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17] 사후 30여 년 만에 열사로 확인된 류광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2/10 [03:3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베이징에 설치된 정보계통 열사 기념광장 

 

2013년에 베이징 시산(西山서산)에 특별한 기념광장이 만들어져 1950년대 타이완(台湾대만)에서 희생된 중국공산당의 정보계통열사들을 모아서 기리는 기념비와 부대시설이 설치되었다. 

 

▲ 베이징 교외에 세워진 열사 기념비     © 자주시보, 중국시민

 

기념비 앞의 조각상들에서 복판의 일남일녀는 저명한 열사 우스(吴石오석, 1894~1950)과 주펑(朱枫주풍, 일명주천즈朱谌之주심지)이니, 우스는 국민당정권 국방부의 참모차장으로서 중요한 군사기밀들을 중공에 제공했고 주펑은 그의 연락원이었다. 두 사람은 변절의 추학 13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494)이 다룬 타이완의 중공 책임자 차이샤오챈(蔡孝乾채효건)의 변절로 체포되어 1950년 6월 10일에 살해되었다. 

 

이 두 사람은 신분이 명확하고 사망경과도 분명하기에 열사인정에 큰 문제가 없었다. 허나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진 846명 열사들 중에는 열사확인이 굉장히 늦어진 사람들도 있다. 류광댄(刘光典류광전)이 바로 전형적인 사례이니, 사후 근 30년이 지나서야 변절하지 않았음이 밝혀졌고 사후 30여년 만에 열사증이 발급되었다. 

 

▲ 기념시설을 찾아온 류광댄 가족     © 자주시보, 중국시민

 

류광댄의 자녀들인 류위팡(刘玉芳유옥방), 류위성(刘玉胜유옥승), 류위핑(刘玉平유옥평)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어린 시절 집을 떠나 사라진 뒤 소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 왕쑤랜(王素莲왕소련)에게 물으면 이제 전국이 다 해방되면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애매한 대답을 들었을 정도였다. 특별한 일이라면 1950년대 초에는 많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집에 찾아오고 데리고 나가 놀기도 하면서 친근하게 대해주었는데, 1954년에 변화가 생겼다. 전보다 못한 집으로 이사했고 아저씨들도 별로 찾아오지 않았다. 후에 “간부가족(干属)” 대우를 받고 정부가 달마다 갖다주는 돈으로 생활하면서 대학공부도 하고 괜찮은 직업을 갖고 일하는 등 남보다 못지 않은 생활을 했으나 늘 맘속에 의문을 품었다. 

1988년 음력설 전후에 베이징 정치협상회의에서 일하던 딸 류위팡은 놀라운 소식을 얻어들었다. 1949년 가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전후 타이완으로 파견되었다가 10여 년 감옥살이를 한 노당원이 100여 명 희생자의 명단을 갖고 돌아왔다는 것. 

 

 

♦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알기까지 

 

사실 류광댄의 자녀들은 수십 년 동안 아버지의 종적을 꾸준히 찾았다. 

랴오닝성에서 태어난 류광댄은 광복 후 중공에 가입하여 정보계통에서 일했는데, 원래 상인이었으므로 돈을 내면서 혁명한 특별한 인물이다. 

1949년 6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앞두고 갑자기 집을 떠난 류광댄이 간 곳은 타이완이었다. 1950년 후난성(湖南省호남성) 창사시(长沙市장사시)에서 보낸 편지가 가족들이 받은 마지막 물건이었다. 

 

▲ 류광댄의 막내아들 류위핑     © 자주시보, 중국시민


1954년 변화 이후 워낙 심장병으로 일을 하지 못하던 류광댄의 아내 왕쑤랜은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이듬해 32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그때 아이들은 각기 12살, 10살, 7살이었다. 

 

▲ 1942년에 결혼한 류광댄 부부     © 자주시보, 중국시민

 

당시 조직에서 류광댄의 변절을 확정하지 못해 “연계를 잃었음(失联, 失去联系)”이라고 규정했는데, 변절여부는 자녀들의 가슴을 짓누르는 바윗덩어리로 되었다. 1969년 중국과 소련이 변경전투로 관계가 최악에 이르렀고 북방의 내몽골에서 지식청년으로 있던 류위핑은 소련의 압력을 직접 느꼈다. 언제 대전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군용선으로 아버지가 몸담았던 부문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소식이 있느냐만 알고 싶다고 말했더니, 상대방 아저씨는 새 정황이 있으면 조직에서 재빨리 너희들에게 알려주겠다고 승낙했다. 허나 답을 얻기까지는 또 20년 가까이 지나갔다. 

