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40]일본의 전후처리가 독일과 달랐던 이유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점령국이 만들었다
문경환
기사입력: 2019/08/16 [00:06]  최종편집: ⓒ 자주시보

1.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미국이 만들었다

 

(1) 핵심 원인은 전후처리 과정의 차이

 

일본의 과거사 부정이 국민적 분노를 넘어 전 세계의 지탄을 받는 가운데 독일의 과거 청산이 주목을 받는다. 2차 세계대전에서 같은 패전국이었음에도 독일과 일본은 전후처리 과정이 확연히 달랐다. 독일은 나치 세력을 철저히 청산했고 오늘까지도 청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법원은 오는 10월 나치 수용소 경비원이었던 92세 전범에 대한 재판을 시작한다고 밝혀 나치 청산 의지가 굳건함을 보여주었다. 반면 일본은 전범 세력과 그 후예들이 지금도 일본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군국주의 사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혹자는 이런 차이를 독일과 일본의 국민성, 민족성에서 찾는다. 어떤 이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로 설명하기도 한다. 베네딕트는 서양의 ‘죄의 문화’와 일본의 ‘수치의 문화’의 대립이 독일과 일본의 전후인식의 차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베네딕트, 『국화와 칼』, 김윤식 옮김, 을유문화사, 2002.)

 

그러나 독일인의 국민성이 일본인보다 우월하다거나, 서양의 문화가 동양의 문화보다 우월하다면 애초에 독일에서 나치가 득세하고 전대미문의 반인륜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은미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전후처리에 미친 영향 연구」(『동아연구』 제58집, 2010.)에서 “독일과 일본의 전후인식 및 책임의 차이가 전후, 동일한 역사를 경험한 양 국가의 전후처리 과정의 차이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독일과 일본은 패전국으로서 주체적인 전후처리를 할 수 없었고, 승전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양국이 전범처리 및 전후배상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승전국들, 그리고 그 가운데 새로운 시대에 절대적 강자로서 군림하게 된 미국이었다”고 지목했다. 

 

나아가 최은미는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를 비교한 연구는 대부분 “전후인식 차이가 전후책임의 차이를, 전후책임의 차이가 전후배상의 차이를, 그리고 이러한 전후 배상의 차이가 각국 국민들의 전후인식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순환적 논리”를 펴고 있어 미국의 책임을 가리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독일의 전후처리 과정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나치 독일은 급격히 붕괴한다. 히틀러의 뒤를 이어 독일 국가원수가 된 카를 되니츠 해군 제독이 이끄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전쟁을 포기하고 5월 8일 미국, 영국에 항복하였다. 소련에는 다음날인 9일에 항복했다. 독일 입장에서는 자본주의 진영에만 항복해 전후처리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지만 그런 전략을 쓸 만큼의 영향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또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항복 후에도 해산하지 않고 버텼지만 오래 갈 수 없었다. 5월 20일 소련이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하면서 결국 23일 연합군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고 장관들을 체포하였다. 

 

6월 5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개국은 베를린에서 연합국 관리위원회를 설치하고 독일을 4개로 분할,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약 4년 동안 독일은 4개국 분할통치 속에서 전후처리 과정을 밟는다. 

 

연합군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9월 31일까지 독일 뉘른베르크에 국제군사법정을 설치하여 ‘뉘른베르크 재판’을 진행했다. 이 재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전후 미국의 세계 자본의 재편을 위한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을 한다. (장수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서독의 자본주의」, 『역사비평』 26호, 역사문제연구소, 1994.) 재판 결과를 보면 소련의 요구만큼 강력한 처벌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듯하다. 프리췌 독일 제국 선전부 실장과 파펜 부수상 겸 대사, 샤하트 경제장관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언되었다. (장수한, 1994.)

