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91]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8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3/13 [17:0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고추모 탄생설화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화하족의 사서인 위서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뿌리와 북부여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되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북부여에 대한 다른 기록은 추후 북부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고증과 논증을 할 때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북부여에 대해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기에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해설문만을 싣기로 한다. 그동안 살펴본 다른 사사들의 내용과 거의 똑같다. 다만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탄생설화가 화하족의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는 데 대해서만 참조하면 된다. 그럼 아래에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시조 고추모 탄생설화를 인용하도록 한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옛 기록에서 또 말하기를, 옛날 북방에 고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자 왕이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시비가 말하였다. ‘계란과 같은 기운이 저의 몸에 내려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을 하였습니다.’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그것을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주둥이로 그 아이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주고 마구간으로 옮겼더니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 이에 왕은 그가 하늘이 내려보낸 아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도록 하고는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그가 장성한 후 그에게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겼다. 동명은 활을 잘쏘았으므로 왕은 동명이 자기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으므로 동명은 건너가 수 있었다. 그가 건너간 후 물고기와 자라들이 곧 흩어졌으므로 추격하는 병사들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이리하여 동명은 부여 땅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조선상고문화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583>

 

위에서 인용한 호하족의 사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동명왕 탄생설화는 이미 삼국유사, 삼국사기, 조선상고사 등에 기록된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의 내용과 동일하다. 물론 문장 구성에 있어서 사용하는 구나 단어 등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에서는 모두 고추모는 하늘이 점지하여 내려준 신성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추모가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다 보니 그를 죽이려고 갖은 방법을 썼으나 그 선택된 방식들은 오히려 고추모를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거두어 줌으로써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와같은 여러 사서들 특히 화하족의 사서에서도 그 내용을 우리겨레가 남긴 사서들의 내용과 똑같이 기록을 하였다는 것은 그 내용이 기록된 원사서, 즉 고구려가 기록을 한 것을 기초로 하여 작성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인용되 위의 기록에 대해 사학자들은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탄생설화가 아닌 북부여 제5세 단군인 <고두막>, <동명> 탄생설화로 보기로 한다. 물론 고구려 시조 고추모 탄생설화역시 동일한 내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다른 사학자들과 동일하다. 이러한 주장을 하느 사학자 중에 한단고기를 번역, 주해한 임승국 선생도 있다. 어차피 뒤이어 인용하여 분석하게 될 한단고기 북부여기 하에 <동명왕> <고두막>에 대해서도 다루게 될 것이니, 위의 주장을 하는 임승국 서생의 글을 간략히 보도록 한다. 과연 <동명왕><고두막>인가 아니면 <고추모>인간에 대해서도 고증을 해야 한다.

임승국 선생은 북부여기 하 고두막 조의 주해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을 하였다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200년 정도의 시차가 있다함은 사학의 상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일부에선 북부여의 건국을 실질적인 고구려의 건국 연대로 간주하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동명과 주몽은 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인데 이를 한 사람으로 <삼국사기>에 묘사했고 곧 시조는 동명왕이요, 성은 고씨, 휘는 주몽이다.라고 했다. 한편 묘하게도 동명의 부여 건국 설화나 주몽의 고구려 건국설화가 똑같다. 즉 동명이 고리국으로부터 탈출 비류수 물고기의 도움으로 강을 건넜던 과정이 주몽의 북부여 탈출, 분능수, 물고기의 도움으로 도하의 과정이 똑같다. 북부여나 비류수가 현재 내몽고의 땅, 부이르 호수 및 바이칼 호수 동쪽이라는 몽고과학원 수미야 바타트 교수의 학설은 북부여기 및 고구려 본기 전체에 걸쳐 참고되어야 할 대목이다.”