 

1988년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은 류위팡과 류위핑이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해당부문을 찾았으니 이는 중공의 정보부문이 그동안 통폐합을 거쳤고 특히 1983년에 국가안전부가 신설되면서 자료와 인원이전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누이가 드디어 전설 속의 명단을 보니 희생자들은 모두 1950년대 타이완 백색테러(白色恐怖)시기에 살해된 중공지하당원이었다. 아버지의 이름 류광댄이 분명히 있었다. 

각오는 했으나 30여 년만에 처음 접한 아버지의 확실한 소식이 죽음임을 알게 된 그들은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 

 

1991년경에 류광댄 소속단위에서 공식 정치결론을 내려 “우리 당 은폐전선의 훌륭한 동지로서 후세사람들이 영원히 기릴 만하다(我党隐蔽战线上的好同志,值得后人永远怀念)”고 인정했고, 민정부문에서도 “열사증”을 보충발급했다. 류광댄씨 오누이는 골회함을 하나 사서 베이징의 빠바오산혁명공동묘지(八宝山革命公墓팔보산혁명공묘)에 안치했지만, 그 속에는 골회도 유물도 없었다. 

 

 

♦ 아버지의 종적을 찾아 퍼즐 맞추기 

 

중국 사회에서 중시하는 정치적 결론은 내려졌지만 류광댄의 자녀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 명단에는 “류광댄, 뤼쑨인(刘光典,旅顺人)”이라는 6자가 씌어졌을 뿐이라 류광댄이 타이완에 가서 무슨 임무를 집행했는지 어떻게 체포되었다가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혁명가가 타이완의 엄혹한 백색테러 하에 그처럼 많은 희생동지들의 이름을 수집하고 대륙에 갖고 온 건 참으로 기적이지만, 자녀로서는 더 알고 싶었다. 

 

하여 류위핑은 의도적으로 타이완에서의 중공 지하당투쟁자료를 수집했다. 1992년 타이완의 명작가 리아오(李敖리오)가 《안전국 기밀문건회편(安全局机密文件汇编)》이라는 책을 출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민당 특무조직에 수십 년 몸담으면서 고위직을 차지했고 “산 염라왕(活阎王)”이라는 별명을 가진 구쩡원(谷正文곡정문)이 제공한 자료란다. 상, 하권으로 이뤄진 책에는 1949~ 1960년에 국민당이 중공당원과 민주인사들을 진압, 학살한 164건 사건자료를 모았으니 50여 만자나 되었다. 

류위핑이 훑어보니 아버지가 언급된 사건이 여럿이었다. 그중 《공비 동북국 사회부 타이완 잠복간첩 왕야오둥 등 반란사건(匪东北局社会部潜台匪干王耀东等叛乱案)》에서 가장 상세히 기록했는바, 그에 의하면 왕야오둥(王耀东왕요동)은 류광댄이 타이완으로 와서 만난 사람으로서 직책은 정보수집이었고 류광댄의 임무는 정보를 갖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1950년 2월 ,류광댄의 윗선(上线) 홍궈쓰(洪国式홍국식)가 체포되면서 류광댄의 신분이 폭로되었는데, 타이완인인 왕야오둥이 류광댄를 숨겨주었다. 몇 달 지나 왕야오둥도 다른 중공지하조직의 파괴로 폭로되어 류광댄와 함께 타이완 남부로 달아나 망명했다. 4년 동안 망명하던 그들은 1954년에 왕의 친척 후창린(胡苍霖호창림)의 체포와 고발로 은신처가 드러났다. 

이 사건에서 류광댄에 대한 보밀국의 최종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산간에 숨어서 땅을 파고 굴 만들어 원시인 비슷한 생활을 여러 해 하면서도 그릇됨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반동선전에 종사했으니 그 사상이 심하게 중독되었음을 알 수 있다(홀림匿居山间,掘地为穴,过着长年类似原始人的生活,仍执迷不悟,继续从事反动宣传,由此可见其思想受毒至深。)”

 

처음 아버지의 타이완 경력을 좀이나마 알게 된 류위핑은 감동과 함께 경의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 만족하기는 어려웠다. 아버지의 종적을 찾는 노력은 계속 기울여졌다. 

2002년에 이르러 류씨네 오누이는 타이완 당국이 계엄시기 부당사건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기금회를 세웠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해에만 해도 보상금신청이 5000건에 이르렀다. 오누이는 기금회에 배상을 신청했는데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면서도 증거를 찾는 과정에서 아버지에 관한 자료들을 더 얻기를 바라서였다. 

 

타이완의 규정이 굉장히 번쇄하여 피해자의 부모, 배우자, 자녀만이 보상금 신청과 획득 자격을 갖는다고 했으므로 그들은 우선 류광댄의 부모와 아내가 세상 떴음을 증명하고 다음 그들이 류광댄의 자녀임을 증명해야 되었다. 자료들을 다 갖추기 위해 그들은 아버지의 고향마을까지 찾아갔다. 

