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임선희 동지가 새겨주고 간 따뜻한 동지애

이창기 기자 | 기사입력 2017/07/26 [04:58]

고 임선희 동지가 새겨주고 간 따뜻한 동지애

이창기 기자 | 입력 : 2017/07/26 [04:58]
▲ 임선희 동지의 영정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임선희 동지가 페이스북에 올린 마지막 글과 사진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계승 발전시키며 세계적인 모범을 창출해온 한국의 청년학생 운동은 96년 연대항쟁 이후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친미사대매국언론들은 연일 한총련을 폭력세력으로 매도하였고 김대중 대통령 후보까지도 연세대 인문관을 방문하며 한총련을 비판할 정도였으니 국회의원 뺏지나 달아보려고 했던 소위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겨끔내기로 텔레비전에 나오면 ‘아직도 반미구호나 외치는 한총련’이라며 비판하기 일쑤였다. 

 

전대협 시절처럼 세상 사람들이 의로운 일을 한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외롭고 힘든 그 엄혹한 상황에서도 수배와 구속을 각오하고 끝까지 한총련의 깃발을 놓지 않고 청년학생운동을 전개해온 애국청년들이 있었으니 그들이야 말로 찬서리 설한풍 몰아치는 광야에서도 푸르름 잃지 않는 소나무였고 꺾이면 꺾일지언정 구불구불 자라기를 거부하는 대나무였다. 

민족의 자주권을 유린하는 외세, 분단찌꺼기를 먹고사는 사대매국세력과 타협할 수 없었던 참된 민족의 아들 딸, 역사가 기억할 자랑스런 청년들이었다.

 

얼마 전 그런 애국헌신의 길에 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쏟아부었던 한 여성이 꿈에도 그리던 자주통일조국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불의의 사고로 영면에 길에 들었다.

 

▲ 임선희 동지가 가장 뜨깊게 추억했던 '6,15공동선언관철과 민족의 미래를 위한 북,남,해외 청년학생통일대회' 공연  

 

임선희 동지!

 

“학생운동을 빡세게 10년 했다. 

새내기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엔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라는 청년학생 조직에서 4년간 일했다. 정책위, 조직위, 투쟁국.. 

임선희 동지는 문화국에서 일했다. 4년간 같이 활동했으니 많은 일을 함께 했다. 그 시절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집이 없었다. 대부분 수배 혹은 내사 상태여서 학교에서 잠을 잤다. 잠도 먹는 것도 늘 부실했다. 빡센 투쟁에, 회의에, 정치사업에...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과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난 자신이 없다. 

활동가들 중에서 특히나 헌신적인 친구들이 있다. 자신의 안위 따윈 정말 신경 쓰지 않고 요즘 세상엔 손발 오그라드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민중을 위한 삶 속에서 보람과 기쁨을 찾고 그게 전부인 친구들이 있었다. 임선희 동지가 그런 친구였다. 

착한 성격에 어울리는 선한 웃음이 정말 멋진 친구였다. 

노래도 잘하고 문화국이라 집회 때면 엠프도 번쩍 번쩍 들어 옮겼다.“-김홍모

 

임선희 동지는 92년 애국한양 사범대에 입학하여 사범대 풍물패 ‘한솔이’에서 민족문화를 배우고 미제국주의자들이 해방 전후 어떻게 조국을 분단하였으며, 태평양 패권을 지키는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한반도를 어떻게 강점해왔는지 깨닫게 되어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개척하는 길에 대학시절을 오롯이 다 바쳤다.

 

연대항쟁 직후 엄혹했던 97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한총련 산하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문화국에서 일했으며 그 이후에도 가극단 미래를 창단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작품으로 어렵고 힘든 문화운동의 길을 열성적으로 걸었고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와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에서 자주통일운동을 줄기차게 벌려왔던 임선희 동지가 마흔다섯살을 일기로 가슴아프게도 영면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투쟁도 많고 행사도 많은 서총련 문화국원으로 후배들의 공연을 위해 앰프를 설치하고 돌돌이로 전선줄을 펴감는 굳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늘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동분서주 뛰어다녔던 임선희 동지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미제침략사를 그대로 형상화한 민요 ‘유언’이었다. 

그리고 임선희 동지가 가장 행복하게 추억했던 공연이 2002년 금강산에서 진행했던 ‘6.15공동선언관철과 민족의 미래를 위한 북,남,해외 청년학생통일대회’ 공연이었다.

임선희 동지는 이렇게 음악과 극으로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앞당기기에 청춘을 바친 문예전사였다.

 

“언니가 98년 서총문화국장을 할 때 나는 대구경북지역총학생회연합 문화국장을 했는데 서총련에 행사가 얼마나 많았어요. 앰프를 들어나르고 돌돌이로 전선 줄 말고 행사 준비하느라 그렇게 힘들고 바쁘게 살면서도 언니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어요. 그래서 ‘문화국장은 원래 저래야 하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언니는 정말 긴 세월 함께 일했는데 후배들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후배들이 서툰 솜씨로 소박한 공연을 올려도 그렇게 예뻐해주고 내가 결혼한 후에도 늘 먼저 전화해서 ‘뭐 하냐, 어디냐, 그러냐~’하고 고민은 없는지 물어주었습니다. 김승교 변호사님도 그렇고 왜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먼저 가는지...”-현순애

 

이렇듯 자신들 드러내지 않고 조국을 위해 동지들을 위해 끝없이 헌신하던 임선희 동지였다.