 

▲ 뉘른베르크 재판 장면.     © 자주시보

 

전쟁 주모자만 다룬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4개국은 자기 점령지에서 독자적인 후속재판을 통해 나머지 잔당을 처벌하였다. 미국 점령지역에서는 1,941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1,517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 가운데 324명이 사형을, 247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영국 점령지역에서는 1,98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가운데 240명이 사형을, 프랑스 점령지역에서는 2,107명이 회부되어 104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더 엄한 처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 통계에 따르면 1950년까지 13,53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안병직 외, 『세계의 과거사 청산: 역사와 기억』, 푸른역사, 2005.)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어쨌든 초반에는 나치 청산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1948년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연합국의 나치 청산 작업은 정체를 맞는다. 미국은 ‘반나치’에서 ‘반공’으로 노선을 전환하였고 ‘탈나치’ 정책도 독일 재건을 통한 소련 견제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박찬임은 「독일의 전후처리와 과거극복」(2009)에서 “(미국의 노선 전환) 결과 ‘탈나치화’ 작업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 이러한 추세에 미국은 책임이 있으며, 여기에 뉘른베르크 재판의 한계가 있다. 재판이 끝난 1950년대에 서독에서는 ‘재나치화’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나치청산이 후퇴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맥클로이 미국 고등판무관은 1949년 여름 ‘사면위원회’를 구성, 1951년 1월 말 사면을 단행했다. 특히 기업인들과 많은 군인들이 사면대상에 들어있었는데 이들은 나치 지도부에 속한 ‘주요 전범’이었다. 그러나 기업인들 중 누구도 ‘주요 전범’으로 재판에 넘어가지 않고 사면을 받았다. (장수한, 1994.)

 

미국뿐 아니라 영국도 나치 청산에 소극적이었다. 영국은 당시의 관료들을 숙청시키기보다는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될 수 있으면 그들이 원래 일자리에 머무르는 것을 묵인하고자 했다. 또 경제 마비를 우려해 광산업과 농업부문을 청산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송충기, 「나치청산과 독일인」, 『서양사론』 80호, 한국서양사학회, 2004.)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했던 서독 지역에서 나치 세력이 빠르게 부활했다. 1949년 말 서독의회는 연방사면법을 통과시켜 다수의 나치 범죄자들을 사면하였다. 또 1951년에는 이른바 131조 법을 통과시켜 관료, 직업군인 등 나치 부역자들을 복귀시켰다. 1954년 2차 사면법으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박찬임, 2009.) 심지어 1959년 취임한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은 나치 수용소를 설계한 전력이 있으며 1966년 취임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전 총리는 나치에 합류해 군에 복무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밖에 적지 않은 정부 인사들이 나치 부역자였다.

 

반면 소련이 점령했던 동독 지역은 반대의 길로 갔다. 동독의 지도부는 나치의 공산당 탄압 속에서 반나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들이었으며 철저한 나치 청산을 통해 동독이 서독에 비해 정통성이 있고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동독 정부는 동독을 순결한 반파시즘 국가로, 서독을 나치가 부활한 국가로 대비시켰다. (최승완, 「냉전기 동독의 대 서독 선전공세」, 『역사와 경계』 54호, 부산경남사학회, 2005.) 

 

나치가 부활한 서독이 다시 철저한 나치 청산에 나선 계기는 60년대 유럽을 휩쓴 68혁명의 영향이 컸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세대인 68세대는 기성세대와 기존질서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나치 부역자와 비시 괴뢰정부 부역자들이 독일과 프랑스에서 여전히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이 컸다. 또한 프랑스-알제리 전쟁, 베트남 전쟁 등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되는 식민지 침략전쟁에 반대 입장을 가졌다. 이들은 중국의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치민, 쿠바의 체게바라를 연호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기존 사회주의 운동에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구좌파’와 다른 ‘신좌파’로 규정했다.)

 

이런 68세대를 중심으로 서독의 젊은 지식인들이 과거사를 폭로하고 반성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인들도 여기 가담, 서독에서 나치 청산 분위기가 나타났다. 68혁명 이듬해인 1969년 총선에서는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사회민주당(사민당)이 원내1당으로 등극하면서 우파로 분류되는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과 연정을 끊고 서독 최초의 사민당 총리인 빌리 브란트를 세웠다. 신나치 정당인 국민민주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나치의 탄압을 받은 경력이 있던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해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서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이 사건은 독일의 나치 청산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후 독일 고위 정치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거 나치의 범죄행위에 대해 거듭 사과하였고 철저한 나치 청산 작업과 배상 작업을 진행했다. 