또한 그들 셋이 모두 대륙에 있어 기금회와 연락하기 불편하므로 타이완에 사는 대리인을 찾아야 했다. 소개를 거쳐 “50년대 수난자 호조회(五十年代受难者互助会)” 비서장 린리펑(林丽锋임여봉)과 줄이 닿았고 호조회 일꾼들은 다수가 백색테러 피해자 후대라 류씨 오누이의 심정을 잘 이해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2002년 8월 2일,모든 자료를 갖춘 다음 류씨 오누이는 기금회에 편지를 보내 타이완 해당부문이 류광댄을 살해한 죄행에 대해 보상해주기를 신청했다. 

4년이나 기다리다가 2006년에 받은 결정은 기각이었다. 보상조례에는 “극악무도한 공비에게는 배상하지 않는다(罪大恶极的共匪不予赔偿)”는 규정이 있는데 기금회가 류광댄을 그 부류에 끼워넣은 것이다. 각오는 했으나 류씨 오누이는 아버지를 비적간첩이라고 표기한 결정서를 보고 굉장히 분개했다. 하여 그들은 계속하여 “타이완최고행정법원(台湾最高行政法院)”에 상소했고 또 2년이 지나 그 최고법원은 역시 기각을 결정했다. 

 

배상은 받지 못했으나 얻은 바는 적잖았다. 사건처리과정에서 타이완 해당부문이 많은 원시서류를 찾아보았고 판결서에서 류광댄이 종사한 지하활동을 간단히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류씨 오누이는 타이완 정부 측 경로로 아버지의 정보를 얻었고 아버지가 억센 혁명자였음이 또다시 증명되었다. 

 

그보다도 놀랍고 기쁜 일은 그 기간에 류광댄의 골회를 찾아낸 것이었다. 2003년 타이완 여러 계층 인사들의 호소에 의해 타이완 당국은 예전의 사형장과 무덤이었던 타이베이(台北대북) 교외 마창띵(马场町마장정)과 류장리(六张犁육장리)를 기념공원으로 만들었다. 2003년 봄에 류장리의 유골탑(灵骨塔)을 재건하기 위해 해당부문이 사회에 공고를 발표하여 유족들이 탑 안의 골회를 잠시 찾아갔다가 탑을 재건한 후 안치하라고 했는데, 호조회의 왕진숭(王锦松왕금송) 등 사람들이 골회 명단에서 류광댄의 이름을 발견했다. 왕진숭이 재빨리 류광댄의 이름이 적힌 골회단지 사진을 보내와 류위핑은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날 때 한 살 남짓한 아기였던 그가 예순이 넘어서야 아버지 이름이 쓰인 골회단지사진을 보았으니 말이다. 

 

▲ 류광댄의 골회가 담긴 단지     © 자주시보, 중국시민


후에 오누이는 아버지의 골회를 2등분하여 절반은 “인민충혼기념공원(人民忠魂纪念公园)”으로 개건된 류장리에 안치하고 절반은 빠바오산혁명공동묘지에 안치했다. 

또 2년 지나 2008년 9월의 어느날, 류위핑의 아들 류신위(刘新宇유신우)가 인터넷에서 “류광댄(刘光典)”으로 검색하다가 소책자를 하나 발견했다. 타이완에서 경매하는 책자인데 제목은 《한 비적간첩이 도망한 이야기(一个匪谍逃亡的故事)》, 중화민국 44년(1955) 1월 타이완성 보안사령부가 인쇄제작(台湾省保安司令部印制)했다고 밝혀진 책자표지사진을 류광댄위핑이 처음 볼 때에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몰랐는데, 아래의 인용문을 자세히 읽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 류광댄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당시 판매가격은 타이완 퐈폐로 500위안으로서 인민폐 100위안을 좀 넘겼다. 한화로는 18000원 정도. 소책자로서는 비싼 편이지만, 류위핑은 즉시 타이베이에 사는 왕진숭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책자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왕진숭이 즉시 손을 써서 책을 샀고 그해 10월 1일 국경일에 사무차로 베이징에 오면서 소책자를 류위핑에게 넘겨주었다. 

 

▲ 1955년 1월에 타이완 보안사령부가 제작한 소책자 《한 비적 간첩이 도망한 이야기》     © 자주시보, 중국시민

 

소책자는 보안사령부가 경계심 고취목적으로 제작했는바, 타이완에서의 류광댄의 망명경과를 상세히 기록했고 노선도까지 그려넣었다. 

