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1965년, 김일성 수상의 중국 쿤밍시 방문 뒷이야기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4/14 [10:1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중국의 쿤밍을 거쳤던 김일성 수상의 인도네시아 방문 

 

요즘 평양에서는 제20차 김일성화 축전이 진행 중이다. 김일성화는1965년에 김일성 수상이 반둥회의 10돌 기념활동 참석차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수카르노 대통령이 명명한 꽃임은 널리 알려졌다.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8858&section=sc3&section2=) 그런데 김일성 수상의 인도네시아 방문이 중국 윈난성(운남성)의 쿤밍시(곤명시)를 거쳤음은 김일성화의 내력에 비해 덜 알려졌다. 조선(북한)에서는 외교를 맡았던 허담의 저서 《김정일 위인상 1》이 당시 방문을 상당히 상세히 소개했으므로 곤명에서의 경과를 아는 조선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 《김정일 위인상 1》, 조선노동당출판사 2000년 8월 제2판     © 자주시보,중국시민

 

“홀로 지새우신 밤”이라는 꼭지에서 허담은 김일성 수상에 대한 청년 김정일의 충실성을 부각했다. 

김일성 수상이 쿤밍에서 독감이 도지니 청년 김정일이 그날 저녁에 예정된 중국 측의 성대한 환영연회 출석을 취소시켰고, 또 영빈관의 김일성 수상 침실 밖의 응접실에서 커피로 졸음을 쫓으면서 안락의자에서 밤을 새웠다는 등이다. 

1989년 11월 6일 김일성 주석은 베이징(북경)의 낚시터 국빈관 즉 지난 3월 말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방문에서 들었던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30여 년 전 쿤밍에서 있었던 일을 회억하고 김정일 조직비서의 관심과 보살핌을 강조했다 한다. 

허담의 책에서 인용해본다. 

 

“평양비행장을 떠난 특별비행기가 중국의 곤명에 도착한 것은 1965년 4월 9일이였다.

비행장으로부터 영빈관에 이르는 연도에는 수만명의 곤명시민들이 명절옷차림을 하고 떨쳐나 북과 징을 울리며 *** ***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영빈관에 도착하신 **** ***동지께서는 *** ***의 건강을 두고 걱정이 크시였다. 조국을 떠나오기 며칠전에 *** ***께서는 독감에 걸리셨는데 수그러들었던 병세가 무개차를 타고 영빈관으로 오시는 과정에 찬바람을 맞아 다시 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숙소에 드신 *** ***께서는 오한이 나서 몹시 불편해 하시였다.

의사로부터 *** ***의 건강상태를 보고받으신 그이의 마음은 한없이 괴로우시였다.”(38~ 39쪽)

 

보다시피 병세는 무개차 때문에 다시 도졌다. 그런데 그 무개차의 내력에 대해서는 허담이 몰랐던 건 물론 지금까지도 아는 조선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외국차 자르기부터 중국 차 제공하기 

 

전해인 1964년 10월 20일 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인 최용건 항일투사가 젊은 시절 공부했던 윈난성을 방문하게 되었다. 사전에 윈난성 정부는 높은 수준으로 접대하라는 중앙의 지시를 받았는데 난제가 두 가지였다. 귀빈의 초상화를 그려본 경험이 있는 화가가 없는 것, 하나는 무개차가 없는 것이었다. 하여 장기간 윈난성 공안청 청장으로 일했고 그때 부성장, 대리성장이었던 류밍후이(刘明辉류명휘, 1914~ 2010)가 베이징에 연락하여 베이징의 화가 하나가 와서 다그쳐 그려서 초상화문제를 우선 해결했다. 

 

▲ 윈난성에서 최고로 성위서기까지 맡았던 류밍후이     © 자주시보,중국시민

 

무개차는 어떻게 하겠는가? 윈난의 1인자, 중공 윈난성 위원회의 서기 옌훙옌(阎红彦염홍언, 1909~ 1967)이 나섰다. 자기 승용차를 내놓겠으니 잘라서 무개차로 개조하라고. 류밍후는 반대했다. 안된다, 안된다, 당신 차를 자르면 이후에 바람 불고 비 내릴 때 당신이 맨날 맞기만 하겠는가? 

 

▲ 윈난성의 1인자였던 옌훙옌     © 자주시보,중국시민

 

생각 끝에 류밍후이는 성정부의 차대(車隊)에 가서 낡은 차를 하나 골라 교통청 청장에게 개조를 지시했다. 관건은 개조한 다음 운전사에게 충분히 연습을 시켜 관건적 시각에 발동이 죽지 말아야 한다는 것. 

