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9] 변절자 주잔쿠이와 변호자들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10/12 [01:43]  최종편집: ⓒ 자주시보

 

2번 변절한 주잔쿠이 

 

주잔쿠(朱占奎, 주점규, 1909~)는 일명 주잔쿠이(朱占魁, 주점괴)라고도 표기된다. 1909년에 안츠현(安次县, 안차현)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취고수(吹鼓手, 새납을 불고 북을 치는 풍각쟁이)노릇을 했고 부잣집의 경호병 노릇도 하다가 1935년에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융칭현(永清县, 영청현) 보위단(保卫团) 제4예비대(第4预备队) 대장이 되었으니 지방무장의 작은 두목이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챠오(노구교)사변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하고 국공이 합작하여 싸우기 시작한 후, 8월에 안츠현 항일유격대가 생겨났는데 주잔쿠이가 대장으로 되었다. 인원 30여 명, 총 8자루로 시작된 작은 대오가 괜찮게 싸우면서 명성을 얻었고, 국민당 성정부의 인정을 받아 주잔쿠이는 허베이성 제5행정구(第五行政区) 유격총대(游击总队)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어려움도 많이 겪던 차에, 9월에 국민당정부의 철수명령을 거부하고 허베이성에 남아 싸우는 지중(冀中, 기중, 허베이성의 약칭이 지冀[기]로서 기중은 허베이성 중부를 가리킨다) 항일인민자위군(人民自卫军)과 줄이 닿았다. 원래 국민당 53군 691퇀 퇀장이었다가 인민자위군 사령원으로 변신한 뤼쩡차오(吕正操, 여정조, 1904~2009)는 뒷날 공산당의 부대에서 항일명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1955년에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군사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인데, 안츠유격대를 인민자위군 제3퇀 제1영으로 개편하고 주잔쿠이를 영장으로 임명했다. 

 

이듬해 부대가 정식으로 팔로군 서열에 편입된 다음 주잔쿠이는 1938년 6월 팔로군 제3종대 1지대 사령원으로, 10월에는 지중군구 제5군분구 사령원으로 되었다. 

1940년 8월에는 기중군구 제10군분구 사령원으로 되었는데, 1941년 11월에 허베이 칭위안현(清苑县)에서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 1942년에 되돌아온 그는 신분을 감추고 지내다가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지방의 중공 조직이 심사를 했으나 판단하기 어려워, 중공 중앙 소재지인 옌안(延安, 연안)으로 보냈으나 거기서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후에 사람들은 그가 일본군에 잡혔을 때 변절했다고 판단했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주잔쿠이는 팔로군 러허(热河, 열하)종대 독립 1려(旅, 여단) 부여장으로 임명되었고, 1946년 1월에는 지둥군구(冀东军区, 기동군구) 제14군분구 부사령원으로 임명되었는데, 1946년 전면적인 내전이 벌어진 다음 9월 국민당군이 기세등등하게 전진하는 상황에서 국민당군에 투항했다. 

 

그해 10월에 제11전구(战区) 사령장관부(司令长官部) 소장(少将) 시찰전원(视察专员)으로 임명되고, 1947년 1월에는 지중5현(冀中五县) 연방사령(联防司令) 겸 안츠현 현장으로 되었으며,1948년 5월 허베이성 제3구 행정독찰전원(行政督察专员) 겸 보안사령(保安司令)으로 승진했다가 11월 18일 톈진(天津, 천진) 서쪽에서 부대를 거느리고 귀순했다. 그후 중국인민해방군 지중군구 독립 제1지대 지대장으로 되었다가, 1951년 11월에 역사문제로 체포되어 무기도형에 언도되었다. 

 

1975년 3월에 중국이 전국의 전쟁범들을 모두 특사할 때 풀려난 주잔쿠이는 1979년에 명예를 회복해 투성(投诚, 귀순과 뜻이 비슷하나 보다 듣기 좋기 좋고 기의보다는 좀 낮은 표현)인원 신분을 회복했다. 그뒤 허난성(河南省, 하남성) 인민정부의 참사, 허난성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되었는데, 사망기일은 똑똑치 않다. 

