 그가 결코 조선에서 <기자조선>을 건국하였거나 <후박달나라>를 이어 받은 것이 아니라는데 대해 단재 선생 역시 정확하게 고증하여 조선상고사를 기록해 놓았다.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쳐 온 것은 상나라가 주 나라에 의해 망함과 동시에 상의 국교인 <수두(소도, 삼신교)>교가 압박을 받게 되었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기자가 왜 무왕이 다스리는 주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고증해주는 것이다.

 

계속해서 조선상고사에서도 단재 선생은 이전의 역사서에서는 단군 왕검 후에 기자왕조선이 라고 기재해놓았으나 기자는 그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의 왕이 되었다.”라고 고증하였다. 이외에도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문화사>를 통해서도 기자조선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고증하여 놓았다. 이에 대해서는 후일 후박달나라, ·동부여를 다룰 때 상세할 계획이니 여기서 그친다.

 

한편 한단고기 단군세기 고열가 단군 58년 조에 계해 58(B.C 238) ~중략~이 보다 앞서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도읍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고 기록하여 기자의 후예인 <기비>를 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번조선> <기자조선>의 임금으로 봉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단기고사,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한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들을 살펴 본 바와 같이 주 무왕이 조선으로부터 수입된 <홍범구주>를 배척하니, 이에 반기를 들고 주 무왕에게 강설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니 고국을 떠나 조선으로 망명해 온 기자는 망명과 동시 후박달나라를 이어 <기자조선>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그의 먼 후예인 수유후 기비가 북부여 시조 해모수에 의해 번조선 즉 기자조선의 임금에 봉함을 받아 그 이후 연 나라 위만에게 망하던 정미년(B.C 194)까지 44~45년여간 번조선을 이끌었을 뿐이다. 이는 독자적인 나라로서가 아닌 후박달나라를 이은 북부여의 제후국인 <번조선·기자조선>인 것이다. 따라서 기자의 후예들인 기비·기준의 해모수 임금의 제후이다.

 

그럼 한단고기 북부여기 상 제1세 해모수 임금 19년 조에 경진 19(B.C 221) 기비가 죽으이 아들 기준은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현 역사학계에서 신주단지처럼 떠받드는 <기자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북부여 후대 임금들이 기록에도 나오니 계속해서 분석하도록 한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화석처럼 굳어져 전해져 내려오는 <기자조선>은 주 무왕에게 반기를 들고 고국을 떠나 조선으로 망명한 은왕실의 후손인 기자가 건국한 나라가 아니다. 실제로 <기자조선>은 후박달나라 삼조선 가운데 하나인 <번조선>을 가리키는 나라이다. 그리고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가 반기를 들고 후박달나라에 맞서 군사반란을 일으킬 때 기자의 먼 후예인 <수유후> 기비가 협력을 하였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군사반란에 성공한 해모수 임금에 의해 <번조선·기자조선>의 임금으로 봉함을 받았다. 기자의 후예인 기비가 번조선 임금, 즉 북부여의 제후로 봉함을 받아 18여 년간 번조선·기자조선을 통치한 후 죽고, 그 뒤를 이어 기비의 아들 기준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27년 간 통치를 하였다. 따라서 기자의 후예가 번조선 임금으로 통치를 한 기간은 45년여 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시 북부여의 전 강토를 다스린 것이 아닌 <번조선·기자조선>에 머물렀을 뿐이다.

 

한편 북부여 시조 해모수 임금 19년 조에는 경진 19(B.C 221)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라고 하여 북부여 해모수 임금 재위시 연나라의 진개가 북부여 변방을 침략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당시 연나라의 조선영토 즉 북부여 침략은 조선족의 대외 항쟁사에서 있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본 사건에 대해 분석한 기록들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북부여사를 상세하는 것이 아니니 한단고기에 임승국 선생이 주석한 기록과 단재 선생의 기록만 인용하도록 한다. 본 문제를 우리 민족사에 있어 대단히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니 후일 상세할 것이다.

