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통일문화 만들어가며](11) 남과 북, 러시아와 중국의 애국가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0/02/28 [03:09]  최종편집: ⓒ 자주시보
 
《러시아의 첫 대통령》 옐친의 딸이 최근에 총리 푸틴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옐친이 푸틴을 후계자로 정할 때 푸틴이 굉장히 긴장했다느니, 푸틴이 소련 국가의 선율을 다시 쓰는 바람에 옐친이 불안해했다느니 등등 내용이 있었다. 그녀가 이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려는 게 아닌가는 관측을 낳았는데, 아무튼 옐친이나 그 딸은 소련에서 나서 자랐으면서도 소련국가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가진 모양이다.
 
워낙 소련은 19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인터내쇼날(국제가)》을 국가로 삼다가 건국한지 20여 년이 지난 1944년에야 새로 국가를 만들었다. 세르게이 블라지미르 미하일코프(михалков,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1913~2009)와 엘 레키스탄이 합작한 처음의 가사에는 스탈린을 노래하는 내용이 있었다 하여 1956년 흐루스쵸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일부 가사가 폐기되었고, 1977년에 미하일코프가 가사를 고쳐 썼으며 그 《소련송》이 크게 퍼졌다.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된 다음 러시아는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글린카 미하일 이와노비츠(1804~1857)의 《애국가(러시아어 제목 патриотическая песня, 프랑스어 제목 motif de chant national)》를 국가로 삼았는데 원래 가사가 없는 피아노곡이었다. 1999년에 새로 가사를 붙였으나 곧 옐친이 내려가고 푸틴이 올라온 뒤 2000년 12월에 국가두마(하원)에서 소련국가의 선율을 다시 쓰기로 결정했다. 가사응모에서 150수 후보가 나왔는데 결국 원 작사자인 미하일코프의 새 가사가 당선되어 2001년 1월 1일부터 정식 사용한 국가의 제목은 《러시아, 우리의 신성한 조국》이다.
 
이렇게 복잡한 변화과정을 거쳤으므로 어떤 중국인들이 《제일 듣기 좋은 국가》라고 평하는 그 노래가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랑을 받거나 미움을 산다. 소련시대를 연상시키는 선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러시아는 국가를 연주할 때 반드시 기립해야 한다는 법조항을 제정했다. 알렉산다 알렉산다로프가 지은 그 곡은 1933년에 나왔는바, 처음에는 전연맹공산당(볼쉐비크)의 당가였다. 미하일코프가 세 번이나 맞춘 국가 가사가 모두 뭇사람의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곡의 진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가사로 잘 살려주었음을 말해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는 소련- 러시아만큼 복잡하지는 않으나 역시 곡절을 겪었다. 1949년에 나라가 서면서 14년 전에 항일투쟁을 격려하기 위해 나온 영화 《풍운의 아들딸(風雲兒女)》 주제가 《의용군행진곡》을 대용국가로 삼았는데, 《중화민족이 가장 위험한 때에 이르렀다(中華民族到了最危險的時候)》는 구절이 있는 원래 가사를 그대로 쓰느냐 마느냐 하는 쟁론이 있었고,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작사자가 변절자로 몰리는 바람에 곡만 연주했다.
 
1978년에 선율에 맞추어 《중화인민공화국국가》가사를 새로 만들어 공포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덩샤오핑을 대표로 하는 정치세력이 마오쩌둥의 노선을  뒤집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만중일심으로 마오쩌둥의 기치를 높이 들고(我們萬眾一心, 高舉毛澤東旗幟)》라는 대목이 있는 그 가사를 폐지해버리고 원래 가사를 회복했다. 1982년의 일이다. 그때는 작사자도 명예를 회복한지 오랬다. 또 20여 년이 지나 2004년에는 헌법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는 <의용군행진곡>이다》라는 조항이 제정됐다. 곡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좌파들은 지금도 1978년도판본 국가를 좋아한다. 하기에 누가 부르는 국가의 가사만 들어도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판단할 수 있다.
 