 

 

변절자를 변호하는 사람들 

 

주잔쿠이의 변절은 오랫동안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공산당 원수, 간부들의 판단 외에도 국민당 제11전구(战区) 장관부가 인쇄, 배포한 《주잔쿠이자술(朱占魁自述)》이 존재하고 그 자신이 《나의 실족과 구원(我的失足和被挽救)》이라는 회상기를 써서 발표했기 때문이다. 

 

▲ 주잔쿠이자술(朱占魁自述)     © 자주시보, 중국시민

 

그런데 근년에는 그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일본군에 변절한 문제를 놓고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1941년에 일본군 163연대 연대장이었던 전쟁범이 1950년대 선양(沈阳, 심양)에서 조사를 받을 때 회상한데 의하면 주잔쿠이는 1941년 11월 27일 칭위안현 따리거좡(大李各庄, 대리각장)에서 사로잡혔다. 일본군 1개 대대의 5명 정찰병이 어느 집 마당으로 들어가다가 집안에서 탄알이 날아나와 교전을 벌렸는데, 상대방의 탄알이 떨어지자 쳐들어가서 팔로군 3명을 사로잡았고, 대대본부로 압송해 심문한 끝에 그중의 하나가 제10군분구 사령원 주잔쿠이임을 알게 되었다 한다. 연대본부로 압송해 하룻밤 묵인 다음 이튿날 스쟈좡(石家庄, 석가장)의 제11사단 사령부로 보냈는데, 후에 주잔쿠이가 베이징((北京, 북경, 당시 이름은 베이핑 北平북평임)에서 바오띵(保定, 보정)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탈출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군 장교는 주잔쿠이의 탈출성공설을 믿었다. 

그리고 전후 구일본군인들이 편찬한 자료 《북지치안전(, 중국어로는 화베이- 화북치안전华北治安战으로 옮겼음)》에서는 이렇게 썼다. 

 

“방면군은 워낙 주잔쿠이를 이용하여 지중에서 정치공작을 전개하려 했으나, 그는 호송 도중 1942년 5월 28일 왕두(望都, 망도)부근에서 도주했다. 주는 원래 지중 제10분구 사령으로서 1941년 11월에 그 경위병과 함께 110사단에 생포되었다. 방면군 지휘관이 그를 만났고 화베이정무위원회(华北政务委员会) 치신위안(启新院, 계신원)을 통해 그를 상대로 2개월 가량 회유공작을 진행했다. 주가 도주한 후 사단은 주잔쿠이를 지명수배했으나 주는 끝내 달아나버렸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견강한 공산당원을 변절, 배신시키는 건 아주 어렵다.(方面军本想利用朱占魁在冀中展开政治工作,但他在被护送途中于1942年5月28日在望都附近逃跑。朱为原冀中第十分区司令,于1941年11月连同其卫兵被110师团俘虏。方面军指挥官召见了他,并通过华北政务委员会启新院对他进行了约两个月的怀柔工作。朱逃走后师团对朱占魁进行过通缉,但朱终于跑掉。由此可见,要让坚强的共产党员变节背叛,是很难办到的。)” 

 

일본인들의 주장과 달리 당시 포로들의 상황을 기록, 평가한 어느 중국인은 주잔쿠이가 포로로 된 후 죽음이 겁나서 일본군에 달라붙었기에 집중영에서 고립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당년에 허베이성 일대 중공항일무장력의 통솔자였던 녜룽전(聂荣臻, 섭영진, 1899~ 1992)은 1955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군사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으로서, 만년에 구술하고 남들이 정리한 《녜룽전회고록(聂荣臻回忆录)》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 1938년의 항일장령 녜룽전     © 자주시보, 중국시민

 