 

▲ 바르샤바에 설치된 빌리 브란트 사죄 기념 부조.     © 자주시보

 

(3) 일본의 전후처리 과정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 것과 달리 일본은 미국 단독 점령을 겪었고 그나마도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간접 통치를 받았다. 당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외부의 간섭과 통제 없이 아시아를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지역적인 안정을 이루고자 하였다. 따라서 일본 점령은 독일과 같은 분할 점령이어서는 안 되며, 점령 형태는 연합국 점령 형태를 취하더라도 미국의 우월적인 영향력이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점령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명확히 언급한 것이다. (최은미, 2010.)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은 일본과 동북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쏟기도 힘든 형편이었기에 미국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었다. 

 

1945년 12월 27일 연합국은 극동위원회(Far Eastern Commission)와 대일본 연합국이사회(The Allied Council for Japan)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구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일본 점령정책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기획하고 수행하였다. 미국은 극동위원회와 연합군 최고사령부 등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일본 점령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주도하였다. (박원순, 「동경재판의 시작과 끝」, 『근현대사강좌』 7호, 1995.)

 

1946년 1월 1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설치하고 5월 3일부터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은 2년 반이 넘게 진행돼 1948년 11월 12일에야 끝났다. 재판부는 판결 전 사망한 2명과 정신장애로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2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구체적으로는 교수형 7명, 종신형 16명, 유기형 2명이다. 하지만 사형이 집행된 7명을 제외하고는 A급 전범 19명 전원을 석방해 버렸다. 그리고 냉전 격화를 핑계로 미국은 재판을 조기 종결했다. (최은미, 2010.) 전쟁의 가장 큰 책임자라고 볼 수 있는 천황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았고, 아우슈비츠의 생체실험과 비견할만한 731부대의 범죄 또한 묻어버렸다. 대신 미국은 731부대의 실험 자료를 가져가 훗날 한국전쟁 때 세균전에 활용하였다. 

 

이후 미국은 일본 내 선처 요청에 따라 1958년까지 A급과 B급 및 C급 전범자 대부분을 풀어주고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 (유웅조,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 및 과거 침략행위에 대한 입장비교와 한국의 대응과제」, 『이슈와 논점』 제766호, 국회입법조사처, 2013.)

 

냉전 시기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미국은 전쟁 배상도 축소시켰다. (유웅조, 2013.) 원래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의 전쟁 배상 문제를 상당히 가혹하게 처리하였다. 군수산업의 완전한 파괴와 관련 산업의 삭감, 배상 철거 공장 지정을 철저히 진행해 30% 정도 중간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냉전의 격화와 더불어 미국은 일본 경제의 급속한 부흥을 위해 배상 정책을 전환하였다. (박원순, 「일본의 전후배상정책과 그 실제」, 민족문제연구소,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 문화사, 1995.) 미국이 주도해 1951년 9월 8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패전국 일본의 전쟁책임을 최소한으로 경감시켜 주었고,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내려 주었다. (이원덕,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하영선, 『한국과 일본 새로운 만남을 위한 역사 인식』, 나남, 1997.)

 

(4) 독일과 일본의 차이 분석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전후 국제질서를 재편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할 전략을 구상하였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경쟁자인 유럽을 확고히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거기다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은 미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이에 미국은 독일 나치 세력과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을 자국의 충실한 부하로 활용할 고민을 하였을 것이다. 

 

한때 적이었다고 해도 부하로 삼는 게 가능하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전쟁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적에게 패배하면 물리적인 피해도 입지만 정신적인 굴복도 심각하다. 공포에 젖은 패자는 승자에게 충성하며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를 이용해 승자는 패자를 얼마든지 부하로 삼을 수 있다. 

 

당장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 괴뢰정부가 대표적 사례다. 히틀러는 5월 10일 ‘적색작전’을 개시, 한 달여 후인 6월 14일에 프랑스 수도 파리를 함락했다. 6월 22일 독일과 프랑스가 정전협정을 맺을 때까지 불과 한 달 반 동안 연합국은 군인 36만 명 사상, 190만 명 포로, 2천 대 이상의 항공기 파괴 등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 지도부는 독일에 항복하면서 북부 프랑스를 넘겨주고 남부에 비시 정부를 수립했다. 비시 정부는 철저히 독일의 통제에 따르는 괴뢰정부였다. 비시 정부는 독일에 엄청난 물자를 공급했고 60만 명의 노동자를 독일로 강제징용을 보냈다. 또 유대인 탄압에도 동참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독일이나 일본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써먹을 구상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런 구상이 비교적 잘 실현되었지만 독일의 경우는 달랐다. 독일과 일본이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다자 점령이냐 단독 점령이냐의 차이가 있었다. 