《의용군행진곡》은 사람들을 항전으로 불러일으키려고 만든 노래라 곡조가 당연히 아주 격앙되었다. 한국 여행가 한비야(1958~)씨가 베이징에서 1년동안 중국어를 배우던 경력을 엮은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몇 해전에 보았는데 체육대회에서 중국선수가 우승하여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올라가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나올 때, 젊은 한족 여자(식모 쯤 되었던가?)가 눈물이 글썽해지기에 이상하게 여겼다는 대목이 있었다. 한국 《애국가》 같은 유순한 선율이면 몰라도 왜 그렇게 쿵당거리는 곡에 눈물이 나오느냐 했던가? 지금 구체적인 말구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대목을 볼 때 은근히 실망했던 느낌은 생생하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면 몰라도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바람의 딸》로 불린다는 사람이 남의 나라 국민의 심정을 그렇게도 모르다니?
 
국가의 선율이 어떠하든 길이가 어떠하든 가사가 어떠하든 국민들은 어릴 적부터 늘 듣기 마련이고 또 항상 애국심과 직결된 교육을 받는다. 자라나면서 개인의 여러 가지 경력과도 한 덩이로 엉키어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국가에 대한 국민의 애착과 감동은 필연적이다.
 
만약 무엇이든지 반도 남반부의 것만을 잣대로 삼아 다른 나라들을 잰다면 세상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아마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으리라. 반도 북반부의 국가이름이 《애국가》인데 그것도 짝퉁이나 개념표절로 보이지 않을까?
 
《애국가》, 이름 그대로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는 그 누가 독점할 수 없는 개념으로서 20세기 초반의 중국에도 교과서에 량치차우(梁啟超, 1873~1929)가 지은 노래가 실렸다. 그리고 반도에서만 해도 그 제목을 가진 가사들이 꽤나 많았음을 전제로 삼아야 반도에 존재하는 두 가지 《애국가》를 공정하게 살펴볼 수 있고, 또 장차 어떤 《애국가》가 생겨날지 예상할 수도 있겠다.
 
우선 작사자 미상(윤치호설, 안창호설, 김인식설, 최병헌설, 민영환설, 윤치호-최병헌 합작설 등)인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수많은 같은 제목이나 비슷한 주제의 가사들 가운데서 세월의 검증을 거쳤고 뭇사람의 인정을 받았음을 집고 넘어가야겠다. 말하자면 20세기 초중엽 반일독립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의 심리에 맞았고 따라서 널리 퍼진 것이다.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사인(auld lang syne, 지금 중국에서는 《우의는 길이길이(友誼地久天長)》로 옮긴다)》를 썼으나 지적재산권을 별로 따지지 않던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는 문제로 되지 않았다. 그 곡에 일본인들이 《호다루노 히까리 마도노 유끼(반딧불 빛, 창문의 눈, 어렵사리 공부를 한다는 내용)~》라는 가사를 붙였고 조선사람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가 붙였다 해서 무슨 권 침범이 운운되지도 않았다.
 
단 광복 뒤에 변화된 시대환경에서 다시 살펴보다나니 외국곡이 껄끄러워졌고 따라서 반도의 북반부에서는 곡과 가사를 새로 지은 《애국가》가 나왔고 남반부에서는 곡을 바꾼 《애국가》가 나왔다.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나이 좀 많은 사람들은 광복 전과 후에 스코틀랜드 곡에 따른 《애국가》를 부른 경험이 있는바, 곡이 바뀐 《애국가》는 반도 남쪽과의 교류가 많아진 1980년대 후반부터 차차 알려졌다. 안익태(1905~1965) 작곡으로 된 《애국가》는 광복 전에 중국에서 알려지지 않았고(적어도 동북에서는), 또 분위기가 어딘가 스코틀랜드 곡과 비슷한 점이 있어,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조선족과 한국인들 사이에 한국 국가가 외국곡을 쓴다느니 아니라느니 따위의 쟁론이 벌어지곤 했다.
 
역사자료사진들에서 알 수 있다시피 광복 초기에는 북반부에서 대형기념활동을 할 때 태극기를 걸었고, 또 옛 《애국가》를 합창했다 한다. 허나 여러 모로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광복 직후의 북반부 상황을 상상하면서 아래 가사를 음미해보자.
 
애국가
 
1.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 단심일세

 
4.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1948년에 남반부에서 국가로 정할 때 특정 종교를 연상할 수 있다고 하여 원래 나오던 《하나님》을 하늘을 의미하는 《하느님》으로 바꾸었던 것을 생각하면 북반부의 불교도나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부르기 어디 쉬웠겠는가?
 
결과 북조선 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의 제의로 《애국가》를 새로 짓기로 했다 한다. 《김일성 저작집》 2권에는 1946년 9월 27일에 작가들과 한 담화 《애국가와 인민군행진곡을 창작할데 대하여》가 실렸다. 이런 대목들이 있다.
 