“어느날 그가 갑자기 군구 주둔지 자이베이(寨北, 채북)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적들의 압송도중에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는데, 굉장히 불어대고 갈수록 기이하게 엮어 점점 남들이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일본인들의 심문실에서 소동을 부렸고 어떻게 일본인들의 미인계를 간파했으며 일본인들이 자기를 다룰 방법이 없었다고 불어댔다. 나는 그의 말들을 무척 의심했다. 그가 뒤에 보여준 언행들에 비춰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잔쿠이는 여러 번 변절했는데 이번에도 이미 변절해 적들이 놔준 것이다. 해방전쟁에서 그는 또 변절했다. 주잔쿠이는 건달이고 꿍꿍이놀음을 곧잘 했는바, 장기적인 행동을 통해 고찰하지 않고서는 속아 넘어가기 쉽다. 그때 나는 그를 경계했으므로 지중으로 다시 돌려보내지 않고 자이베이에 남겨두어 한동안 고찰했다. 1943년에 우리가 옌안으로 갈 때 그를 옌안에 데리고 갔으니 원래는 진지하게 심사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헌데)그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문제를 끌게 되었다.(有一天他突然到军区驻地寨北来找我。据他讲,他是在敌人押运中,跳火车逃出来的。据他讲,他是在敌人押运中,跳火车逃出来的。他讲得天花乱坠,越说越离奇,越说越让人不相信。他吹他怎么大闹日本人的公堂,怎么识破日本人的美人计,日本人拿他没办法。我对他说的这些很怀疑。从他后来的表现看,完全不是那么回事。朱占魁叛变过好几次,这一次他已经叛变了,是被敌人放出来的。在解放战争中,他又叛变了。朱占魁是个流氓,很有一套鬼把戏,不从长期的行动上考察,往往会上他的当。当时,我是有警觉的,所以没让他再回冀中去,留在寨北住了一段时间。一九四三年,我们到延安去的时候,把他带到了延安,本想对他认真审查,但是,在延安,没能给他作出结论,问题拖了下来。)”

 

이런 주장과 설명에 대해 변호자들은 그게 다 1980년대에 나왔기에 “좌적” 색채가 짙어 신빙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변호자들이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자료들은 일본인이나 국민당 특무들이 내놓은 것이다. 

중국공산당 변절자들에 대한 변호는 드물지 않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더라도, 공산당과 공산주의가 나쁘기에 변절이 나쁘지 않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는 자들도 있다. 

 

이런 변호는 1970년대 말부터 중국공산당이 대규모로 진행한 핑판(平反, 평반, 조선족들은 “평판”이라고도 불렀다)과 무관하지 않다. 억울한 누명을 썼던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취지로 시작한 행동이 폭을 갈수록 넓히면서 총구멍의 강박에 못이겨 기의에 참가한 국민당 특무장령도 기의장령으로 변신하고, 주잔쿠이 같은 인간도 터우청인원으로 되면서, 전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한 셈이 되었다. 때문에 중공의 주장은 뭐나 타당성을 의심하는 바람이 불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잔쿠이가 일찍 감옥에 들어간 게 오히려 복으로 되었다고, 갇히지 않았더라면 그 뒤의 운동에서 고생하고 문화대혁명에서 맞아죽었으리라고 가정하면서 중공의 모든 것을 나쁘게 평하려 애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잔쿠이의 변절이 모두 전투 중 잡혀서 마지못해 이뤄졌다고 강변하고, 국민당으로의 변절은 공산당이 억울한 누명을 들씌워 못살게 굴었기에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살펴보면 주잔쿠이의 첫 번째 변절이 중공과 군대,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해는 끼치지 못했고, 절개를 지키지 못한 흠을 남겼다. 허나 국민당에 변절한 다음에는 정부직무와 군대직무를 맡으면서 나쁜 짓을 꽤나 했다. 국민당의 입장에서는 1948년 11월 주잔쿠이가 공산당으로 넘어간 것도 변절인데, 중공의 입장에서는 이른바 터우청으로서 변절이라 부르지 않는다. 

 

적어도 2번, 엄격하게 따지면 3번 변절한 주잔쿠이 같은 인간이 남의 본보기로 되지 못함은 두말이면 잔소리다. 

 

 

변절은 일종 습관이다 

 

역사를 고찰해보면 변절이 1번에 그치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주잔쿠이가 공산당- 일본- 국민당- 공산당 산하로 자리를 옮겼다면 공산당- 국민당- 일본- 국민당 순서로 몸을 놀린 변절자들도 여럿이다.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게 띵머춘(丁默邨, 정목촌, 1901~ 1947)이다. 