20일 중공 창시자의 한 사람이고 당시 국가 부주석이었던 둥삐우(董必武동필무)가 특별히 쿤밍에 와서 최용건 위원장을 맞이했고, 연도의 수많은 군중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22일 최용건 위원장이 귀국하여 윈난성 방문이 순조로이 끝났는데, 성 외사처(대외사무를 맡은 부서)에 편지가 날아왔다. 왜 국산 훙치(붉은기)차를 쓰지 않고 외국 승용차로 국빈을 환영했는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의견을 중시한 류밍후이는 외교부 부부장 류샤오(刘晓유효)에게 전화를 걸어 저번에 하마터면 성위서기의 승용차를 자를 뻔 했고, 외국차를 쓰니 대중들이 또 의견을 내놓으니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후에 외교부가 줄을 달아 창춘(장춘)의 제1자동차공장이 윈난성 정부에 훙치(红旗붉은기)표 무개차 2대를 증정했다. 이 훙치 차에 대해서는 지난 1월에 발표된 타산지석 “트럼프 핵버튼 발언은 북 핵보유 교묘한 인정”(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512&section=sc29&section2=)을 참조하시라.  

그렇게 생겨난 무개차를 제일 먼저 사용한 사람이 바로 김일성 수상이었다. 전에 의견을 제기했던 사람은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 대단히 기뻐했다. 

“잘못을 알기는 쉬워도 고치기는 어렵다. 성 영도자들이 대중의 의견을 받아들이니 윈난은 앞날이 밝다(知过不难改过难。省领导听得进群众的意见,云南大有希望). ”

 

파격의 파격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성의껏 마련한 무개차가 훌륭한 환영효과를 만든 동시에 김일성 수상의 병이 도지게 한 건 뜻밖의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무개차가 유발한 병세 때문에 청년 김정일이 예정된 연회 참석을 취소하고 밤을 새웠다는 일화를 만들어내 김일성 주석이 수십 년 뒤에도 잊지 않게 한 건 또 뜻밖의 결과이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허담은 환영연회 불출석에 대해 이렇게 회억했다. 

 

“의사로부터 *** ***의 건강상태를 보고받으신 그이의 마음은 한없이 괴로우시였다.

이날 저녁 중국 측에서는 *** ***의 곤명시 도착을 환영하여 성대한 연회를 차리려고 하였다. 중국 측의 고마운 성의였다. 하건만 **** ***동지께서는 *** ***의 건강 때문에 그 성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시였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있는 나를 곁으로 부르신 그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 이곳을 공식방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통과차로 들리신 것만큼 중국 측에서 차리는 연회에 참가하시지 않아도 실례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의례격식에 꼭 매달려야 한다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모든 의례행사를 *** ***의 건강을 잘 보호하는데 복종시켜야 합니다. 수령님께서 연회에 참가하시지 못하신다는 것을 중국 측에 말해주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곧 중국동지들과 마주 앉아 고마운 성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딱한 사정을 알렸다. 곤명시당의 책임일군은 성의를 표하지 못하는 것을 여간 아쉬워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였다.

《존경하는 김일성동지께서도 이에 동의하셨습니까?》

《우리 수령님께서는 몸이 불편하시면서도 중국동지들의 고마운 성의를 마다하면 실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런 결단을 내렸습니까?》

《수령님의 신변을 책임진 우리의 젊은 사령관의 결단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시에 어느 한 나라 대통령이 들린 적이 있습니다. 의례격식에 따라 연회에 꼭 참가시켜달라는 우리의 청원을 받고 보좌성원들은 대통령을 모셔왔습니다. 연회에 참가하여보니 대통령은 고열로 신고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마음도 괴로왔습니다. 정말 조선동지들은 자기 수령을 보위하는데서 모범입니다.》

진심에 넘친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나는 의례행사를 *** ***의 건강에 복종시킨 이날의 결단은 외교관례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39~ 40쪽)

 

일정이 빡빡하기 마련인 중국 간부들이 일껏 준비한 행사가 취소되는 걸 받아들인 현상을 이해할 때, 두 나라 혁명가들이 함께 싸운 전우였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난 3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환영한 중국 측의 처사에 대해 “파격”이란 평가가 나왔는데, 시진핑 주석이 3월에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전통적인 중조 친선은 피로써 맺어진 친선으로서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강조한 건 그런 파격의 토대로 된다. 

1965년의 쿤밍 방문은 지금도 많은 걸 시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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