 

독일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개국이 분할 통치했지만 일본은 미국 단독 점령 아래에 있었다. 일본의 사학자 모치다 유키오는 연합국이 독일에 처음부터 경쟁적으로 전쟁 범죄를 철저히 추궁한 반면 일본에서는 미국이 동서 냉전 시기 일본을 우방으로 만들기 위해 책임 추궁을 피해갈 조건을 만들어주었다고 분석했다. (전승훈, 「일본은 왜 독일과 정반대의 길로 갈까」, 동아일보, 2013.8.24.) 일본과 달리 독일에서는 여러 나라가 분할 점령하는 바람에 미국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소리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지역 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은 이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은미, 2010.) 당시만 해도 미국은 자본주의 종주국이 아니었다. 반면 일본은 유럽 국가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둘째,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력 차이가 있었다. 

 

독일에서 초기에 나치 청산이 발 빠르게 진행된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때문이었다. 소련은 다른 3개 국가가 나치 청산을 적당히 하려고 할 때마다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독일에서 나치 청산이 가장 철저히 된 곳도 소련이 점령한 동독 지역이었다. 서독 지역은 어느 정도 나치 청산을 하다가 다시 나치 부활을 허용하였다. 그러다가 68혁명으로 독일 내에서 좌파 세력이 힘을 얻자 다시 철저한 나치 청산을 시작했다. 

 

반면 일본은 사회주의의 영향이 크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 대신 한국을 분단시켰다. 일본에는 소련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일본의 전후처리에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을 철저히 차단했다. 

 

사회주의 세력이 과거사 청산에 영향을 준다는 점은 한반도에서 친일 청산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봐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세력이 주류가 된 38선 이북 지역은 친일 청산을 철저히 한 반면, 사회주의 세력을 철저히 탄압한 38선 이남 지역은 친일 청산이 거의 되지 않았다. 이 후과는 오늘날에도 이어져 자유한국당 같은 친일 후예들이 대놓고 ‘우리 일본을 위해 친일·친미 해야 한다’고 떠드는 상황까지 왔다. 

 

2. 실천적 과제

 

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청산이 왜 정반대의 길을 갔는지를 보면서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찾고 우리 입장에서 오늘의 실천적 과제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경각성을 가지고 반대, 배격해야 한다. 

 

일본은 패전국임에도 전후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과거사 청산을 안 했다는 것은 과거 군국주의 세력의 후예들이 일본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군국주의 사상과 노선, 정책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힘을 키워 언젠가 한반도를 다시 강점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 과거 전쟁 범죄와 식민지 강점을 반성하지 않는 것은 언젠가 이를 반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막는 것을 우리 민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로 인식하고 철저히 실천해야 한다. 

 

▲ 8월 15일 광복 74주년을 맞아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 10만의 시민들이 폭우를 뚫고 ‘노 아베’ 촛불을 들었다. 노래에 맞춰 선전물을 흔드는 촛불 시민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둘째,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부추기는 미국을 절대 믿지 말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켜야 한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배경에는 일본을 자국의 부하로 삼고 일본의 힘을 키워 동북아를 장악, 통제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있다. 미국은 이를 위해 독일과 달리 일본을 분할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했다. 만약 미국이 소련과 일본을 분할 점령했다면 군국주의를 청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대신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고 그 바람에 엉뚱하게도 일제 강점의 피해자인 우리가 분단되고 말았다. 이게 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활용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실현된 결과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면 미국은 우리 민족에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다. 이런 미국이 한국뿐 아니라 동북아에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우리는 용인할 수 없다. 미국의 동북아 영향력을 축소시켜야 일본의 군국주의가 약화된다. 주한미군 철수, 사드 기지 철거 등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해야 한다. 

 

셋째, 자유한국당과 친일적폐세력을 완전히 쓸어버려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일본이 한반도를 다시 강점하는 발판 역할을 한다. 자유한국당 세력이 집권하면 항상 일본의 요구를 수용해왔다. 박정희는 일본의 요구를 전폭 수용하며 한일협정을 체결했고, 박근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고 ‘위안부’ 합의를 하였다. 자유한국당이 사라져야 일본이 동북아에서 발붙일 곳이 사라진다. 

