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장위화 노병이 시사하는 중국군의 힘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09/14 [04:37]  최종편집: ⓒ 자주시보

 

9월에 들어와 중국은 백 살 노병 2명을 잃었다. 9월 2일에 별세한 원 난징(南京, 남경)군구 사령원 샹서우쯔(向守志, 향수지, 1917—2017, 사진) 상장과 10일에 별세한 원 난징군구 부정치위원이었던 장위화(张玉华, 장옥화, 1916—2017, 사진) 소장이었다. 

 

▲ 향년 100세 샹서우즈와 향년 101세 장위화     © 자주시보, 중국시민

 

군인으로서의 직급과 명성은 샹서우즈가 높았으나 근년에는 장위화가 더 유명했다. 특히 2015년 9월 3일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70돌 열병식에서 다른 항전노병들과 함께 트럭에 앉아 텐안먼(天安门, 천안문) 앞을 지나면서 주석대에 경례를 붙여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 2015년 9월 3일 열병식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지도자, 귀빈들에게 경례를 하는 99살 장위화     © 자주시보, 중국시민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톈안먼 성루에 초청받고 그 예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열병식을 지켜봤는데, 열병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는지는 의문이다. 경례로 유명해진 장위화가 어떤 인물인지는 아예 몰랐을 것이다. 

 

산둥성(山东省) 원덩현(文登县)사람으로서 19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21살에 일본의 침략에 맞선 텐푸산기의(天福山起义)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됐던 장위화는 1950년 봄에 중국인민해방군 제40군 118사(사단)의 정치위원으로서 하이난다오(海南岛, 해남도)해방전투에 참가했다. 

 

1950년 10월 25일 양수동, 풍하동 일대에서 한국군 6사단 제2연대 제3대대의 수백 명이 소멸되고 미군 고문도 1명 격살, 1명 사로잡혔는데 그 전투를 치른 중국인민지원군 부대가 바로 118사였다. 지원군 대부대가 압록강을 넘은 건 10월 19일이지만 참전기념일은 양수동전투진행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40군은 1950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1~5차 전역을 모두 치르면서 많은 전적을 거둔 다음 평양 동남쪽으로 가서 휴식하다가 1952년 5월에 다시 일선으로 나와 다른 부대가 맡았던 진지를 방어했다. 갱도를 파고 공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5월 16일 연천 신사동 일대에서 비행기 공습을 받아 전쟁기간 최대의 손실을 입게 되었으니, 사장 뤄춘성(罗春生, 라춘생, 1916~ 1952)과 참모장탕징중(汤景仲, 탕경중, 1917~ 1952)이 희생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지원군에서 아주 드문 사급 열사로서 여러 가지 자료에 기록되었고 필자도 오래전부터 그 이름과 경력을 알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본 장위화의 회억에 의하면 당시 그도 뤄춘성 사장, 탕징중 참모장과 함께 공사를 검사했는데 요행 살아남았다 한다. 

 

▲ 1995년 6월 21일, 중국인민지원군 40군 군, 사, 퇀급 지휘관 생존자들의 모임.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사람이 장위화.     © 자주시보, 중국시민

 

항미원조전쟁은 근현대 중국이 치른 첫 번째 현대전으로서 중국공산당의 부대들이 겪었던 국내전쟁과 항일전쟁과 완전히 달랐다. 다른 점을 이루다 꼽기 어려운데 부상 원인만 보더라도 포탄과 폭탄이 차지하는 비례가 높아진 반면에 총알의 비례가 크게 줄었다. 

 

사망원인에 대한 집계는 보지 못했으나, 부상원인에 대한 중국인민지원군 의무부문의 집계수자를 보면 폭발상(炸伤, 포탄과 폭탄으로 인한 부상)이 전체의 69. 2%를 차지했다. 총상은 19. 2%, 타박상은 6. 8%, 칼날상은 1. 2%, 진탕상은 0. 3%, 독가스중독은 0. 1%였고 또한 미군이 소이탄을 대량 쓰는 바람에 화상자 비례가 2%로서 국내해방전쟁에서의 0. 07%를 훨씬 넘겼으며, 이상에 속하지 않는 기타 부상이 1. 9%를 차지했다. 

 

1940년대 후반의 해방전쟁에서는 총상이 36. 7%였고 폭발상이 58. 9%였다. 얼핏 보면 폭발상의 비례차이가 크지 않은 것 같지만, 해방전쟁에서는 포탄으로 인한 부상이 폭발상의 다수를 차지했던 반면 항미원조전쟁에서는 폭탄의 지위가 포탄을 능가했다. 특히 퇀(연대)급 이상 군관들의 부상이나 사망은 폭격이 원인으로 되었다. 

 

비행기의 부족과 고사무기의 불충분으로 제공권을 적에게 내주고 싸워야 했던 체험이 중국 공군의 강화와 반항공능력의 제고라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이에 대해서는 정문일침 324편 “북 미사일 덕에 철 들기 시작할 일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5416)을 참조하시라. 

 

그리고 전시에 급작스레 전우를 잃은 체험이 생존자들의 의무감과 활동력을 높여주는 건 상식이다. 장위화 소장은 1986년에 이직휴양(중국에서는 1949년 건국 전에 사업에 참가한 사람들은 퇴직이라 하지 않고 이직离职라고 한다)한 다음에도 쉬지 않고 고향과 베이징 시 여러 학교의 교외보도원(校外辅导员)으로 되어 후대교양에 힘을 기울였고 20여 년 동안 자선사업에 몸을 담아 기부금을 많이 내 2012년에 “중국의 좋은 사람(中国好人)”이라는 영예칭호를 받았다. 또한 좋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면 꼭꼭 자료를 써서 해당기관에 반영하는 등 사회풍기 바로잡기에 나름 기여를 했다. 

 

▲ 만년에 난징의 집에서 손님을 맞은 장위화     © 자주시보, 중국시민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항미원조, 3차례 큰 전쟁을 겪고 이직한 뒤에도 여러 모로 좋은 일을 많이 한 장위화는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중국인민해방군이 궈보슝(郭伯雄 곽백웅), 쉬차이허우(徐才厚, 서재후)로 대표되는 부패세력들의 침습을 받는 등 문제점들이 수두룩했으나 인민들의 믿음을 잃지 않은 데는 장위화 같은 노병들의 역할이 아주 크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와 그 영향력을 모르면 중국과 중국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트위터 페이스북
 
광고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