《지금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땅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된 기쁨과 감격을 목청껏 노래하고싶어하며 애국가를 요구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당의 령도밑에 새생활을 창조하기 시작한 우리 인민의 마땅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인민들의 이처림 절절한 심정과 요구를 충족시켜줄 애국가가 아직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인민들은 옛날에 부르던 낡은 노래를 그냥 부르고있습니다. 이 노래는 가사내용이 우리 인민의 감정에 맞지 않을뿐아니라 보수적이며 곡도 남의 나라것을 따다 만든것인데 그 곡 자체가 시원치 않습니다. 이 노래를 가지고는 새 민주조국 건설에 일떠선 우리 인민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애국가를 창작하여야 하겠습니다. 애국가창작에는 모든 작가들과 작곡가들이 참가하여야 하며 작가나 작곡가가 아니라도 창작하고싶은 사람은 누구나 다 참가하도록 하여야 할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국과 슬기로운 투쟁전통을 가진 조선인민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노래에 담아야 합니다. 인민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면 자기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더욱 솟아날것입니다. 인민들에게 하루빨리 이런 내용을 담아 애국가를 만들어주어야 하겠습니다. 나라의 주인이 된 우리 인민에게 당당한 우리 조국의 노래, 국가를 주어야 할것입니다.

애국가는 새 조국 창건에 일떠선 우리 인민들을 우리 당과 인민정권의 두리에 단결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할것이며 그들을 보다 큰 투쟁과 승리에로 불러일으킬것입니다.》
 
1947년에 2수가 최종심사에 들어갔고 조선의 자료에 의하면 김일성 위원장은 세 가지를 결정했다 한다.
 
하나는 2수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고 다른 하나도 노래가 좋으니 제목만 바꾸어 공개하라는 것.
하나는 선정된 《애국가》에서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부터 마지막까지 한 번 더 부르라는 것.
하나는 남북 현황에서 공개하면 남에서 북이 분열을 한다고 할 수 있니 공개를 뒤로 미루라는 것. 결국 1948년 9월에 정부수립과 더불어 정식 공개되었다.
 
현재 자료들에 근거해 분석해보면 낙선된 작품은 박세영(1902. 7. 7 ~ 1989. 2. 28) 작사, 리면상(1908. 4. 8 ~ 1989. 6. 25) 작곡으로 된 《빛나는 조국》이다.
 
빛나는 조국
 
1. 반만년 오랜 력사 문화도 빛나고
   수령님 혁명정신 하늘땅에 넘친다
   창조와 로력으로 피끓는 인민들아
   찬란한 인민조국 길이길이 받드세
   조선아 조선아 영원무궁 만만세.

 
2. 삼천리 금수강산 자원도 넘치고
   건설로 붙타는 뜻 온 세상에 떨친다
   자유와 행복으로 나래편 인민들아
   부강한 민주조선 길이길이 빛내세
   조선아 조선아 영원무궁 만만세

 
여기서 두 번째 줄의 《수령님 혁명정신》은 뒷날 고쳐졌으리라고 보인다. 당선된 작품의 작사자는 역시 박세영이고 작곡자는 김원균(1917. 1. 2 ~ 2002. 4. 5)이다.
 
애국가

1.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력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2. 백두산기상을 다 안고
   근로의 정신은 깃들어
   진리로 뭉쳐 진 억센 뜻
   온 세계 앞서 나가리
   솟는 힘 노도도 내밀어
   인민의 뜻으로 선 나라
   한없이 부강하는 이 조선
   길이 빛내세

   솟는 힘 노도도 내밀어
   인민의 뜻으로 선나라
   한없이 부강하는 이 조선
   길이 빛내세

 
1947년 당시 리면상은 20년 정도 창작활동을 해온 중견작곡가였고 김원균은 전해에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기타를 치면서 음악을 배우던 노동청년이었다. 그러나 신인의 작품이 당선된 것이다. 《빛나는 조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명곡이라고 찬양했다는데, 김일성 위원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노래가 좋으나 국가로서는 무게가 조금 부족하다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그리고 가사를 살펴볼 때 같은 시인의 작품이지만 현재의 《애국가》 가사가 낫다고 필자는 여긴다.
 