 

독일이 나치 부활을 막고 확실한 청산을 할 수 있었던 힘은 68혁명의 영향으로 상대적 진보세력이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상대적 진보세력이 주류가 되고 집권하면서 독일 내 나치 세력이 버틸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지지·지원하는 자유한국당 같은 세력이 사라지고 한국 사회가 더욱 진보적으로 발전해야 일본 군국주의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오늘의 반일·반아베 운동은 단순히 우리 국익을 지키는 운동이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고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수호하는 숭고한 운동이다. 반일·반아베 운동을 더욱 확대, 발전시키며 동시에 자유한국당과 친일적폐세력을 청산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끊어내는 운동을 결합해 이 땅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 번영의 시대를 열어나가자. 

 

※이 글은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에 동시 게재됩니다. 


광고

트위터 페이스북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ㅋㅋㅋ 19/08/16 [04:02]
모든 모순의 근원이 양키고 모든 악의 근원이 양키다. 그런데 아직도 양키를 은인으로 아는 멍청이들이 너무 많다. 이들도 청산해야 이나라가 정화 될 것이다. (이런 멍청이들을 학살하자는 얘기는 아님. 자위당과 바르지 못한당. 우리공화당같은 쓰레기들은 반드시 죄를 묻고 법적 처벌을 해야 함.) 수정 삭제
uuuuu 19/08/16 [06:56]
전후처리가 독일과 일본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봐야합니다 애초 스탈린은 독일을 하나의 국가로 (진심으로 화나서 허벌판 농경국가로 만들어 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처리하려고 부던히도 노력했습니다 (동독과 소련 문서고를 살펴본 학자들은 스탈린이 동독 위성국을 창설하느 것이 아닌 통일된 비공산주의 독일을 건설하고 싶어했을거라고 확신들합니다 어쨌든 서방연합의 독일 분할점령음모가 실현화 되기 직전 스탈린은 체코슬로바키아관리들에게 서방 연합국이 독일과 음모를 꾸밀것이라고 말했고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독일을 관대하게 다룰것이라고 말한 문서가 있습니다 그해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영미가 독일을 해체하려고 계획하지만 자신은 반대하며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합쳐서 독일 통일당이 되라해 SED가 그렇게 창당됐습니다 그해에 처칠이 스탈린에게 미국이 독일점령에 참여할 의도가 없을거라고 거짓말하고 히로시마이후 영미가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서방연합들의 분할책동에 47년 스탈린은 SED에게 독일에 나치분자가 많냐고 물었고 나치협력자 제거 정책을 다른 정책으로 대체하라 조언했습니다 이런 제의는 독일 공산주의자와 SNAG 모두를 실망시켰지만 스탈린은 중앙집권화된 독일국가 구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연방화 및 탈중앙집권화를 해서 4개의 독일이 있기를 원하는 서방열강의 제안에 맞섰고 독일 분단에 대한 책임을 지고싶지 않아했습니다.유럽과 아시아의 국가들이 어떤식으로 연합을 맺더라도 소련안보에 도전하는 일을 생각할 수 없ㄷ록 자리잡는게 목표인 스탈린은 1945년에 중국을 미국의 피보호국으로 여겼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의 지배가 미국의 지배로 대체되는 것을 막을 팽창이 필요했고요 같은해 911런던회담에서 뜬금없이 번스가 프랑스와 중국을 독일 위성국들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 문제를 노의하는 자리에 초대할 것을 제안한 것에 몰로토프가 순진하게 동의해버린것에 스탈린이 대노하게 된거죠 독일일본전후처리에 2:1로 싸울것이 3:1로 