 

▲ 타이완 소책자 속의 류광댄 도망 노선과 은닉지점도     © 자주시보

 

▲ 사형집행 직전의 류광댄     © 자주시보, 중국시민

 

아버지가 1959년 2월 4일에 타이베이에서 비밀리에 살해되었음을 확인한 류위핑은 2008년에 자신이 수집한 류광댄 사건 판결서와 사형직전의 류광댄 사진을 아버지 소속 단위로 가져갔다. 그 자료들을 검토한 다음에야 단위의 영도자가 50여 년 숨겼던 비밀을 알려주었다. 1954년에 류광댄이 체포된 다음 그와 꼭 같이 생긴 사람이 홍콩 주재 중공 기관 문앞에 와서 반공언론을 발표하면서 공산당과 결렬하겠다고 소리질렀다. 그때 류광댄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류광댄이 변절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국민당 특무들의 이간계가 완전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의심의 씨앗은 퍼뜨렸다. 그런 유별난 짓을 통해 특무들이 류광댄을 얼마나 미워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수수께끼들이 이제는 완전히 풀렸으나 류위핑은 아버지가 체포돼서부터 사형당하기까지 5년 동안 어떻게 보냈는가를 알고 싶었다. 아무런 문자기록도 찾지 못했던 류위핑은 2010년 8월에야 우연히 상하이에서 출판한 《쑤청(书城서성》잡지에서 《한 타이완 노병의 회억(一个台湾老兵的回忆)》이라는 글을 보았다. 미국에 거주한다고 밝혀진 장쟈린(张家林장가림)은 1957년에 대륙으로의 탈출혐의로 채포되어 10년 징역을 언도받고 타이베이 칭다오로(青岛路청도로) 군법처 간수소(军法处看守所)에 갇혔는데 류광댄와 한 감방에 들었다. 

만나자 바람으로 류광댄은 자신을 소개해 장쟈린에게 좋은 첫 인상을 남겼다. 감옥에서 자기 정보를 전혀 알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장쟈린의 회억에서 키 크고 잘 생긴 류광댄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게 길러 야인 같았는데 차차 요해하게 되었다. 일본어와 민난어(闽南语, 민남어, 타이완에서 널리 쓰이는 푸젠성 남부 방언)를 아는 류광댄은 의리심이 강해 요리에 고기점이 보이기만 하면 반드시 장쟈린에게 먹으라면서 상대방의 몸이 좋지 않음을 이유로 거들었다. 언젠가 류광댄에게 왜 타이완에 왔느냐고 물었더니 명령을 받들었다고 대답하기에 장쟈린은 그가 진짜배기 공산당원임을 알게 되어 경의를 품었다 한다. 

이로써 류광댄의 인생 최후 모습이 좀이나마 알려졌는데, 류위핑은 직접 장쟈린을 찾아뵙고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더 알고 싶었으나, 잡지사를 통해 알아보니 유감스럽게도 장쟈린은 이미 2009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류광댄의 사적이 언론에 공개되기는 2011년 청명 전후. 사회에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으니 긍정, 찬양, 의심, 몰이해, 악의적 공격 등이 엇갈렸다. 허나 그의 정신력과 의지는 이념을 초월하여 존경을 받는다. 

 

 

 류광댄을 혁명으로 이끌었던 윗선 홍궈쓰의 오류 

 

1922년 일본 치하의 뤼쑨(旅顺여순) 부근 농촌에서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류광댄은 하얼빈철도공학원(哈尔滨铁道工学院)을 졸업한 후 장사를 했고 1942년에 결혼했다. 돈을 좀 모은 다음 베이핑(北平북평) 푸런대학(辅仁大学보인대학)에 들어가 경제관리를 배웠고 베이핑(北平북평), 산시省(山西산서성), 내몽골, 상하이(上海)들지를 돌면서 의약품과 가죽 장사를 해 재산을 꽤나 모았다. 

 

항일전쟁이 끝난 1945년에 그는 동북사람 훙궈쓰(洪国式홍국식)을 만났으니 1938년에 혁명에 참가한 노당원 훙궈쓰는 줄곧 정보부문에서 일한 베테랑인바, 유명한 중공 사회부(社会部) 성원이었다. 쟝제스가 전면내전을 발동하여 중공의 난징, 상하이 판사처들이 철수하면서 훙궈쓰도 선양(沈阳심양)으로 옮겨와 동북 사회부의 영도를 받았는데, 중공의 많은 사업이 지하로 들어가다나니 지하사업을 잘 할 사람 포섭이 급선무로 나섰다. 훙궈쓰의 소개로 대학졸업증을 갖고 영어, 일어도 능통한 류광댄은 중공 따롄(大连대련) 사회부 성원이 되었다. 뒤이어 류광댄은 훙궈쓰와 함께 상하이로 돌아가서 정보소(情报站)인 “화스회사(华石公司화석공사)”를 설립했다. 