<한단고기,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역, 정신세계사 136>

 

위에서 인용한 임승국 선생은 <동명>과 고추모를 별 개, 즉 동일 인물로 보지 않고 다른 두 사람의 인물로 확정하여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한단고기에는 <동명>은 고두막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추모에 대해서는 동명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한편 이미 광개토왕릉비문 연구의 고추모 탄생설과 고구려 건국기를 다루었듯이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릉비문의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에도 고추모르 <동명성왕>이라고 하지 않고, <추모왕>이라고만 하였다.

 

반면 삼국사기를 비롯한 다른 사서들은 고구려 시조 고추모를 동명성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 고구려 시조 건국기 중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의 관련 부분과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만 간략히 동시에 인용하여 비교해보기로 한다.

 

먼저,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요, 휘는 주몽, 추모, 혹은 상해이다.”. “19~ 가을 9, 왕이 죽으니 나이 40세였다. 용사에 장사니재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의 고구려 건국기를 보도록 한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이 나라의 터전을 처음 잡을 때 북부여에서 나왔다. ~중략~ 수레를 메울 것을 지시하여 돌아다니면서 남으로 내려왔는데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치게 되었다. ~중략~ 비류골 홀본 서쪽에 있으면서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세웠다. 인간 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므로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게 하니 왕이 홀본 동쪽 언덕에 있는데 황룡이 업고 하늘로 올라갔다.

 

위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시조 고추모를 <동명성왕>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그 동명성왕은 고추모가 생을 마친 후 시호로 주여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엔 인용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의 고구려 건국기사에는 그 어디에도 고추모에 대해서 동명성왕이라고 하지 않았다.

인한 위략의 고추모 탄생설화에 계란과 같은 기운이 저의 몸에 내려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하였다.”이라는 탄생설화의 내용 역시 다른 사서들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되들이만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 역시 이로 인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라고 삼국사기와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릉 비문에는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데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였으며 한단고기 가섭원부여기에도 그 해 5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라고 하여 고구려 시조 고추모가 알을 깨고 나왔다는 난생설화를 기록하였다. 물론 고추모 탄생설을 기록한 한단고기 중 고추모의 난생설을 기록한 것은 가섭원부여기가 유일하며 다른 기록들은 모두 유화부인이 고주몽을 낳았다고 하였다. 고추모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같은 난생설화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할 예정이다. 일단 여기서는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에 있어서도 신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난생설화>를 많은 사서들이 채택하여 기록하였는다는데 대해서만 알고 있으면 된다.

 

인용문의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중략~ 돼지우리에 버리니~중략~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라는 내용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기로 하자.

먼저 삼국사기에는 왕은 그 알을 개나 돼지에게 주었더니 모두 먹지 아니하고 또 길바닥에 버리자 소와 말이 다 피해가고 마지막에 들에데 버렸더니 새가 그 알을 날개로 품어주었다. 왕이 그 알을 깨보려 하였으나 안되어 도로 그 어미에게 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을 그 알껍데기를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번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도록 하자.

삼국유사에는 인용문과 비슷한 내용이 고구려 시조, 고추모 탄생설화를 다룬 기록에 두 편이 실려 있다. 위에서 이미 살펴 본 임승국 선생의 주장과 비교해 보고 한단고기에 기록된 동명왕 즉 고두막 탄생설화와 연계해서 분석하기 위해 두 편을 다 올려본다. 물론 이전 삼국유사 고추모 탄생설화와 고구려 건국기를 인용할 때 전 편을 모두 인용하였지만 정밀한 분석을 위해 두 편을 각기 다 하여 인용하기로 한다.