싸우게 된겁니다) 그는 ww1에서 적백내전을 겪은 사람입니다 독일이 (이미 19세기에 러시아내에서는 프로테스탄 독일이 전쟁 일으킬거란 조짐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저지레 못하도록 말입니다 즉 러시아 앞마당이 좀 평온해 지길(그래서 푸틴은 우크라가 러시아 앞마당으로 영원히 되지 못하도혹 전략지정학을 남북으로 분산시켰습니다 노르드스트림2 투르크스트림) 그런데 기어코 서방은 연방을 즉 분할을 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반도가 연방통일이 되면 안됩니다 그건 서방의 술수입니다 ) ww2 서방의 전후처리 목표는 미국을 세계부국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카톨릭 프로테스탄 유대교들이 다 똑같음을 중세 모스크바국부터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터키와 캅카스전쟁 모두 나치와 전쟁과 같습니다) 스탈린의 나치 민족주의를 이용해 독일을 서방관할에서 벗어나게 하려던 계획이 서방에겐 위험이 돼 60년세대(소련용어, 반스탈린을 닦아놓은 흐루쇼프의 쿨한척 개방한 때즈음 )가 나왔고 그 세대중 고르비가 바로 독일을 미국단독점령으로 현재 만든 장본인입니다 폴란드는 어쨋거나 서방이고 미국편입니다 중세부터! 폴란드희생에 무릎꿇으면서 진정한 폴란드인들이 그 사과에 용서해 줄까요? 물론 영국선전에 나치협력자가 대다수인 폴란드 정치인들은 그렇겠죠 보라~ 소련이여~ 폴란드에 너네도 무릎을 꿇으라라고 하지만 현재 폴란드민심을 보세요! 폴란드 정치쟁이들 욕합니다! 그리고 독일은 홍콩혁명을 지지하며 덤프의 압박(나토군비)에 무릎을 꿇었지만 절대 소련에게 가한 침략에 대해선 일본처럼 굽니다!  시리아를 보세요! 푸틴은 아사드와 군사협정을 맺지 않았습니다 애초 시리아에 러시아가 간 것은 isis박멸이었습니다 현재 정부군과 반정부군이 싸우는데 어찌 러시아가 끼어듭니까? 어찌 한 정권과 군사협정을 맺습니까? 게다가 미군이 불법기지를 죽어도 안빼겠다고 하는데! 시리아 스스로 해결하라고 푸틴은 시리아를 지지합니다 제발 분단되지 말라고! 그런데 지금 서방과 미국이 하는짓을 보세요! 뉘르베르크재판에 관한 영화도 있고 연구서도 많습니다 하지만 도쿄재판에 관해선 찾기 쉽지 않습니다 위 본글에서 보는것처럼 알 만한 사람은 아는정도밖에 왜 그럴까요? 왜 대서양이 아니라 태평양에서 비핵화 목소리가 나올까요? UN군사회의에서는 아시아엔 뭐든 해도 상관않는다고 소련외무성이 핵만능주의자들의 기괴한 저지레짓거리들계획을 막자며 호소하며 피력한적이 있습니다 일본이 당나라에서 더 배울게 없다한후 임진왜란제하고 쇄국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중세근세로 넘어갈 즈음 서방이 통상을 요구해오자 선별해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의 대동아정책이나 서방의 태평양정책이나 같은거고 일본은 철저히 아시아인이 되길 진작에 포기했습니다 화이트국가에 우리가 제외됨으로써 더 뚜렷해졌네요 반일반미 좋습니다 하지만 영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노르웨이캐나사호주 등등 어찌 대서양연합에 대해선 그리도 관대하십니까? 적을 만들거나 대항하거나 60년세대와 같습니다 지금 푸틴이 리드하는 방식을 지지하는 저로선 제발 솔직해지자는 겁니다 월가를 건설한 네덜란드 비롯 EU서방이 미국에게 협박받는거나 우리 처지는 같습니다 같은 처지라서 서방에겐 반미반일처럼 못합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아무리 반일해봐야 일본이나 서방이나 지들도 못합니다 결정권이 없어요 하지만 남한과 북한이 공동으로 정식항의를 일본에게 하면 센세이셔널한겁니다 서방이 보길 원하는 한일월드컵할게 아니라요 서방사람들은 세뇌가 아주 잘 돼서 북한이 CIA정권이라고 믿는 자도 많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남한과 친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물론 국제정세를 잘 아는 서방친구들은 남한을 미국괴뢰국이라 알죠 자기들 국가처럼~ )그런데 남과 북이 적이 아니라 공동의 적이 있단 것을 알려야 한다는겁니다 그리고 남북정치인들말고 남북이 한민족이고 서로 원한다는 것을 러시아외에도 다들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역사국제정세를 