당조직의 경제상황이 가장 어려울 때 류광댄가 1천 달러와 1냥 황금을 내어 혁명을 지원했는데, 당시 환율로 천 달러는 황금 30여 냥에 상당했다. 이와 같이 류광댄은 재산을 내어 혁명에 기여한 사람으로서 출세를 위해 공산당에 들어가는 투기꾼이 아니었다. 

 

형세변화에 따라 선양으로 돌아왔던 둘은 1948년 6월 상급의 명령에 좇아 핑진(平津, 베이핑과 톈진, 지금의 북경과 천진) 쪽의 정보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비행기를 타고 이사한 류광댄 일가는 마당 달린 집을 하나 세내어 정보소로 삼으면서 늘 집에 찾아오는 훙궈쓰와 밀접히 연락했다. 

1949년 여름 창쟝(长江장강)이북지역 및 상하이, 저쟝성(浙江省절강성) 등 남방 주요지역들도 해방한 중공은 서북, 서남 지역의 해방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타이완에 주의력을 집중했다. 

그 전해 말부터 정보사업중점이 남으로 이동되었는데, 제1중점이 타이완 및 주변도서. 중공중앙 사회부는 훙궈쓰, 류광댄 등에게 남하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1949년 6월 베이핑을 떠난 류광댄은 홍콩으로 가서 타이완에 갈 준비를 했다. 1950년 여름에 타이완을 해방할 계획을 세운 중공이 절실하게 수요하는 것이 정보였는데 타이완에 무전기를 설치하지 못해 교통원이 직접 가서 정보를 가져와야 했다. 류광댄이 교통원으로 선발되었다. 

류광댄이 속한 정보소조의 책임자는 훙궈쓰였다. 출발 전에 조직에서 준 상세한 소조분공에 의하면 훙궈쓰의 임무는 각종 군사정보의 수집, 모음, 처리였고, 타이완적 공산당원 왕야오둥은 남이 정리한 정보를 교통원 류광댄에게 넘기는 게 임무였다. 류광댄은 정보를 갖고 돌아오는 임무 외에 지하공작자들에게 상급 지시를 전달하고 지하공작자들을 고찰(考察검열)하는 임무도 맡았다. 

 

훙궈쓰와 류광댄이 순조롭게 타이완에 들어가도록 중앙사회부는 중공 안둥성(安东省안동성, 지금의 랴오닝성 일부) 정부 주석 류란보(刘澜波유란파)더러 사촌형인 국민당 육군상장 류둬취안(刘多荃유다전)과 연락하게 했다. 류둬취안은 즉시 타이완의 국민당군대에서 일하는 아들 류취안리(刘全礼유전례)에게 편지를 썼고 류취안리는 훙궈쓰의 타이완 진입을 도왔을 뿐아니라 군사정보도 제공했다. 

류취안리의 배치에 따라 훙궈쓰는 류톈민(刘天民유천민)이 설립한 북방기업공사의 부총경리로 되었고 그 회사를 통해 신분증과 루타이쩡(入台证타이완진입허가증)을 얻었다. 류광댄은 류톈민 조카 신분으로 신분증을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타이완의 《소탕보(扫荡报)》에 잡입한 지하당원 저우쑤(邹曙추서)가 류광댄의 루타이쩡을 만들어주었다. 

 

1949년 10월 25일 홍콩을 떠난 류광댄은 처음 타이완으로 향했다. 류위핑이 알아본데 의하면 류광댄은 따롄에서 계통적인 훈련을 받았다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준비사업이 상당히 충분했음을 보여준다. 

 

류광댄의 첫 임무는 비교적 간단해 타이완에 도착한 후 곧 왕야오둥와 접선했고 제1차 정보들을 받았다. 1개월 지나 11월 27일에 상급의 귀환지시를 받은 류광댄은 찻잎을 포장하는 종이에 미음으로 정보를 써서 홍콩으로 갖고 갔다. 타이완자료에 의하면 거기에는 타이완 육해공군 상황, 기상비밀암호, 조수시간표, 서해안 방어상황, 중요항구 통신암호 등이 포함되어 상륙작전의 필수였고 또한 중공이 획득한 제1차 중요한 정보였다 한다.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1949년 12월 10일 훙궈쓰가 타이완으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1월 6일 류광댄이 두 번째 타이완행을 했다. 

2개월 사이에 타이완 정세는 크게 변했으니 국민당 특무조직이 중공 타이완공작위원회와 그 산하 조직들의 상세한 정황을 장악했다. 