 

첫째, “금와는 괴이하게 여겨 유화를 방안에 남몰래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었다. 그녀가 피하자 햇빛이 또 따라와 비추었다. 이로 인해 임신하여 알을 하나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이 이것을 개, 돼지에게 던져 주었지만 모두 먹지 않았고, 길에다 버렸으나 말과 소가 그 알을 피해 갔으며, 들판에 버리니 새가 짐승을 알을 넢어주었다. 왕은 그것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깨지지 않았으므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천으로 알을 부드럽게 감싸 따뜻한 곳에 두자 어린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겉모습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둘째, “<주림전> 21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엣날 영품리왕의 계집종이 아이를 가졌는데 관상쟁이가 점을 쳐보고 귀하므로 왕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내 아들이 아니이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 계집종이 기운이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제가 아아를 밴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녀가 아들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작 입김을 불어넣어주고 마구간에 버리니 말이 젖을 주어 죽지 않았다. 마침내 부여왕이 되었다.(바로 동명제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한다. 이 졸본부여 역시 북부여의 다른 도읍이기 때문에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란 바로 부여왕의 다른 명칭이다.”

 

지금까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 기록을 위략의 기록과 대비하여 보았다. 이에 따른 결론은 지금가지 위략의 동명왕 탄생설화가 고구려 고추모 탄생설화로 알려져 왔지만 실제의 역사적 사실을 고찰해보면 이러한 인식이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추모 탄생설화와 삼국유사의 첫 번째 설화 즉 난생설화는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이며 삼국유사의 두 번째 설화는 북부여 제4세 단군인 고두막 즉 동명제 탄생설화임이 명백하다.

 

 

이와 같은 결론에 의해 <위략>의 동명왕 탄생설화에서 전반부 즉 그 왕의 시비가 임신하자 ~중략~ 그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은 북부여 제4세 단군인 고두막 탄생설화이다. 여이까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위략의 탄생설화와 비교·분석해서 내린 결론이다. 즉 고구려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는 <난생설화>이고, 북부여 고두막한의 탄생설화는 난생설화가 아닌 하늘의 기운을 받아 임신을 하고 알이 아닌 직접 사람의 아이를 낳는탄생설화로써 두 탄생설화가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아래에서는 위략의 탄생설화 가운데 성장과정과 탈출과정에 대해 분석하도록 한다.

 

먼저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도록 하고는 그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라는 내용에서 처음 동명이 언급된 후 그 이름이 짧은 탄생설화 가운데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하여 나온다. <위략>에서 기록하고 있는 탄생설화에는 주인공이 동명이지 결코 추모가 아니다. 결국 <위략>의 이와 같은 기록은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탄생설화가 아닌 북부여 단제인 <동명>의 탄생설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설화의 구성과 전개 과정이나 내용이 고추모의 탄생설화나 성장과정 그리고 탈출시 겪은 어려움을 하늘의 도움으로 극복하고 나라를 건국했다는 내용은 거의 똑같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위략에서는 주인공이 동명이지 고추모가 아닌 것이 분명 다른 고추모의 탄생설화와 건국기 등 전체적인 내용을 기록한 역사적 사료들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략의 기록에서 주요한 또 하나의 기록은 동명이 부여 땅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라는 부분이다. 물론 고추모가 물고기와 자라들의 도움으로 엄리대수를 무사히 건너 도착하였다고 하는 졸본천 역시 크게 보아서는 부여의 땅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를 기록한 모든 사서들은 고추모가 졸본천에 이르렀다고 하였지 부여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하지 않았다. 이제 위에서 간략히 언급한 내용에 대하여 위략의 기록과 다른 건국설화 등과 비교하여 분석하기로 한다.

 

먼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내용 중 고추모의 이름이 붙여진 기록을 보자. 삼국사기는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혔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쏘는 자를 주몽이라 하므로 그로써 이름을 삼았다.”라고 하여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활을 잘 쏘기에 부여의 속어에 맞추어 지어진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나이 겨우 일곱에 용모와 재략이 비범했으며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 쏘면 백 번을 맞추었다. 나라의 풍속에 활 잘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라고 하여 삼국사기와 똑같이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단민사에는 나이 일곱 살에 활과 살을 스스로 만들어 백발백중시키니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자를 주몽이라 하는 말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신단실기에도 나이 겨우 7세에 보통 사람과 뛰어나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니 화살이 나가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부여 속담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했으니라고 기록하여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이름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부여에서 추모·주몽이라고 하니 그에 따라 지어졌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위서>에서는 추모를 주몽이라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자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만주원고>에는 지금의 만주어에 활을 잘 쏘는 자를 탁림망아(이를 만주어로 주림무얼이라 읽는다)라고 하는데 주몽이 곧 주림무얼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여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자를 주몽이라고 하였다.”는데 대해 정확하게 그 원류를 고증하였다.