《아침은 빛나라》는 하늘을 보여준다.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은 땅을 보여준다.
《반만년 오랜 역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인민》은 사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1절에서 《천, 지, 인》을 몰밀어 보여주는 바, 민족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문화사상의 정수를 뭉쳐주었다.
2절에서는 완전히 인간을 틀어쥐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그려주었다.
그리고 어떤 주의나 신앙과 상관없는 점이 특별히 돋보인다. 즉 국민이기만 하면 무슨 심리적인 부담을 갖지 않고 부를 수 있다. 이런 가사의 탄생은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새 나라를 세우자던 시대분위기와 갈라 놓을 수 없다.
 
왜정시기에 민족적인 반일작품들을 쓰면서 고생을 많이 했던 박세영은 민족과 나라, 인간에 대한 마음껏 털어놓지 못하던 사랑을 고도로 함축된 시어에 담았고, 노동청년으로서 새로운 음악을 만들려고 애쓰던 김원균은 시대적인 감정을 선율로 그려냈다. 조선에서는 《애국가》를 거들 때 《장중한 선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하는데, 정확한 표현이다. 2007년에 새로 편곡하여 세상에 공개하면서 중국에서는 곡이 바뀌었다는 식으로 오역, 와전 되었으나, 사실 평양음악대학이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김원균의 음악사적 지위는 확고하다.
 
반도의 남쪽을 보면 작사자는 명확하지 않고 작곡자는 안익태가 분명하지만 그 역사적 지위는 조금 위태롭다. 2009년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이 들어갔다 하여 보수우익단체들이 《안익태가 어떻게 친일파이냐》고 항의시위를 했다는데, 몇 가지 기본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괴뢰 《만주국》의 무슨 행사에서 지휘했다, 일본의 무슨 대형 기념활동에서 지휘했다는 외에 안익태의 친일행위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다. 즉 특별히 눈에 띄일 친일명인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반일운동가는 아니었고 오히려 히틀러의 도이췰란드와 프랑코의 스페인에서 수십 년 활동했고 무서운 독재자들의 치하에서 잘 살았다.
 
그가 1935년에 곡을 만들었다지만 광복 전에는 사실 우리 민족사회에서 크게 퍼지지 못했고 영향력도 작았으며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으로부터 국가의 지위를 가졌다.
이승만에 대한 반감과 작사자의 미상, 작곡자 행적의 석연치 않은 점들이 복합되어 남쪽의 《애국가》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어느 네티즌은 한토마 토론방에서 2000여년 전 중국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공신들을 책봉하면서 한 맹세를 거들면서 비슷한 점을 지적했다.
 
《황하가 띠 같아지고 태산이 숫돌 같이 되도록 나라를 길이 보존하여 이에 후손에게 미치게 하소서(黃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存 爰及苗裔)》
 
《그런데 이 글귀가 우리나라 애국가 가사 1절과 너무나 흡사하여 애국가 가사가 표절이 아닌가하고 느낀다면 지나친 기우(杞憂)일까요? 만약 많은 사람들이 표절이라고 느낀다면 애국가 가사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네티즌들이 자기의 생각을 밝혔는데, 사실 시가의 역사를 보면 발상이 비슷한 건 큰 문제로 되지 않는다. 비슷한 발상이라도 개성적으로 그려주면 된다. 또 발상의 뿌리를 보면 오히려 남이장군의 《백두산석마도진》이 더 가깝지 않겠나 싶다.
 
반도의 남북에 현존하는 《애국가》들에 대해 이와 같이 고찰해보았다. 그러면 이후에는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
 
그 무슨 《비상통치계획-부흥》을 제정한 사람들과 지지자들은 물론 《동해물과 백두산이~》가 반도전체에서 불리기를 바랄 테고, 어떤 사태가 일어나 급진통일이 이뤄지기를 내다보는 사람들은 《아침은 빛나라~》가 제주도까지 포함하여 불리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점진적 통일로 나아가 연방제든 방련제든 낮은 단계 통일부터 형성된다면 국가를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국제행사에서 자꾸만 민요 《아리랑》을 울릴 수는 없지 않은가?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들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영향을 끼친 노래를 국가로 제정하거나 새로 국가를 지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공정하게 평가하면 마음 먹고 지은 국가들의 수준과 무게가 전통적으로 내려온 노래들보다 낫다. 이런 의미에서 낮은 단계 통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반도 최대다수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국가가 나와야 격에 어울린다. 아마 그 감격을 직접 겪는 사람들만이 당당한 자격이 있고 또 훌륭히 써내지 않을까?(2010년 2월 27일)