당시 타이완의 중공지하조직은 주로 3갈래였는데 하나는 차이샤오챈(蔡孝乾채효건)이 서기인 중공 타이완성 공작위윈회, 하나는 중공 화둥국(华东局화동국)이 파견한 사람들로서 주펑이 그 계통에 속했고, 하나는 훙궈쓰와 류광댄이 속한 중앙사회부가 파견한 지하조직이었다. 

 

1월 말 차이샤오챈의 체포 등으로 형세가 위험할 때, 2월초에 류광댄은 상급에 “화물을 다 갖췄으니 불일간 홍콩으로 돌아가겠다(货已办妥,日内运港)”는 소식을 보냈는데 왜서인지 귀환허가명령을 받지 못했다. 

훙궈쓰 소조는 다른 조직들과 횡적 연계를 맺지 않았으나 백색테러 속에서 2월 말에 폭로되었다. 시초는 아주 시시껄렁한 일이었다. 2월 28일 훙궈쓰가 타이베이 역전에서 기차시간표를 보는데 건달 하나가 와서 트집을 잡아 다툼이 벌어졌다. 역전 경찰이 달려와 계엄범 위반 이유로 그들을 파출소로 데려갔다. 처음에 경찰은 훙궈쓰를 아주 점잖게 대하면서 신분만 확인하면 놔줄 수 있다고 했다. 훙궈쓰는 자기가 타이중(台中대중)의 북방기업회사 부총경리로서 공무로 타이베이에 출장왔다가 돌아가려 한다고 설명했고, 경찰은 증명할 수 있는 사람 몇의 연락방식을 제공하면 즉시 놔주겠다고 승낙했다.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한 훙궈쓰는 2차에 걸쳐 지하조직성원들의 연락방식을 제공했다. 보밀국은 “본 사건의 종합검토(本案之综合检讨)”에서 이렇게 썼다. 

 

“지하공작투쟁기술을 놓고 말할 때 조금만 경험이 있는 자는 응당 의심하고 경계하면서 상세히 분석해야 한다. 그런데 범인 훙이 파출소를 빨리 떠나려는 마음이 급하여 통신방식으로 일꾼 성명과 주소를 거듭 누설하여 중요한 관계들이 경각에 와해되게 만들었다.(就地下工作斗争技术言,稍具经验者,似即应有所怀疑与警觉,并详加以分析。乃洪犯因求离派出所心切,一再以通讯方式,泄露工作人员姓名及地址。致令重要关系,瓦解于顷刻。)”

 

훙궈쓰의 실수로 조직성원 후위린(胡玉麟호옥린), 챈펀(钱汾전분), 저우쑤, 화쩐(华震화진), 류톈민(刘天民), 류취안리(刘全礼) 등이 잇달아 체포되어 훙궈쓰 정보소조가 와해되었다. 

훙궈쓰가 변절했느냐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줄곧 존재한다. 적들의 혹형에 견디지 못해 조직성원들을 불었다는 견해는 나름대로 증거도 있다. 그가 훠싸오도(火烧岛화소도) 감옥에 가서 교관으로 일하면서 감금된 중공 지하당원들과 6. 25전쟁포로 중 타이완으로 간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을 설득하는 일을 전담했다는 것이다. 

전쟁포로 송환이 6. 25 휴전담판의 주요쟁점으로 되었음은 역사상식이고 약 2만 명이 “자유”를 찾아 타이완으로 갔다는 것도 한국에서 꽤나 알려졌는데, 그런 이동 뒤에 국민당 특무들의 강요와 피비린 폭행이 있었고 타이완으로 간 사람들 중에서 감옥에 끌려간 사람들도 상당수였음은 한국에서 거의 거들어지지 않았다. 

 

간수소에서 류광댄과 접촉했던 장쟈린이 훠싸오도에서 복역했는데 훙궈쓰의 강의를 직접 들었으니 그 내용은 《러시아제국주의의 중국침략사(俄帝侵华史)》와 《중국에서의 소베트러시아(苏俄在中国)》였다. 대륙에서도 해당부문은 훙궈쓰가 변절했다고 인정했으니, 류위핑이 어렵사리 지린성(吉林省길림성)에서 사는 훙궈쓰 부인과 연락이 닿았는데, 할머니는 전화를 받자 바람으로 개탄하더란다. 

“그(훙궈쓰)는 너무 못났다. 자네 아버지처럼 혁명열사로 되지 못했으니 그의 일을 나는 더 거들고 싶지 않다. (他(洪国式)太不争气,不像你爸爸那样成为一名革命烈士,他的事我不想再提了。)”

그런데 류위핑은 훙궈쓰를 변절이라고 단정한다면 너무 경솔한 처사라고 여긴다. 훙궈쓰는 체포된 후 차이샤오챈처럼 동지들을 물어먹은 게 아니라 가급적으로 혁명이익을 보호했으니 국민당 특무들의 심문기록에 의하면 교통원 류광댄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훙궈쓰는 류광댄이 무전기를 가지러 20일 홍콩으로 돌아갔다고 대답했다. 사실 훙궈쓰는 그때 류광댄이 타이베이의 한 여관에 있음을 알았는데, 그가 제대로 말했더라면 류광댄이 탈출할 수 없었다. 