 

▲ 무대에 섰을 때 가장 행복해 했던 임선희 동지, 하지만 임선희 동지가 청년학생운동에 헌신할 때는 후배들을 무대에 세워주기 위해 실무일을 도맡아 했을 뿐 무대위 거의 서지 못했다.     ©

 

“임선희 선배는 학교 풍물패 선배였어요. 만나면 늘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 언제 술 한잔 하자’라고 따뜻이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약속한 날 장소에 나갔는데 언니가 5천원을 주며 자신은 밥을 먹었다고 바쁜 일이 생겨 같이 먹지 못해 미안하다며 건강하게 활동 잘하라고 다독여주고 총총히 자리를 떴는데 아마 수중에 용돈이 5천원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언니가 혼자 먼저 밥을 먹었을 리가 없거든요....”-이지선 한양대 후배

 

“선배는 항상 웃는 얼굴로 찡그린 적이 없어서 우리가 은하철도 999의 철이라고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청년학생 시절이나 사회활동 할 때나 후배들을 지극히 아껴주었습니다. 제가 사회에 나와서 민권연대 활동을 하고 있을 때도 늘 먼저 전화를 해서 ‘어떻게 지내냐’ 물어주었습니다. 언젠가는 ‘혹시 데이터 남는게 있냐’고 여쭈었더니 남는다며 나에게 다 보내주었습니다. 그 뒤 얼마 후 선배가 다시 전화해 와 필요하면 데이터를 또 보내주겠다고 말하더군요.”-김복기 한양대 후배

 

▲ 장례식장으로 임선희 동지를 추모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이렇듯 동지애가 뜨거운 임선희 동지였기에 그와의 이별에 사람들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진행한 추모식은 받기만 하고 선배에게 해준 게 없는 후배들과 동지들의 절통한 한의 음성이 절절히 울려났다. 

하지만 벗들은 추모식 말미엔 임선희 동지의 아름다운 동지애를 추억하며 더 열심히 자주통일을 위해 싸워나가자고 의지를 다졌다.

 

▲ 행사장 무대 뒤편에서 음향기기를 관리하며 굳은 일을 도맡아 해온 임선희 동지 (왼쪽)

 

임선희 동지는 사업에서도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였다.

 

“연대항쟁 이후엔 무대를 설치하고 출범식 등을 시작하려고 하면 전경 백골단이 침탈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한번은 선배가 그 무거운 신디사이저를 번쩍 들고 안전한 곳으로 내달리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선배는 맡은 일에 책임감이 강했습니다.”-김지영 가극단 미래 배우

 

“언니는 서총련 문화국장을 1년 했지만 4년 동안은 그냥 국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힘든 실무를 많이 맡았죠, 당시엔 앰프나 악기 등이 부족해 각 단위학교에서 빌려와야만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은 뒷풀이도 가고 할 때도 언니는 꼼꼼하게 장비 하나하나 챙겨서 각 단위학교에 빠짐없이 다 돌려주었습니다.”-현순애

 

“가극단 미래를 창립하고 언니가 맡은 일이 사무일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간 대본이나 악보, 공연사진, 음악파일, 재정상황관련 자료 등을 얼마나 꼼꼼하게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 놓았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들이 일을 이어받아 해보니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가극단 미래 유정숙 대표

 

임선희 동지의 벗이자 영화예술인 김철민 감독이 만든 추모 영상에 “늘 조직과 동지들을 한 없이 그리워했던 사람”이란 표현이 나온다. 적중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영상 바로가기

www.facebook.com/wdfty/videos/1488674314524081    

 

임선희 동지는 원칙에도 철저했다. 단련이 아직 안 된 후배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선배였지만 책임적 지위에 있는 간부들에게는 강한 원칙적 비판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자신에 대해서도 원칙적 비판에 타협할 줄 몰랐다. 그게 너무 가혹해 스스로를 힘들게 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자신을 단련시켜주고 정치적 생명을 책임져 주는 조직과 늘 함께 하려고 했고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 달 무료통화를 며칠 되지도 않아 다 사용했던 사람이 바로 임선희 동지였다.

 

추모식에서 친언니는 "진짜 가족은 우리가 아니라 여러분들입니다. 가족들은 선희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연락이 안 될 때도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임선희 동지는 모든 청춘을 조직과 동지들에게 헌신했던 것이다.

 

이렇게 착하고 의로운 청년들이 끝까지 한총련의 깃발을 굳건히 치켜들고 반미자주, 조국통일 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2002년 미군이 학살한 미선, 효순 투쟁이 전 국민적인 반미투쟁으로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며 노무현 정권이 창출되고 박근혜 탄핵촛불 혁명으로 빛나게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변화된 정세로 인해 한총련의 깃발은 이제 내려졌지만 전대협을 이어 자주통일 투쟁사의 한 획을 그은 한총련 투쟁사는 찬란한 반외세투쟁, 조국통일투쟁사에 빛나게 아로새겨져 길이 전해져갈 것이다. 그 한총련 역사와 더불어 그 속에서 후배들에게 밥 한 끼 실컷 사 먹이고 싶어도 용돈이 부족하여 주머니를 수십번도 더 매만졌던 그 따뜻한 전사들의 동지애도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 임선희 동지가 작사 작곡한 미선, 효순 양 추모 노래 '잊지마세요' 가사(맨 위)와 임선희 동지 추모의 글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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