동시에 단재 선생은 활을 잘 쏘는 자 혹은 능력이 신적으로 출중한 사람을 <>·<주무>라고 하는데 이를 뜻글자를 빌어 <추모><중모>라고 이두로 표기를 하였다고 하였다. 반면 삼국사기나 여타의 사서들에서 <>, <주무><추모>·<중모>라 하지 않고 <주몽>이라고 기록한데 대해서 주몽이라고 한 것은 중국사에서 전한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따라 쓰다가 고구려본기에 올렸기 때문이다.”라고 그 유래를 정확히 고증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단민사, 신단실기, 조선상고사 등 모든 사서들은 고구려의 시조를 고구려 건국기에서 <주몽>·<추모>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에도 역시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터전을 처음 잡을 때 북부여에서 나왔다.”라고 하여 고구려의 시조 임금의 호칭이 <고추모>였음을 전하고 있다. 계속해서 릉비문에는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 탈출할 때 엄리대수에 이르로 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니 추격병들에게 잡힐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자라들은 줄짓게 하고 거부기를 뜨게 하라!”고 빌면서도 분명하게 추모왕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인용한 <위략>의 탄생설화, 건국설화에서는 그 어디에도 <주몽>이니 <추모>이니 <중모>라고는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모두 <동명>이라고 하였다. <동명>에 대해 한단고기에는 안함로의 삼성기전 상편에 을미(B.C.86)년 한나라 소제때 부여의 옛 도읍지를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라고 하였으며 계해(B.C. 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라고 기록하여 동명과 추모가 동일인이 아님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휴애거사 범장이 지은 북부여기 하에서는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라고 하여 <동명>은 북부여 제 4세 단제인 <고두막>을 칭하는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또한 북부여기 하 제4세 고두막 단제 30년 조에 임인 39(B.C 79) 55일에 고주몽이 분릉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고구려 시조 추모 임금과 북부여 제4세 단군인 고두막 <동명>이 동일인이 아님을 더욱 분명하게 기록해 놓았다.

 

지금까지 <동명왕>에 대해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단실기, 신단민사, 조선상고사 광개토경호태열제릉비문, 한단고기 등의 고추모 탄생설화, 성장과정, 고구려 건국 등을 정밀 비교분석해 본 결과 동명왕과 고추모는 동일인이 아님이 명백하다. 따라서 <위략>에 기록되어 있는 <동명왕> 탄생설화, 성장기, 건국기 등은 고구려 시조 고추모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북부여 제4세 단군인 고두막한에 대한 기록이 명백하다. 따라서 임승국 선생이 주장한 실제로 동명과 주몽은 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인데 김부식은 이를 한 사람으로 삼국사기에 묘사했고 곧 시조는 동명성왕이요, 성은 고씨 휘는 주몽이다라고 했다.”고 비판을 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탄생설화와 성장과정, 고구려 건국과 북부여기 상·하 동부여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분석할 때 더욱 분명하게 고증과 논증을 할 것이다.

 

이제 인용된 <위략>이 과연 고구려를 건국한 고추모에 대한 기사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인물 즉 부부여 제4세 고두막에 대한 기록인지를 도읍을 정하였다는 여러 사서들의 기사를 통해 고증해보기로 한다.