또한 뒷날 훠싸오도에 가서도 적들의 앞에서는 입장전환을 권하다가도 적들 뒤에서는 가만히 신념을 지키라고 격려했다 한다. 

상당히 복잡한 인물 훙궈쓰는 1960년에 살해되었으니 특무들은 잔인하게도 각을 떠서 강물에 던져넣었다. 

류위핑의 소개에 의하면 훙궈쓰의 경력이 차차 조직에 분명히 알려져, 몇 해 전에 해당부문에서 문건을 작성해 그에 대한 평가를 “공무로 인한 희생(因公牺牲)”이라고 수정했다 한다. 

 

특무들이 어떻게 훙궈쓰소조의 존재를 감지하고 덫을 놓았느냐는 수사기법문제인데, 류위핑이 자료를 얻어보고 놀란 것은 훙궈쓰소조 38명 명단중 정보공작과 대적공작부문의 천치(陈琦진기), 양원량(杨文亮양문량) 두 사람 이름 곁에 특무조직이 “번뿌네이쌘(本部内线, 우리 부문의 프락치)”라고 적은 것이다. 훙궈쓰는 국민당공군의 정보를 얻을 생각 하나로 공군장교인 양과 그의 친구 천을 쉽사리 소조에 받아들여서 화를 키웠다. 프락치들만으로는 소조의 다른 부분을 파악할 수 없기에, 특무들이 덫을 놓았는데 훙궈쓰가 간파하지 못했다. 

훙궈쓰는 성원심사, 적수 경계 등에서 오류를 범했고 심문과정과 사후 10년 간 오락가락했기에 평가가 어려워지는데 학생 격인 류광댄보다 깔끔하지 못한 건 엄연한 사실이다. 그 소조 성원 다수가 1950년 10월 1일 살해된 데 대해 훙궈쓰도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단 변절이냐 아니냐를 놓고서는 그가 심문과정에서 한 말만 봐서는 안된다. 

 

필자는 변절의 추학 11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240)에서 체포된 후 지하당원들이 심문을 대한 몇 가지 방식을 설명했는데, 그밖에도 차원이 높고 연계자가 많은 망책 정도가 되면 입을 꼭 다물기나 치약 짜듯이 조금씩 불기만이 아니라 엄청난 자료를 내놓는 것도 기법이라면 일종 기법이다. 

독일 출신의 소련 간첩 리차드 조르게(1895~ 1944)는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해 엄청난 성과를 거둔 전설적 인물로서 1941년에 일본군이 북진이 아니라 남하를 결정했다는 정보를 는 소련에 알려, 모스크바 보위전이 가장 어려운 고비에서 스탈린이 시베리아의 부대를 서부전선으로 옮기게 하여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게 최대의 공로로 알려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조르게가 체포된 날짜는 1941년 10월 18일이고 일본이 진주만 습격으로 남하를 확인해준 건 1941년 12월 7일이다. 일본군이 간첩단을 하나 확보했다 해서 전략적 결정을 바꿀 리는 없다만 조르게가 체포된 뒤에도 소련이 일본의 북진을 걱정하지 않았다는 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음을 말해주지 않는가? 

조르게의 일본 내 행적에 대해 여러 나라 사람들이 시시콜콜 연구했고 어떤 사람들은 남녀관계에 특별히 흥미를 가져 조르게가 어떻게 실수해서 결국 잡혔노라고 단언한다. 또한 조르게 소조가 1941년에 다 잡혔다는 건 정설이었다. 그리고 조르게가 체포된 후 순순히 많은 정보를 털어놓은 것도 자신이 죽기를 바라지 않아서였고 소련이 간첩교환으로 자신을 구해가리라 기대했기 때문인데 소련과 스탈린이 무정하게 처사하는 바람에 절망했다가 1943년 9월 2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해석이 무성했다. 

조르게는 1930년대 중국에서 활동했고 그 시기 조르게 소조에 가입했던 중국인들도 있으므로 그에 대해 흥미를 갖고 연구하는 중국인들이 적잖다. 그런 사람들의 연구에 의하면 조르게의 공술은 일종 전술이었다. 일본 헌병들이 정보를 어느 정도 장악한 상황에서 상대방이 일시 소화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쏟아냄으로써 모든 걸 털어놓았다는 허상을 만들었는바, 이는 중국 본토와 만주 쪽에 남아있던 정보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실제로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후에야 정체가 드러나 잡힌 정보원들이 있다. 