첨부자료 3종:
 
01: 박세영(1902. 7. 7 ~ 1989. 2. 28)
 
1902년 7월 7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두모리의 수공업가정에서 출생.
1922년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후 중국 상해에 가서 혜령영문전문학교에 다니다가 중퇴, 천진에서 《화북명성보》교열원으로 일함.
1924년에 귀국, 문학단체인 《염군사》의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조선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카프)에 가맹하여 프로레타리아시인으로 활동.
1925년 처녀작 시 《해변의 처녀》(1925년)를 발표한 뒤, 《타작》(1928년), 《야습》(1930년), 《산제비》(1936년)등 시들을 창작.
1926년부터 프로레타리아 아동잡지 《별나라》의 편집을 맡아하면서 동시극 《소병정》(1929), 동요 《풀을 베다가》(1928년)를 비롯한 아동문학작품들을 내놓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잡지가 폐간되고 진보적문학창작을 할 수 없게 되니 1935년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 중학교에서 사무원으로 일함.


1946년 6월 월북,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으로 사업하면서 《애국가》(1947년), 《빛나는 조국》(1947년), 《승리의 5월》(1947년)등 가사를 창작.
1950~1953년 전쟁시기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시들을 창작.
전후 대표작으로는 천리마운동을 노래한 가사 《우리는 천리마 타고 달린다》(1958년)과 항일무장투쟁을 그린 서사시《밀림의 력사》(1962년) 등이 있음.
작품집으로는 시집 《산제비》(1937년), 《승리의 나팔》(1953년), 《박세영시선집》(1956년), 《박세영동시선집》(1962년)등이 있음.


02: 김원균(1917. 1. 2 ~2002. 4. 5)
 
1917년 1월 2일 강원도 원산시 상동의 빈농가정에서 출생.
원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학비를 내기 어려워 3학년에서 중퇴하고 노동생활.
광복 직후 《조선행진곡》(1945년)을 작사, 작곡하고, 이듬해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곡.
1947년 《애국가》(1947년)를 창작.
1952~1959년, 소련에서 음악공부를 하면서 교향시 《향토》를 비롯한 기악작품들과 성악작품들을 창작발표.
귀국 후 국립예술극장 작곡가,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장,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피바다가극단 총장 겸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비상임), 국제음악리사회 명예위원, 조선민족음악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


가곡 대표작으로는 《투쟁가》(1946년), 《민주청년행진곡》(1947년), 《강철의 대오는 전진한다》(1950년), 《우리의 최고사령관》(1951년), 《빛나라 청봉숙영지》(1960년), 《원쑤의 가슴팍에 불을 지르자》(1964년), 《영광 빛나라 조선로동당》(1980년), 동요 《아버지원수님께 영광드려요》(1966년) 등이 있고, 1970년대에 《피바다》식 혁명가극 창조사업에 참여.
《김일성상》계관인(1972년), 로력영웅(1986년), 인민예술가(1972년).


03: 리면상 (1908. 4. 8 ~ 1989. 6. 25)
 
1908년 4월 8일 함경남도 함주군 빈농의 가정에서 출생.
15살 때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비를 내기 어려워 퇴학, 식산은행 함흥지점에서 급사생활.
1923~1925년 함흥사범학교 특설과에서 음악공부.
졸업후 원산제2보통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풍금과 바이올린공부, 민요를 채보하고 연구, 20여편의 동요를 묶은 작곡집을 출판. 광주학생사건에 관계되어 해직당함.
1930년 4월에 일본으로 가서 고학으로 음악공부.
1933년 서울에 와서 빅타축음기회사에 취직하여 《울산타령》》, 《뻐꾹새》등 많은 신민요들과 서정가요들을 창작발표. 당시 사용한 필명으로는 리운정 등.
1945년 10월부터 함경남도 음악건설동맹 위원장.
1946년 3월부터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후에는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89년 6월 25일 평양에서 사망.

 
광복 후 대표작들로는 가요《소년단행진곡》(1946년), 《빛나는 조국》(1947년), 《승리의 5월》(1947년), 《산으로 바다로 가자》(1948년), 《문경고개》(1950년), 《압록강2천리》(1952년), 《내고향의 정든집》(1952년), 《우리는 승리했네》(1953년), 《눈이 내린다》(1965년) 등.
정치방면에서는 1948년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1971년 11월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사업.
《김일성상》계관인(1972년), 인민예술가(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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