 

<임승국 선생의 주석>

진개·만번한: 사기의 흉노전에는 [기후연유현장전개위질어호]라 있다. 즉 그 뒤 연나라에 현장(현명한 장군) 진개가 있었는데 동호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고 했으며 [호심신지 귀이습과 동호 연역축장성 자조양지양평]이라 하고 있다. 즉 동호가 진개를 매우 신임하여 풀어주었는데 제 나라로 돌아와서 동호를 습격하여 파했으며 연나라도 조양으로부터 양평까지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한편 위략은 여기서 동호 대신에 조선이라고 조선의 국호를 밝혀 놓았다. 사기는 이 조연전쟁을 흉노전에 실음으로써 조선의 강력함이나 진개가 조선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애썼다. 곧 사기의 동호는 조선 특히 북부여를 뜻함이 명백해졌다.

이 부분은 한국 사학계의 주요 쟁점인 셈인데 종래 식민사학에서는 이 만번한을 평안북도 박천일 것이라고 역시 반도사관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면 저 춘추전국의 전쟁터가 만주대륙과 한반도까지 확대해지는 셈이고 전국칠패의 하나라는 연나라와 평안북도 박천지방에서 국졍을 맞대는 꼴이 되는데 상고사의 강역을 이렇게 주책없는 늙은이 시루떡마냥 아무렇게나 남에게 떼어주어서야 되겠는가? 사마천의 사기 흉노전은 조양으로부터 양평까지 연나라의 장성을 소개하지 않았는가? 만번한이 아무리 동쪽으로 오고 싶어도 연나라의 장성 동쪽 끝 양평보다 더 동쪽으로 올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또 양평도 요동반도의 요량에 있다는 식의 낭설이 있는데 최근(1980년대)의 연구로는 북경 북쪽의 창평이 곧 양평이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왕망은 옛 양평을 창평이라 개명했고 그 창평이 지금의 지도에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만번한은 하북성이나 요녕성 남쪽에서 찾아야 할 지명이지 결코 평안북도 땅 박천 운운하는 말일랑 이젠 거두어 버릴 때일 것이다.”

<한단고기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해 127>

 

위 임승국 선생이 주해한 글을 보면 이 땅에 이어져 내려 온 식민사학의 페해 즉 반도사관의 해악이 얼마나 심한가를 알 수 있다. 이는 일제가 1912년부터 1932년까지 약 20년 간 우리 배달겨레의 찬란했던 역사를 마치나 화하족에 의한 식미의 역사로 왜곡·조작한 사학 아닌 사학을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오기 때문에 빚어지는 참담한 현상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이어 온 찬란한 역사는 현 조선반도와 만주만이 아닌 대륙과 몽고·시베리아 동부, 그리고 중앙아시아까지 실로 방대했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분명하게 알아야 하며, 또 후세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위 임승국 선생의 글의 요지는 바로 이점을 강조한 것이다.

 

아래에서는 연나라 진개의 조선 즉 북부여 침략에 대한 단재 선생의 분석을 보도록 한다.

 

단재 선생의 진개의 조선침략과 장성

신조선의 서침과 연··진의 장성

삼조선이 분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조선>의 왕 모갑이 영무하여 마침내 []·[] 양 조선을 다시 연합하여 지금의 동몽고 등지를 쳐서 선비를 정복하고 연을 쳐서 우북평(지금의 영평부, 하북성)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의 옛 땅을 회복하니 연왕이 크게 해마다 신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신하라 칭하며 태자를 인질로 보냈는데 모갑이 죽고 모을이 왕이 되어서는 연 태자가 진왕이 되고 장군 진개를 왕자로 속여서 인질로 보냈다.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가 총명하고 지혜로운 것을 사랑하여 늘 자기 곁에 두엇는데 진개가 모든 군국의 비밀들을 탐지하고 나서는 도망쳐 돌아갔다. 그리고는 연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신조선을 습격하여 신, , 불 삼국의 수병을 돌파하고 서북의 변경, 곧 전자의 신조선 왕 모갑이 점령하였던 상곡·어양·우북평 등지를 탈취하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서 불조선의 변경을 습격하여 요서(지금의 노룡현)와 요동(지금의 요양 부근)을 함락시켜서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5개 군을 설치하고 2천여 리의 장성을 쌓아서 조선을 막았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125~126>