 

먼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1시조 동명성왕조 고구려 건국에 대한 기사에는 그리고는 그 재능을 헤아려 각각 용무를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렀다.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강산이 험고함을 보여 드디어 도읍하려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 위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동부여를 탈출한 고추모 일행이 우여곡절 끝에 이른 곳이 졸본천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우선 비류수 위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라 하여 졸본천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란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주몽은) 졸본주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을 정했으며 미쳐 궁실을 짓지는 못하고 단지 비류수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이로 인해 고를 성씨로 삼았다. (본래의 성은 해씨였는데 지금 스스로 천제의 아들로 햇빛을 받아 출생하였다고 말했기 때문에 고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역시 동부여를 탈출하여 고추모 일행이 도착한 곳을 <졸본주>라고 분명하게 기록하여 놓았으며 또 그곳에다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의 내용은 똑같다.

 

김교헌 선생은 신단민사에서 주몽이 이를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는데라고 하였으며 신단실기에서는 졸본천에 이르러 땅이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드디어 거기에 도읍을 정하려 했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고 다만 비류수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2421년 갑신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또한 졸본부여라고도 하니 그로 인하여 성을 고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신단민사나 신단실기 모두 고추모 일행이 이르는 곳은 졸본천 또는 졸본이라고 하였으며 바로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릉비문에는 비류골 홀본 서쪽에 있으면 산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세웠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홀본은 이두로써 졸본과 같은 마을 다른 뜻 글자를 사용하여 표기한 것이다. 홀이나 졸은 모두 그 음을 취하여 골이 되며 본은 그 뜻을 즉 바탕을 말한다. 따라서 홀본이나 졸본은 모두 골티, 골바닥을 말한다, 결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릉비문역시 고구려 시조 고추모 일행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갖은 어려움을 극보하고 도착한 곳은 졸본이요 그곳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워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한단고기에는 동부여를 탈출한 고구려 일행이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운 지명이 밝힌 기록은 고구려본기와 가섭원 부여기에 나온다. 가섭원 부여기에는 임술 28(B.C 59, 동부여 시조 해부루 임금 재위 년도이다.)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이듬해 새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라고 하였다.

 

고구려국 본기를 보면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리고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고 기록하였다.

 

지금까지 <위략>의 건국기가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의 건국기 혹은 기존의 나라를 차지하는 기록인지 고증하기 위하여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단민산, 신단실기,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릉비문, 한단고기 등과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르를 정밀하게 비교·분석하여 보았다. 고구려 시조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데 대하여 동부여에서 관가의 말지기로 뽑혀 인무를 수행하는 중 고추모의 능력이 워낙 출중하여 혹여 고추모가 동부여를 차지할까 두려워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를 알아차린 고추모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오이, 마리, 협보 등과 함께 동부여를 탈출한 고추모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졸본천·홀본에 이르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모든 사서들이 일치하게 기록하여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반면 <위략>에는 추격하는 병사들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이리하여 동명은 부여 땅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즉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부여이며,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되었다고 하여 졸본천이나 홀본에 도착하였다고 하지 않았다. 또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되었다.”고 하였지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하지 않았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하 5세 고두막(혹은 두막루) 계유 원년 (B.C 108)조는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후박달나라)의 후손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한단고기의 기록은 부여의 땅 졸본에서 재위에 오르고 스스로 동명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고두막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지 않았음을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다. 이는 위략의 도읍을 ᅟᅥᆼ하고 왕이 되었다.”라는 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이다.

 

지금까지 <위략>에 기록된 기록을 여러 사서들과 비교·분석해 본 결과 위략의 기록은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가 아닌 북부여 제4세 고열가 단군에 대한 기록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결론에 따라 동명고 고추모는 동일인이 아니며, 동명은 고구려 제4세 단군 <고두막>이며 고구려 시조는 고추모이다. 또한 고두막한은 졸본천에서 북부여 단군으로 재위에 올랐으며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다. 반면 고추모는 졸본천에 이르로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우리는 이와 같이 분명하게 다른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며, 혼선을 빚어서는 안된다.

 

2018225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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