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부터 오늘까지 자주민보 자문변호사로 돈 한 푼 받지 않고 언제든 기사에 대한 국보법 위반 소지가 있는지 자문을 구하면 늘 성의껏 상의해주고 자주민보 기자들이 구속되었을 때도 제일 먼저 구치소, 국정원으로 달려와 힘을 주던 김승교 변호사.
인권변호사로 수없이 많은 민중들과 통일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변론을 해 오면서도 몸소 공안기관과 보수세력에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상임공동대표, 통합진보당 최고위원으로 통일운동, 진보운동을 정열적으로 개척해온 김승교 변호사가 너무도 일찍이 미흔 여덟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비통함으로 몸부림치던 9월 1일 강남세브란스 병원 3층 대강당에서는 500여명의 추모객이 운집하여 김승교열사 추모식을 엄숙히 거행하였다.
추모곡을 부르러 나온 가수도, 추모시를 낭송하던 시인도. 추모사를 하러 나온 후배들도 동료 변호사, 대학교 친구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추모객들 속에서도 대성통곡 소리가 터져나왔다.
마흔여덟 너무 이른 나이가 서러워서만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어린 아들과 여고생 딸과 부모 형제와 아내에게는 늘 시간을 내지 못하면서도 동지들을 위해서는, 가진 것 다 털어주고도 더 주지 못해 늘 안타까워하던 그 따뜻한 미소 때문이었다. 과로를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간질환 환자였던 김승교 열사는 집에 들어오면 늘 파김치가 되어쓰러지면서도 돈 없는 대학생 국가보안법 피해자들, 노동자 농민 등 억울한 의뢰인들의 하소연, 조직에서 제기된 과업 앞에서 바보같이 시간이 없어서, 몸이 안 좋아서 못하겠다는 말을 꺼낼 줄 몰랐다는 사실을 김승교 열사가 눈을 감고서야 알게 된 동지들의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었다. 인두로 앙가슴부터 목울대까지 지지고 올라오는 것 같은 뭔가 그 뜨거운 것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어 토해낸 통곡이었다.
그 눈물, 그 통곡은 그래서 또한 다짐의 눈물이기도 했다.
김승교 열사가 그렇게 강조했던 무명전사정신! 누가 알아주건 말건 이름 내세우지 않고 가장 어려운 일을 맡아 몸을 던지자는 무명전사정신! 그 스스로 무명전사정신으로 무장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을 조직화해내기 위해 아글타글 노력했던 그 실천정신! 그런 정신을 체현한 소중한 청년들을 한없이 귀중히 아끼고 사랑했던 그 후배사랑, 동지사랑정신을 이어받아 민중이 주인이 된 세상, 강성부흥할 자주통일조국을 반드시 건설하겠다는 결의를 뜨거운 눈물로 다지고 또 다진 추모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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