 

위 인용문에서 단재 선생은 연과 쟁투를 벌이던 조선의 나라가 북부여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문 가운데 <신조선>·<>·<> 등을 언급함으로써 실제 당시 연과의 쟁투에 북부여 혹은 이전의 후박달나라가 그 주역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 후박달나라는 제44세 구물 임금 재위 시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고 이전 삼한 즉 <신한>, <말한>, <불한>의 세 한을 두고 다스리다가 이 때 세한을 <신조선>·<말조선>·<번조선>으로 바꾸어 다스렸다. 이에 대해 한단군기 단군세기 제 44세 구물임금 원년 조에는 병진 원년(B.C 425) 마침내 3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잉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 바꿔 불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라고 기록하여 이 시기 나라 이름을 바꾸고 또 지경의 이름 또한 바꾸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한단고기 단군세기의 이와 같은 기록을 단재 선생의 <삼조선> 고증과 일치한다. 여기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삼조선이 나라를 지키고 또 적을 징벌함에 있어 군대를 독자적으로 운용했다는 기록이다. 본 내용은 단재 선생이 고증한 신조선의 왕 모갑과 ~중략~ 불리지의 옛 땅을 회복하니라는 내용 또한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인용문 가운데 연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해마다 신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신하라 칭하며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고증 역시 정확하다. 한단고기 단군세기와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기 하 그리고 단기고사에 단재 선생이 고증한 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단기고사 후단군조선 제 17세 음차(41세 단군. 경술년-B.C 419-에 즉위) 21년 조에 “2(신해년 B.C 490) 연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라고 기록하여 당시 후박달나라와 연의 관계에서 연나라는 후박달나라의 하위 국가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단기고사는 연 나라의 수많은 인물들이 후박달나라의 지경으로 망명해 온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한편 한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연나라와의 쟁투·전쟁에 대해 관한 기록이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또 번한세기 하에서도 연과의 관계를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 후박달나라의 번조선과 북부여의 번조선이 연나라와 치열하게 전쟁을 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는 그 모든 기록을 다 다룰 수가 없으니 위에서 인용한 단재 선생의 글과 그 맥이 닿을 수 있는 기록 한 두 개 정도만 언급하도록 한다. 나머지 역시 후일 상세할 것이다.

 

먼저 단군세기 제 36세 단군 매륵 52년 조에는 무진 52(B.C 653)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를를 정벌게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 나라에 위금함을 알리자 제 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싸워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라고 기록하여 연과의 쟁투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단군세기 제 45세 단군 여루 35년 조에는 병진 32(B.C 365)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육박해왔다. 이에 번 조선의 대장군 우문언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공격하여 연나라·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고 하였으며 계속해서 정사 33(B.C 364)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죽였다.”라고 기록하여 당시 연나라가 후박달나라를 침략하였지만 진··막 조선의 연합군에 의하여 패퇴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이는 단재 선생이 고증한 내용과 정확하게 부합하는 기록이다. 또한 단군 여루 54년 조에는 무인 54(B.C 343) 상곡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서는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고 기록하여 단재 선생이 고증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기 하, 수한임금 2년조에는 임오년(B.C 339)에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안촌골을 공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의 사람 기후가 자식고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니 곧 진··한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는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연나라의 도읍지 현재 북평 동쪽에 계라는 지명이 있다.)의 남쪽에서도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라고 하여 당시 후박달나라의 연합군과 연나라와의 전쟁상황을 상세하게 기록을 하여 놓았다. 이러한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기록 내용 역시 인용된 단재 선생의 고증과 정확하게 일치하여 두 기록의 신빙성을 담보해주고 있다.

 

계속해서 단재 선생이 고증한 기록을 보도록 한다.