모르는 대다수 서방인들은 우리 남북이 언어가 같은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북한과 통일되면 큰일난다고 생각하거나 북한이 미국경제로 들어오길 바라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물론 북한인민과 우리국민이 어우려져 저 소란 못피우죠 우선 통일대박외치든 평화통일외치든 아무튼 우리대통( 걔 아무나 하라해요 누구든 미대통처럼 그놈이 그놈이요 정책을 누가 대통이 짜나 풉]과 김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공동성명발표를 하는겁니다 무슨 베를린장벽을 쳐부셔가며 부상자사망자항의증오 그딴거 생산해낼 필요 없이 차근차근하잖겁니다 두 정상이 앉아서 일본에게 항의와 요구를 하는겁니다 제가 정말 용서 할 수가 없는 것은 덤프가 얼마를 요구하니 대통을 조롱했니 그딴게 아닙니다 그런 언론소스거리가 아니라 미대통이 남북이 원래 저래 싸웠다고 지들 언론을 다그치는 행위! 그것에 화가 납니다! 그래 , 미군 나가라고 백날천날 해봐요 미군은 안나갑니다 무슨 덤프가 말도 안되는 금액을 요구해서 우리 대통보고 미철군빌미를 주는 거라고 그딴 미앞잡이같으 노릇을 합니까?!덤프는 그 말도 안되는 금액이 실지로 필요한겁니다! 남북이 서로 원한다는 것을 남북정상이 일본을 빌미로 보여줘야합니다 그것을 우리 국민이 요구하자는 겁니다 광복절같은날! 그러면 우리국민 대다수가 한반도정책에 관한 미서방의 이중정책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갈거고 그 국민수준에 맞게 남북정상은 단계단계씩 가잖겁니다 어라 북위험이 없어졌네 그럼 중국이다 라고 미국이 저지레하면 또 남북정상이 중국에 함께가서 식사하고 오시면 됩니다 한반도에 위험이 그럼 러시아라고 하면 전승기념일날 함께 산책하시면 됩니다 울며겨자먹기로 일본을 한반도위험이라고 미국이 빼액하면 남북러중이 무시하면 됩니다 미국이 가미카제로 일본ㅇ르 응징한다고 하면 다함께 하지마라고 빼액하면 됩니다 일본시민들은 일본정부에 대항할겁니다 항일기때처럼 왕에게 대든 일본인들부활 할겁니다 지금은 남북이 우리 민족끼리 많이 만나 세계에 어필해야합니다 전세계 영미나토가 저지레한 분쟁지역은 셀수 없이 많아요! 전쟁하고 싶은 쪽은 미국입니다 그들은 영구전쟁을 원합니다 승리따윈 별 관심없습니다 세계경제통합만이 관심있습니다 북한은 절대 선제공격 안핡겁니다 그것은 미국에게 축복을 내리는것입니다 북미회담이 성사되려면 남북이 한목소리를 내야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마이너스를 내니 즉 2:1상황을 만드니 빠지라는겁니다 앞으로 미국하고만 대화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덤프를 믿어서가 아니라 미국을 해방자로 맞아 들이겠다가 아니라요! 미군주둔하건 철군하건 아대로는 북한이 지금껏 수호한 숭고함이 꽁중분해될게 뻔합니다 북한의 앞마당이 우리가 되는것에 고마워할 날이 있을겁니다 그렇게 땅치고 후회하는 날이 오면 북한은 그래도 우리 민족이라고 언제든 환영할 한핏줄입니다 그것을 앞당겨서 알자는 겁니다! 세대가 거쳐가면 저렇게 60세대라는 기형이 나오고 혼란과 역사왜곡은 끊임없습니다 제발 새시대(일본의 갑작스런 종전이 우리에게만 비극을 안겨준 것이 아닙니다 캅카스이란터키 역시 그랬습니다 지금 그 지역은 협의가 한창입니다 지역안정과 세계평화에 기여하기위해 엄청난 협상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가 온 것을 아세요 수정 삭제
dma 19/08/16 [09:46]
도길 나치놈들이 뭔 처벌을 하냐 그래서 멩겔레같은 악질은 남미로 튀어서 잘먹고 잘살다가 뒈졌나 수정 삭제
uuuuu 19/08/16 [21:30]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못했네요 우리 대통령(그 누가 세워졌든)이 일본에게 항의하려면 남한전유물인냥 쇼하지 말도록 국민이 우리 대통령에게 김위원장과 만나 함께 일본에게 한 목소리를 내달라고 요구하자는게 요지였고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기형적 60년대세대처럼 전국 온거리에 어린 학생들이 나와서 배우는것은 그저 '반대한다"라는 시위를 배울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린 세대들이 앞으로 우리민족의 미래입니다 그들이 지금 시위하면서 북한의 남한에 대한 비판과 미사일시험에 너네는 이럴때 좀 자중해달라는 식입니다 어찌그럽니까?! 