조르게 차원의 정보거물은 단순한 방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 단 그 정도 거물이 아니면 재주를 쓰려다가 메주를 쑤는 격이 되기 쉽다. 

 

 

류광댄의 도망 경력과 최후 

 

훙궈쓰로 돌아와 그의 부하이자 학생인 류광댄은 어떻게 행동했던가? 체포행동 직전에 타이베이에 가서 출경증(出境证)을 받아 배표를 사서 홍콩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류광댄은 1950년 3월 1일 항구도시 지룽(基隆기륭)에서 연락원 왕할머니의 전달로 훙궈쓰의 체로소식을 듣고 그날 밤으로 타이베이에 돌아와 왕야오둥와 만났다. 외출했던 덕에 잠시 체포를 면했으나 극도의 곤경에 빠진 그는 몸에 지닌 문건들을 왕야오둥에게 넘겨주고 여관으로 돌아가서 짐과 정보들을 모두 가져갔다. 그날 밤 인력거군 집에서 하루 묵은 그는 이튿날 우체국을 통해 상급에 경보를 보냈다. “동생 준이 금성뇌염으로 죽었다(俊弟得急性脑炎亡故)”는 전보는 정보소조가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다음 짱화(彰化창화)로 옮겨가서 뤄푸지(罗辅基나보기)라는 이름의 신분증을 가진 그는 왕야오둥과 합쳐서 차를 타고 싼화(善化선화)로 향했으니 그때로부터 조직과 줄이 끊어졌다. 

뒤늦게 여관들을 습격했으나 류광댄을 놓친 특무들은 출경증을 만들어준 사람들을 체포하고 여관 사람들도 잡았으며 지룽, 타이난(台南대남), 까오슝(高雄고웅) 등지에서 돌격검사를 했으나 왕야오둥의 도움으로 류광댄은 추격을 벗어났다. 

 

한편 류광댄은 타이완 남부의 심산으로 들어가 1950년 3월 1일부터 1954년 2월 13일까지 3년 11개월 반을 버텼는데 처음에는 가난한 농민 라이쩡량(赖正亮뢰정량)의 집에서 살면서 달마다 식비 30위안을 주는 외에 함께 밭일도 했고 밤에는 들에 나가 잤다. 한동안 지나 농민 리샌위(李显玉이현옥) 집, 왕씨 노인네 집으로 옮겨갔다가 시일이 지나 경비가 다 떨어지니 죽기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풍찬노숙했다. 그는 줄곧 대륙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았으나 항구, 부두에 대한 봉쇄가 엄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혁명의 성공을 굳게 믿어 아무리 어렵고 위험해도 혁명을 선전했다. 

1954년 2월 4년 가까이 추적하던 특무들이 왕야오둥을 엄호하던 당조직을 파괴했다. 9일 조직성원 후창린이 왕야오둥이 중공 요인을 데려다가 은폐했다는 소식을 털어놓아, 군대와 경찰들이 대량 동원되어 주야 24시간 수색을 벌였고 2월 13일에 타이난과 까오슝이 경계 짓는 곳에서 류광댄과 왕야오둥을 잡았다. 

특무들이 보존한 사진에 의하면 여러 해 동안 류광댄과 왕야오둥은 해발 1000여 미터 되는 곳의 동굴에서 살았으니 구멍 너비 50센티미터, 높이 40센티미터, 안의 길이 110센티미터 너비 170센티미터였다. 

 

왕야오둥은 1955년 4월 29일에 처형되었고 류광댄은 1958년 10월 22일 타이완 경비총사령부가 조직한 심판청에서 사형에 언도되었다. 1959년 1월 13일 보고를 받은 쟝제스는 “43년에 체포한 사건을 왜 지금까지 끌어서 판결했는가? 조사하고 보고하라. 류 범인의 사형은 그대로 허가한다(此案系四十三年所破获,为何延至现在始行判决,查报,刘犯死刑照准。)”는 친필지시를 남겼다. 

 

1959년 2월 4일 새벽 5시에 결박당해 감옥에서 끌려나간 류광댄은 태연히 죽음을 맞이했으니 교형리들은 4발 맞고 죽었다는 보고서에다가 시체 사진을 첨부하여 쟝제스에게 올렸다. 쟝제스와 그 일당이 류광댄을 얼마나 미워했느냐를 알 수 있다. 

적수들이 미워하는 만큼 자기 편은 사랑하고 존경한다. 사후 수십 년만에야 참모습이 드러난 류광댄이 고매한 절개로 변절의 추함을 까밝히므로 필자는 “변절의 추학” 시리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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