 

“<사기>의 조선열전의 전연시 상략속진번조선(연 전성기에 일찍이 진·번 조선을 침략하여 부속시켰다.)’이란 기사와 흉노열전의 연유현장진개, 위질어로, 호심신지, 귀이습파동호, 동호각천여리, 연역축장성, 자조양 지양평, 치상곡, 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연의 현장 진개를 호에인질로 보냈는데 호왕은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그가 도망쳐 돌아간 후 동호를 습격하여 파하자 동호는 1천여리나 뒤로 물러갔다. 연 또한 장성을 쌓아서 조양에서부터 양평에 이르는 사이에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다섯 개의 군을 설치하였다.)’이란 기사와 <위략>연내견장진개, 공기서방, 취이천여리, 지만번한(연은 이에 장군 진개를 보내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탈취하여 만반한에까지 이르렀다.)’이란 기사들은 모두 이 일을 가리킨 것이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26>

 

위 단재 선생의 글 인용문은 이미 앞서 모두 설명이 되었기에 여기서는 굳이 별다른 분석을 하지 않는다. <사기><위략>의 기록의 허구성, 과장, 확대성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하겠지만 이미 앞서 본 단기고사나 한단고기의 기록으로도 이미 밝혀졌다. 그럼 연의 진개가 조선을 침략하여 거둔 성과에 대해 화하족들의 역사서들이 얼마나 확대·과장하여 기록했는지를 고증한 단재 선생의 글을 아래에서 보도록 한다.

 

그러나 진개가 인질로 갔던 조선은 <신조선>이지 <불조선>이 아니었으며 만반한은 <불조선>이지 <신조선> 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기>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으로 나누어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이 기재하였으나 진개가 인질이 되었던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중략~ 이에 중국 북방의 나라들 가운데 조선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나라가 연 하나뿐이 아니었다. (지금의 북경시 서쪽과 하남성 북단과 산서성) 무령왕의 장성 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인 담림·누번 등 때문에 쌓은 것이고 진(지금의 섬서성)의 장성은 의거를 멸망시킨 후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 박기봉옮김, 비봉출판사 126~127>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인용문에서 나오는 <의거>에 대해서도 <사기><한서>의 흉노전을 인용하여 상세하였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화하족들이 얼마나 교활하고 악랄한 지 그리고 역사를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하는지에 대해서 수천년 이상을 쟁투해 온 우리 겨레 구성원들은 잘 알아야 한다. <만리장성>만 해도 그렇다. 화하족들이 세상을 속이기 위하여 좃작한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위 말하는 진시황의 만리장성이다. 위 단재 선생이 고증하고 있듯이 만리장성은 진나라의 시황이 다 쌓은 것이 아니다. 마지막 명나라 때까지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다. 즉 인용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만리장성은 진시황 이전인 연, 조나라 때에도 쌓았으며 진나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명나라 때까지 수천년을 두고 쌓은 것이다. 그걸 마치나 위대한 신적 능력을 소유한 진시황과 화하족들이 수십년 만에 만리에 이르는 거대한 장성을 쌓은 것처럼 진실을 호도하여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절대로 속으면 안된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곧 우리 배달겨레의 공격과 압박을 막기 위해 감행한 것이다. 또 한가지 우리가 크게 잘 못 알고 있는 중의 하나가 소이 말하는 <진시황릉>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진시황릉은 절대로 진시황 시대의 릉이 아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후일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니 여기까지만 언급한다.

 

연의 장수 진개의 조선 침략에 대해서도 후일 상세할 것이니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여기서 그친다. 일단 여기서는 과연 북부여 시조 해모수 임금 재위 19년 경진년(B.C 221)에 연의 장수 진개가 조선의 강역을 침략을 했었는지를 고증하여 한단고기 북부여기의 기록의 신뢰성을 검증하기 위한 정도로만 다룬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북부여 해모수 단군 재위 경진 19(B.C 221)에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조선의 서북 변경을 침략하여 강토의 일부를 강탈하여 북부여와 연의 국경이 <만반한>에 이르렀다는 한단고기 북부여기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며 신뢰할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계속-

 

2018311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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