20대 초반에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참가하고 공산주의청년단의 간부까지 했던 띵머춘이 국민당에 가입한 것까지는 제1차 국공합작시기 2중 당적을 허용하던 환경에 비춰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그는 1927년 쟝제스(蒋介石, 장개석)와 왕징웨이(汪精卫, 왕정위)가 혁명을 완전히 배반한 후에 오히려 국민당의 특무조직에 가입하여 활약하면서 고위직을 맡았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에는 일본인에게 넘어가 “76호”라는 속칭으로 불린 특무조직의 두목으로 되어 항일투사, 반일지사들을 숱해 체포, 학살했다. 

당시 부두목은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국민당당국에 체포되어 변절해 특무조직에서 일하다가 한간이 돼버린 리쓰췬(李士群, 이사군, 1905~ 1943)이었다. 

 

▲ 악마소굴 “76호”의 우두머리였던 띵머춘(왼쪽)과 리쓰췬(오른쪽)     © 자주시보, 중국시민

 

리쓰췬은 일본인의 세력을 등에 업고 국민당의 특무조직들과 맞서 숱해 죽이는 한편, 공산당의 세력과는 암암리에 손잡았으니, 중공의 유명한 정보일꾼 판한녠(潘汉年, 반한년)의 뒷날 몰락이 이 사람과 직결되는바, 그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루려 한다. 상하이(上海, 상해)일대에서 암살활동을 벌이던 국민당 특무조직을 붕괴시킨 등 공로를 세워 승진을 거듭하던 리쓰췬은 후에 괴뢰 왕징웨이 정부의 쟝수성(江苏省, 강소성) 정부의 주석까지 되었는데, 여러 세력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고 또한 너무 교만해 남들의 미움을 사다나니, 결국 일본인들에게 독살되었다. 

 

띵머춘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특무조직에서 벗어나 왕징웨이 정부의 교통부장, 복리부장 등 직을 맡았으나 일본의 몰락에 대비하여 슬며시 다시 국민당과 줄을 달았다.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당 특무들을 구출한 공로가 인정되어 항일전쟁 승리 후 사형이 아니라 감옥에 갇히는 정도에 그쳤는데 그와 연계를 가졌고 뒤를 봐주던 국민당 특무두목 따이리(戴笠, 대립, 1897- 1946)가 1946년 3월 17일 비행기추락으로 죽는 바람에 결국 사형이 언도되어 1947년 7월 5일 난징(南京, 남경)에서 총살되었다. 

 

이와 같은 쓰레기 인물도 글쎄 변호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직접변호보다도 간접적으로 미화하는 행위가 더욱 더럽다. 2007년에 나와 한국에서도 상영된 영화 《색계》의 한간 이머청(易默成, 이묵성)의 원형이 바로 띵머춘이다. 

 

▲ 《색계》의 남녀주역 탕웨이(汤唯)와 홍콩배우 량차오웨이(梁朝伟, 양조위)     © 자주시보, 중국시민

 

이 영화의 원작소설이 항일전쟁기간에는 한간문인(변절문인-편집자 주) 후란청(胡兰成, 호란성)의 정부였고 그 뒤에는 반공작품들을 많이 썼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해외에서 살다 죽은 소설가 장아이링(张爱玲, 장애령, 1920~ 1995)의 작품이었으니 그 취지와 평가기준을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영화에서 이선생으로 불리는 이머청은 항일하는 여자주인공의 암살대상이지만 풍류남아로서 그 언행을 관중들이 미워하기 어렵게 그려졌고, 반일투쟁이 사랑비극으로 엮어졌다. 

 

중국은 친일파(한간) 청산이 비교적 철저하게 이뤄졌는데도, 뒷날 내외환경의 변화로 하여 장아이링이 노벨상을 받아야 했을 유능한 소설가로 떠받들리면서 한간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작품들도 버젓이 제작, 상영되었다. 

친일파 청산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한국에서는 바로잡아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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