진작 항일기와 광복하루지나 우리나라에서는 친일숭미만 남았습니다 !!!!!!!!!!!!!!!! 지금 그들이 누구에게 반대한다는겁니까? 정말이지 헷갈립니다 그 어린 학생들이 북한을 제외하고 그저 항의합니다 이땅이 어떤 땅인줄도 모르고!!!!!!!!!!!!!!!그저 구호만 ! 뉘른베르크와 도쿄재판이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소협정 맺을때 소련에 편입되는것을 환호했었습니다 대기근의 서사적선전을 서방이 유익하게 퍼뜨리면서 그들은 반대로 나치를 해방자로 맞이했었습니다 폴란드 나치당들은 땅을 소련승전덕에 얻고도 유대인마냥 소련에게 피해의식을 구걸합니다 대외적으로 선전하기위해서~ 북한은 이런 서방의 선전인 가뭄기근인권등등의 선전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문통이 말하는 '외세'란 누굴 말하는건지 콕집어 그 어린 학생들에게 말하세요! 곱지 않게 들립니다 그 외세란게 누굽니까?! 한반도의 외세라면 명확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외세라면 한반도의 외세라는것들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잖습니까? 심부름하고 앵무새짓을 해왔으면서 도대체 그 외세에 흔들리지 않겠다라는 말이 뭔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겁니까?! 서방연합국을 해방자로 그리고 피로 맺은 동맹이라고 한국전을 선전하더니 그럼 그 외세란게 북한입니까?! 누구에게 흔들리지 않겠다는겁니까?! 2045? 덤프가 핵첨단화무장 시한을 둔 시기입니다 그전에 핵이란건 쓸모없게 됩니다 즉 석달후면요~ 문통은 외세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한다면 한민족과 함께 하세요 함께 하지 못한다면 여기는 북한의 외세일뿐입니다 그저 구호를 외치는것이라면 금융놀이하는 덤프와 같은 쇼쟁이구만요 그것이 둘이 생각한 창조적정책입니까? 친서 구호 ?우리 어린 학생들이 즉 또 다른 기형의 60년세대가 되어 한반도를 다 잡수시라고 훈련시키는 겁니까? 서방의 폭력적이고 요란한 과격함을 배워니 이뻐보이고 든든하시겠습다! 푸틴은 자기 스승을 만나는것을 러시아학생들이 보도록 합니다 반미대열이 아님을 누누히 푸틴이 말합니다 독일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스탈린이 서방의 이중정책에 소련이 모든것을 잃어버릴 수 있고 모든 희생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에 무리하게 전략적 곡물 금매각금지 등등 퇴역군인들의 실망에도 전체주의를 밀어붙힐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위원장이 선대의 뜻을 기치로 세운것이 비정상같다고요? 그들은 그것이 이 시대에 전략입니다 그리고 서방보다 우리의 앞선 문명의식은 한반도가 하나될때 다시 살아날겁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서방의 종교식 거리행진이나 용병따윈 우리 역사와 기질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대통이 올바르지 않으면 국민이 깨우쳐 줘야 합니다 울 대통이 외세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구호를 외쳤는데 국민은 일본과 미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국민은 북한과 함께 하자고 안합니다 되려 자중하라고 합니다 더 기막힌 것은 그 외세란게 우리의 구호에 평온하다는 겁니다 북한이 보기에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 허망한 외침에~ 독도는 우리땅이라는데 그 외세가 러시아침공기지로 써먹던 곳을 연합훈련을 하면서 우리땅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왜 북한과 함께 독도순회라도 다녀오세요~ 아! 외세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하셨지요 우리대한미국 수정 삭제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사랑방
최근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